편지 쓰기

마음을 얻으려 하느냐

by 이븐도




안 돼. 그거 아니야.



원래 뭐가 하기 싫을 땐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왜 해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왜 써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시간과 돈과 편지. 그러니까 마음, 이 되겠군.

편지는 곧 마음을 쓴다는 거잖아?






다이소에서 작은 편지지 세트를 열몇 개쯤 사왔다. 문제가 있었다. 줄이 많았다. 펼친 상태의 위아래면 모두가 줄글 칸이었다. 한 사람당 서너 줄이나 쓰면 되겠거니 했던 나는 닐을 뜯 절망했다. 이거 안 되겠구만. 그렇다고 나머지를 환불하기도 그랬고 작은 편지지를 다시 찾으 아트박스며 교보문고까지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그게 더 귀찮았다. 어쩔 수 없지. 써야 했다. 27명에게. 그래, 수선생님 것도 포함. 쓰기로 했으니까.




아무튼 병동을 떠나는 사람들은 선물을 돌렸다. 테이프 커터, 사원증 릴홀더, 쿠키나 양말 세트, 형광펜 세트 등등. 먼저 부서이동을 간 동기는 위글위글에서 귀여운 줄자를 하나씩 사서 돌렸다. 이거 다 사는데 얼마나 썼으려나 생각했다. 다들 유용하게 쓰긴 했으나 몇 달이 지난 지금 결국 그 줄자도 한두 개쯤은 병동 데스크에 나뒹군다.


뭐, 준 건 어차피 나를 떠난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였지만 그걸 보면 괜히 내가 다 좀 그랬다. 그게 뭐라고. 그러니까, 어차피 받는 입장에서는 아런 쓸모가 없을지도 모를 그 수많은 것들. 나도 그들의 모든 선물이 마음에 든 게 아니었으며 탈의실 테이블을 다 채운 각각의 카드와 작은 종이가방들을 보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다. 내가 만약 A가 준 뭔가를 받는다면 그냥 오피스텔 분리수거장에 바로 버릴 것 같기도 해서. 좀 그럴 수 있는 거잖아?




그래서 원랜 병동에 간식이나 잔뜩 채워주고 가려고 했다. 복사용지에 몇 줄 크게 감사하다고 써붙이고. 수선생이 나한테 로테이션을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아 A를 더 이상 안 봐도 되겠구나. 하는 거였다. 나는 그 때 알았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생각보다 더 싫어했다는 것.

더해서? 일이 좀 바빠지거나 꼬이면 멀쩡한 마우스를 탁탁 내리치며 성질을 부리는 B의 민낯을 더 안 봐도 된다는 것도 좋았다. 아침마다 비닐봉지나 밀폐용기에 든 것을 먹으며 수수깡이라도 씹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C를 그만 봐도 된다는 것도 반가웠다. 물론 그들은 악마가 아니었다. 다들 좋은 면도 있었고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였겠지.


하지만, 그래서 뭐?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띠꺼운 존재일 거야. 러나 부서이동이 확정된 후 일하면서는 매일매일 그 사실들을 떠올렸다. 정말 싫긴 했나 봐.






나 너네한테는 편지 쓰고 싶었는데 쓰기 좀 그런 사람들도 있어서 그냥 다 안 썼엉, 이해 좀 해죠. 라고 한 선임이 병동 마지막 근무 날 그랬다. 그 말을 믿진 않았다. 정말 친한 사람들한테는 썼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원망스럽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원래 그렇잖아. 서른 명에 달하는 인원에게 아무튼 좋은 말만 가려서 또박또박 쓰는 건 보통 노동이 아니니까. 거기다 뭐 돌아오는게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그녀는 그렇게 각자의 이름표가 붙은 양말 세트들을 탈의실에 남겨놓고 떠났다.


좁아터진 병동에 비밀은 없었다. 퇴사한 누군가는 몇 명의 사물함에만 본인의 이야기를 적은 쪽지와 자일리톨 캔디를 넣어두고 갔다. 그 소수정예 멤버가 누구인지, 각자의 편지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를 그 날의 모든 근무자가 알게 되는 데는 반 나절이 채 안 걸렸다. 그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나름의 진심이 조롱거리가 되는 게 딱히 상큼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쓸 거면 모두에게 써야 했고 안 쓸 거면 아예 종이쪽 한 장도 안 써야 했다. 그래서 나도 그러려고 했지. 아.






내가 병동에서 선임이며 선배가 되었다는 걸 슬슬 자각했을 땐, 누군가 사번을 들먹이며 니 밑에 들어온 애가 몇 명이라는 쿠사리를 먹일 때도 전산에서 그들의 사번 숫자를 보며 그 낯섦에 혼자 멈칫했을 때도 아니었다. 병원 인근 지하철역이나 카페나 올리브영 등등에서 그들이 나를 분명 보고도 못 본 척했을 때였다. 불편한 사람이다 이거지.


한 번은 출근길 전철 빈 자리에 앉았다가, 다음 역에서 커플인 듯한 남녀가 타기에 맞은편으로 자리를 비켜준 적이 있었다. 둘은 나란히 앉았고 몇 분쯤 지나 고개를 들었던 나는 왜 어디서 본 얼굴이지, 했다. 병동에서 사고는 있는 대로 치면서 퇴근 후에는 남자친구랑 맨날 붙어 있는다며 씹히고 또 씹히는 그 신규라서. 인사라도 할까 싶었으나 이미 저쪽에서 나를 먼저 알아보고 모른 척하는 게 보였다. 나는 바로 눈을 깔았지만 몇 초 안 있어서 그 둘은 다른 칸으로 걸어갔다. 그렇군, 그래그래.




그리고 그들은 나와 같은 역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웃기다고 생각했다. 저럴 거면 다른 역에서 내렸어야지. 아니면 목례라도 하던가. 더 웃긴 점? 나는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 일화도 아닌 일화가 돌고 돌아 너 그 때 거기서 걔한테 자리 비켜줬다매? 라고 내 귀로 다시 돌아온 것. 누가 그래? 몰라. 걔가 말했겠지? 나도 들었어. 아. 그걸 본인이 말하고 다녀? 웃기네.


정말 좀 웃기다고 생각은 했는데 고까운 것까지는 아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기껏 제시간에 와 놓고도, 나는 병원 근처 버스정류장에 병동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걸 멀리서 본 후 굳이 택시를 부른 적이 많았다. 사실 선임 후임 안 가렸고 동기도 있었다. 어쩌다, 아니. 어쩌다가 아니고.. 그럼 백 프로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같이 탈 텐데, 가면서 또 말해야 하잖아. 싫었다. 난 아직 유니폼도 안 입었는데. 가깝든 안 가깝든 정말 친하지 않고서야 나는 병원 바깥에서 누굴 마주치는 게 좋기만 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실효성도 쓸모도 없는 관계였다. 밖에서 보면 아는 척도 안 하고, 당연히 어떤 의미로의 도움도 안 될 관계. 안 주고 안 받고. 이러면 사회생활 빵점이라는데. 근데 뭐 어떡해? 사실 쟤들도 싫을걸? 혼자 이어폰 끼고 인스타나 보면서 가는 게 좋을 거라고.






편지에는 목적이 있었다. 보통은 마음의 표현. 나 너 사랑해. 좋아해. 축하해. 미안해. 잘못했어. 또 고마워. 그런 거. 그럼 내가 이들에게 쓰는 편지와 선물의 목적은 뭐여야 하는 걸까? 감사? 명목상 그렇겠지? 음. 내가 로테이션을 간다는 건 사실 이들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나한테나 별 일이지. 떠나는 내가 구태여 돌리는 무언가. 투자? 이걸 투자라고 할 수가 있나? 받을 사람들 태반과 나중에는 아는 척도 안 할 텐데. 어쨌든 내가 받는 입장이라면?


준다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전제했다. 이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도 그 때의 내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 표현하는 것. 상대를 위한 것일 수도 있었겠으나 결국은 나를 위한 거였다. 내가 너를 이만큼 생각했다는 걸 이렇게 표현했으니 나는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표시. 그래서 가까운 사이에서의 어떤 선물이나 시간은 아깝지 않았다. 상대에게 얼마짜리를 어떻게 줬어도, 결국 나를 위한 거기도 해서. 그래야 나한테 뒤탈이 없지. 그걸로 상대가 웃고 좋아한다면 그게 당장의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좋은 거잖아.


그러니 할 말은 해야 했고 줄 건 줘야 했다. 고맙고 감사했다는 말. 정말 그 말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긴 했다. 두어 달쯤 뒤의 내가 이상한 이유로 또 그 때 그냥 몇 자씩이라도 쓸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했고. 그래, 그럼 써야 했다. 진짜 편지.




집을 치우게 되면 가장 먼저 버리게 되는 것들이었다. 이제는 망해버린 관계의 산물들. 그 때는 진심이었을 상황의 잔여. 주는 본인들은 행복했을 거고 아마 받았을 당시의 나도 그랬을 것들. 당장 나의 우선순위에서는 다 밀리는 것들. 반 년 전에 읽다가 말았으나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은 책들보다도 가치가 없을 종이쪽들.

어떤 퇴사한 사람들의 편지에서는, 굳이 묵혔다 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의 자의식이 먼저 보였다. 왜 쓴 건지 모르겠는 글들. 나한테 쓰는 글인데 본인 얘기가 더 많았다. 난 그런 게 싫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없이 다 버렸다. 반대로 남긴 것들을 떠올렸다. 간사하게도, 나를 어떻게 봤는지 써준 것들. 버리더라도 사진은 한 번 찍어두었다. 그들도 내가 아주 좋아서 그렇게 쓴 건 아니겠지. 하지만 시간이든 뭐든 들였다면 최소한 바로 버릴 만한 건 아니여야 하잖아?






그들이 모두 싫은 게 아니었으나 못내 사랑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지하철역과 버스와 가게들에서 나를 마주치고도 모른 척한 수많은 신규들 역시 그런 마음일 거고. 아니다, 그 친구들은 내가 아예 싫으려나? 모르는 거지.

하여간 그래서 페어웰도 안 하겠다고 했다. 가서 잘 먹고 노는 것과는 별개로, 누군가는 출근 전에 구태여 일찍 나오거나 피곤해 죽겠는 퇴근길에 가야 하는 회식자리라서.


사실? 정말 지긋지긋했다. 누가 가는 거 안 아쉬워하냐고. 그런 자리에 들여야 하는 에너지가 너무 아까웠다. 그런 거 안 해도 어차피 누군가는 나를 조금은 보고 싶어 하겠지.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어차피 다 월급 받으려고 각기 이름 올려놓은 직장.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뻑적지근한 행사를 돈이며 시간을 써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마음으로 순수하게 아쉬워만 해주면 돼. 아니꼬움을 감추고 출석해야 하는 그런 자리도, 엔빵해서 억지로 해야 하는 선물도 다 싫었다. 뭔 봉사 해? 그냥 다 일하러 온 거잖아.




프리셉터는 나의 로테 소식을 듣고는 거기 있는 선임 하나의 이름을 대며 그 분을 아냐고 물었다. 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이라면 절대 안 만났을 것 같은 사람을 소개팅 상대로 주선해 줬거든. 같이 일한 기간이 있어서 나는 그녀의 성격을 대강 알았다. 거절하기도 뭐해서 간 자리였는데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떠넘긴 게 티가 나서. 아니라면 아닌 건데.. 흠, 그 정도는 눈치 깔 수 있지.


뭐 어째야 하는 걸까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녀는 붙잡아라, 니 동앗줄이다. 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아핳핳 그런가요 답장을 보냈었다. 그래, 그렇겠지. 하. 뭐 그럼 또 돈 들여서 기프티콘이라도 사다 바쳐야 하나 생각했는데 일이 바빠 더 고민하지는 못했다. 쉽지 않다. 수선생 선물은 또 따로 사야 하니까. 우리에게 편지를 못 썼다고 말한 그 선임도 나중에 그랬거든. 그래도 수쌤한테는 써, 너네. 나도 썼으니까. 알겠지? 라고. 끝나는 관계란 건 정말 없어서, 이렇게 지겹게도 정말 돌고 도는 것 같았다.




가계부 어플에는 '사회생활+친교'항목이 있다. 내가 만들었다. 다음 병동에 인사차 갔을 때 가져간 쿠키 세트와 케이크 값이 9만원 정도 되고, 당장 이곳에 돌릴 선물 값이 일단 16만원 정도 나왔다. 이 비용이 향하는 곳? 내가 쓸 편지가 향하는 곳? 사회생활이라 부르는 이 작은 세계의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이 얼마나 좁은데. 그래서 마음을 다잡는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잘 고른 단어들을 활용해서,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쓰자고.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다. 전적으로 좋은 표현들만 써서. 귀여운 눈웃음이 사랑스러웠던, 에너지가 넘쳐 항상 닮고 싶었던, 손이 빨라 부럽고 미안했던, 편하게 대해주셔서 늘 감사했던, 저와 함께 일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 등등. 따로 떼어놓고 보면 딱히 또 거짓말도 아닐 그 사실들.




쓰면 되지. 전하면 되지.

이 병동을 나가면 사실 더욱더 합법적으로 모른 척할 사이가 될 많은 사람들.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아니. 목적은 바로 해야지. 이건 친구나 애인과의 감정 교환이 아니다.

이 편지들의 목적은 사회생활이다. 내가 계속 머무르고 구를 이 사회 속의 나를 위한 것. 그러니 어떤 가시도 까끄러움도 없는 사실만을 편집해 써야 한다.



쉽지 않다.

하지만 원래 일은 그래. 사회생활도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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