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퇴사?
아니니까 들뜨지 마라.
오아시스 팬스토어는 예약해두고 안 갔다. 날이 너무 추워져서 어떻게 껴입어도 그런 반팔을 입고서는 그 경기장에서 대여섯 시간을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주최사 하는 꼴도 뭔가 아니꼬웠다. 어쩌면 그냥 굿즈를 더 안 사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사실 예전부터 리암의 행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뭐, 그냥 그럴 수 있잖아?
그 돈으로 그냥 선물을 샀다. 두 달 전에 이 병동을 떠난 후배가 준 압박스타킹을 엄청나게 잘 신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편지에 썼다. 어떻게 잊니, 이렇게 짱짱한 걸 준 사람을. 신고 벗을 때마다 네 생각을 하는걸. 낮은 연차의 서러움이다. 본인은 온갖 사람들의 부서이동이며 사직 때마다 선물을 사다 바쳐야 하지만 절대 그 반의 반도 회수할 수 없다. 계속 생각나서 좀 미안했다.
자취를 시작한 동기에게 집들이 선물을 주지 못했다. 여전히 집들이 관련으로는 씽크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주고 싶은 걸 주문했다.
저 어때 보여요, 물으니 머리가 노래, 라고 했다. 아핳, 했더니 그럼 뭐라고 말해줘야 해, 했다. 그런 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사복이 아닌 유니폼을 입고 갔다. 2분 늦은 나를 수선생님이 너무 고깝게 생각하시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우, 늘씬하고 이쁜 분이 오셨네, 했다. 머리에 대한 언급은 요만큼도 없었다. 이런 유니폼도 제복이라면 제복인지 나름 효과가 있었다. 시커먼 사복이었으면 노란 머리가 더 부각됐을지도 모른다. 친구는 올영 흑채라도 사서 뿌리고 가라고 했지만 일단은 그러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다.
뷰가 달랐다. 당연하지. 층수가 몇이나 차이가 나는데. 높았다. 분명 같은 건물인데 무슨 티익스프레스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도로 전경이며 가로수가 드론이라도 띄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윗공기가 좋았는지는 모르겠고 나는 20분간의 그 대화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게 전부 다 소화되어서 병동으로 돌아와 핫도그에 삼각김밥을 흡입했다. 이제는 그렇게 불량배처럼 핫도그 막대나 물고 삐딱히 선 채 환파하는 짓거리도 못 한다. 신규가 된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소아 병동에서 오셔서 걱정이 많으시죠, 괜찮아요. 걱정 마요. 환자수도 적고.. 그리고 거기서는 다 하셨잖아. 내과 외과 어쩌고.. 그리고 어른들은 관대하셔. 좀 못해도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격려해 주세요. 거기랑 많이 다르겠지만 좋은 의미에서는 정반대기도 하고, 몇 년도 입사시지? 아이고, 이제 뭐 눈에 뵈는 게 없을 때네. 그쵸? 하하하. 그럴 때 이렇게 딱, 환기해주고 그러면 딱이긴 해요, 잘 오셨어요. 거기는 간호사가 많이 없죠? 여기는 오십.. 몇 명이더라? 많죠?
등등. 56명? 맞나, 인원이 그렇게나 많다니. 내가 주전부리를 얼마치를 사 갔어도 50명이 내 존재를 아는 건 절대 불가능인데. 그럴 줄 알았으면 쪽지를 더 예쁜 데 써갈 걸 그랬다. 쿠키랑 케익 다 먹어도 그 쪽지는 냉장고 같은 데 붙여놓잖아. 신박한 높이의 병원 전경이 펼쳐진 수선생님 방에서의 독대. 분명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색으로 페인트가 칠해진, 비슷한 인테리어의 병동. 다 같고도 다른.
신규인데 신규가 아니었고 진짜 신규가 맞았다. 메일로 보냈다는 업무매뉴얼을 보니 더 그랬다. 아찔까지는 아니고 음 좀 뭐가 많네 생각했는데 밤에 뽑아서 읽기 시작하니 아찔한 게 맞았다. 나 이거 받고 한 이틀 일 구경하다가 바로 혼자 일해야 하는 거잖아, 아. 하하하.
선우, 찬우, 태영, 주현, 다인, 은유, 윤성. 인사의 주간이었다. 그 날 본 환자 여덟 명 중에 여섯 명이 구면이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는 다음 달에 봐요, 했고, 어떤 엄마는 그 때 선생님이 말해주셨던 거 그 다음 선생님이 어쩌고.. 하며 어쨌든 나를 칭찬해주는 말을 했다. 저 이제 여기 안 와요. 어머, 왜요? 그만두세요? 아니요. 딴 데로 가요, 11월부터. 어떡해, 선생님 좋았는데. 저두요.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라기보단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을 좀 보고 싶었다.
꽤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했던 걸 알았다. 내내 퇴근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때 죽고 못 살던 사이들과는 어쩌다 남보다도 못하는 사이도 되고, 이런 사이였던 사람들과는 두고두고 떠올리다 보고 싶다고도 생각하게 되는 거. 신기했다. 분명 처음 왔을 땐 빽빽 울기만 하는 애였는데, 이제는, 이름 뭐야, 하면..깅다잉, 하는 정도는 됐다. 그런 걸 보고 갈 수있어서 다행이라고 또 생각했다.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한 보호자는 약제부의 게으른 일처리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간호사에 대해 잔뜩 성질을 냈다.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려던 데이번이 도로 나와서 말을 얹다가 되레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사실 이건 누군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규정상 못해 드린다는 말만 열받게 반복하는 약제부 잘못인데. 3개월 뒤가 재입원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중간에 뭔 일이 있으면 어차피 이 병원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나와는 이젠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구. 나이트 끝나고 졸려 죽겠는데 수선생님 기다렸다가 전달하고 왔다. 그 엄마는 분명 내 얼굴과 그 데이번의 이름과 얼굴 모두를 기억할 거거든.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안할 순 없잖아?
와중에도 보호자가 나를 왕선임이자 그 신규보다는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대해서 내가 다 민망했다. 약제부에 전화를 걸 때 계속 자기를 바꿔 달라며 입모양으로 말하는 그 엄마 앞에서, 속으로 신규에게 그랬다. 봤냐, 짬이란 이런 거야. 그러니까 자꾸 옆에서 사족 붙이지 말고 집에나 가렴, 제발.
그 짬, 이제는 없다. 짬도 없고 이 세계의 일원이던 나도 없다. 나이트 출근하는데, 입원했던 애들이 그린 그림을 1층 로비에서 전시 중이었다. 모르는 이름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인데 어차피 얼굴 보면 다 알 것 같았다. 정형외과든 혈액종양내과든 어쨌든 자리가 없으면 이쪽으로 왔고 왔다가도 떠났으며 떠났다가도 돌아오거나 마주쳤다. 여기가 하나의 세계였다는 걸 알았다. 독보적인 세계. 내가 정을 먹고 사는 괴물 같은 거였나 생각했다. 난 여기서 애를 안 낳겠다는 생각이 더 공고해졌는데, 애들 우는 소리가 너무 지긋지긋하게 싫었고 지금도 싫은데.
내가 아무리 친한 척을 해도 낯만 가리는 애들이 너무 얄미웠고 약 하나하나와 치료과정 한 줄에도 사활을 걸어 예민하게 굴던 보호자들이 미치게 싫었는데. 좋아하지 않았어도 그리워할 수는 있는 건가? 그러게, 여긴 집 같은 데잖아. 한 선임이 떠날 때 집 떠나는 기분이라 좀 그렇다고 얘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작이자 진행이었고 어쩌면 끝일 곳. 여기.
신규 때 몇 달 내내 정리한 작은 파일들을 사물함에서 뺐다. 열댓 장 될까 싶은 칭찬카드들이 들어 있었다. 칭찬보다는 거기 적힌 사람 이름과 일화들이 기억난다는 게 문제였다. 문제까지는 아닌가. 다 없어지는 건 아닌데 요상하게 응어리지듯 남은 그것들.
나 퇴사하는 거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든다. 센-티멘털한 생각. 센티멘털에 꼴값 맞다.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거든. 중간연차는 죄다 빠져나가고 신규밖에 없어서 가라앉는 배 같은 이 병동을 떠나 배울 것도 많고 경력 인정도 잘 해주는 부서로 떠나는 나를 정말 부러워하거든. 진짜 가긴 간다. 널널했던 나이트 때는 할 게 없어서 새 부서 수선생님이 들으라고 한 교육도 다 들었다. 다시 시작이라니. 정규근무는 진작 끝났고, 오아시스 공연과 장기오프가 끝나고 나면 정말 마지막이다. 사실 마지막이라고 하기도 그래. 그 땐 그러고 나면 진짜 그 부서로 이동이니까.
안 믿긴다. 내가 너무 크게 받아들이나? 근데 그럴 수 있지. 3년 반 넘게, 내 시간의 70퍼센트 이상을 할애한 곳이잖아? 많은 게 남아 있고 남아 있을 거라고. 아무리 떠난다고 해도. 괜히 무섭기도 하고, 좀 섭섭하기도 하고.
이사라도 안 가야겠다. 다 바뀌는데 이거라도 안 바뀌어야지, 안 그래? 맨날 같은 데서 달리기하고, 같은 데서 카페 가고. 비슷한 거 입고. 그럼 되지.
그러다보면 또.. 잘 바뀌어 있을 거야.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