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년에 몇 살?

1)-1. 어떻게들 사남

by 이븐도




1) 29살.

1)-1. 잘.



리암은 공연 때마다 탬버린을 던진다고 했다. K는 그걸 꼭 받고 싶다고 했다. 정말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플래카드를 뭘 들어야 인스타에 박제될 수 있는지 조언을 해 달라고 했다. 넌 아이돌 좋아하니까 그런 걸 좀 잘 알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응? 난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아, 임마. 반다나든 사인볼이든 뭐 받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내한공연이 진짜 다음 주가 되었다. K와 정자역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창가 닷지 자리에 앉았다. 분당경찰서 앞으로 지나가는 직장인들과 경찰들과 애완견들과 저녁이 되어가는 하늘을 보면서. 1년 만이었다. 야,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그러게, 어제 본 것 같아. 멕이는 말 같았다. 물론 그 친구는 나를 엿먹이려 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느꼈을 뿐. 일 년이나 지났는데 변한 게 없으면 발전이 없었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야, 다음에 볼 땐 달라져 있을게. 했다.

뱉고 후회했다. 진짜 찐따같아서. 그래도, 아. 그니까 어떻게 이렇게 주제가 한 치도 안 달라졌냐, 어이없어, 하면서 웃으면서 말했으니 반은 장난이었다.


남자와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사귀거나, 남이거나. 그러니까 K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사실 남에 더 가까웠다. 나는 오아시스 공연이 끝난 후 집으로 오는 셔틀을 예약했지만 결국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예약은 진작에 마감됐으나 K는 표를 예매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아마 표를 넘기게 될 것이다. 그전에는 대리티켓팅을 기깔나게 하는 업체를 그에게 알려준 적 있었고 그는 콜드플레이 첫공연을 60번대 자리에서 여자친구와 연석에서 관람했으며 뮤즈 내한공연은 11번 자리에서 펜스를 잡고 봤다.




친구를 만났고 집에 와서 잤다. 늦게 일어나 달리기를 하고 오니 뭐하냐 세 글자 카톡이 와 있었다. 용건이 없잖아? 나도 다른 약속은 없었다. 우리는 스케줄표를 공유했다. 그는 근처 다른 병원에서 근무했다. 정식 약속을 잡아서 볼 만한 사이는 아니었고 그냥 정말 이렇게나 할 일이 없는 날 번개로는 볼 만했다. 외모도 주제도 서로의 인생도 그 때와 똑같았다. 당연한 건가? 이제는 성장기도 대변혁의 시기도 아니니까. 군대도 다녀왔고 취직도 했고 적응도 했다. 있다면 뭐 자취방 구하기나 결혼 정도겠지. 결혼도 대변혁은 아닐지도 몰랐다. 애라도 낳으면 모를까.






몇 년 전쯤, 그러니까 대학교 1,2학년쯤에 K를 알았더라면 얘를 뭐 운명 같은 걸로 여겼을까 생각했다. 작년. 공연장에서 랜덤으로 얻어걸린 인간, 똑같은 직업, 방방곡곡의 사람들이 모인 스탠딩 대기줄에서 찾은 지척의 거주지, 대전 본가. 근데 그것도 얘네 집이 트리풀시티면 우리 집이 그 옆 아이파크 같은 식.


작년 노엘 내한 때는 셔틀이 없었다. 오프닝 공연 때문에 시작 자체가 늦었던 콘서트는 10시 반이 넘어 끝났고 보관소에서 짐을 찾자 11시 반이 넘어 있었다. 적당히 멀면 분당까지 택시를 타고서 반띵이라도 했을 텐데 한밤중 고양에서 야탑이며 미금은 절대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돌고 돌아 종로 3가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신사에서 택시를 타고 각자의 거처에서 차례로 내렸다.




아무튼 둘다 공연장을 싸돌아다녔고 아이돌에든 락밴드에든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지출하는 중이었으며, 간호사였다. 작년 잠실 공연 가셨어요? 아, 그때 제가 근무조정을 못 해서.. 어, 교대 근무하세요? 어, 네. 소방관? 간호사요. 아, 네? 분당? 네. 헐. 혹시 나이가..? 저요? 아하하. 공연장에서 만난 또래 남자가 지겨운 누구쌤 누구쌤이 된 순간. 그가 간호사임을 확인하자 정말 짙은 지겨움을 느꼈다. 아하하, 야 나 거기 다녀. 네? 아, 나이 똑같잖아. 존댓말 쓰게? 하하, 그럴까.


항목은 달랐으나 장난감이나 옷가지에 환장하는 것도 비슷했다. 나는 걔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 뭐 아무리 심심해서 말을 건 거라고 생각해도, 좀 그럴 수 있잖아? 결과적으로는 아닌 게 되었고 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스스로 그걸 느낄 때마다 벽 같은 걸 앞에 둔 기분이었다. 씨, 연애는 언제 해? 이렇게 조건들이 로맨틱하게 딱딱 맞아도 사귈 수 없는 거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거지?






우리는 정서적으로 교류하지 않았다. 나는 작년 공연 때 나보다 행동력이 딸리고 빠르게 지치는 그를 보고 어찌됐든 얘랑 사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만난 지 고작 반나절. 끓이지도 않은 김칫국을 비운 거지. 좋은 말로 부드럽고 밝았지만 나쁜 말로 결정이 느렸고 답답했다. 옆에 있으면 내가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연이 끊기지 않은 건 정말 서로 그랬을 거라서. 걔 입장에서 내가 어땠을지 알 수 없었으나 비슷했겠지, 뭐.


8월, 공연장을 나와 그냥 분당의 또래 간호사로 1대 1 만남을 가진 날. 우리는 뇌가 없는 것처럼 장시간을 떠들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할 말이 많아 정신이 없기도 해서. 랍잖아? 어떻게! 이렇게나! 비슷한 게! 많을 수가! 하지만 몹시 즐거운 만큼 몹시 피곤했다.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다시 볼 이유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




4시에 만나 일곱 시 반 정도에 헤어졌다. 저녁은 안 먹었다. 애초에 외식은 사회적 이벤트였다. 집에 먹을 건 많았고 같이 식당을 찾아 들어가기는 귀찮았다. 신기했다. 이렇게 많은 걸 공유하는데 이어지지 않는다니. 당시 K에게 아무 이성관계가 없었어도 사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너 배 안 고파? 했으나 그 정도로 고프지는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여자애였으면 같이 먹었겠지만, 아니잖아?

이런 류의 인간관계가 편한 이유기도 했다.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식으로 흘러갈 거라면 더더욱 내 맘대로 행동해도 상관없는 거였고, 그게 아니라면, 어차피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여전히 최애가 이기광이며 최근에는 뉴이스트를 찾아낸 나를 보고 조금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야, 표정관리 해. 어? 아. 그래그래. 그리고 잔뜩 웃고. 진짜 웃는 거긴 했다. 서로가 웃기잖아. 남들은 신경도 안 쓸 것들에 열을 올리고 그 때문에 생업을 사는 둘. 넌 대전 갈 생각 없어? 하니까 그는 단칼에 없다고 했다. 여기 다 있잖아. 그래. 나도 그 말을 이해하기는 했다. 하지만 백 프로는 아닌걸.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이러고 사나 늘 생각했으니까.



나한테 뭘 입고 갈 거냐길래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넌 뭐 입게? 했더니 역시나 놀랍지도 않게 여러 개를 생각해 봤는데, 하면서 휴대폰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노엘이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나온 디젤 자켓은 아직도 못 찾은 모양이었다. 그 옷을 수소문하는 과정을 그 때도 들었는데 달라진 게 없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지금도 그랬다.

어디에서 입고 나온 후드, 니트, 선글라스. 넵워스 공연의 어떤 파카, 이너로 입은 셔츠.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게 이 때 많이 입었던 브랜드거든? 이 연도에 나왔던 사진들 구글링해서 같은 옷 입은 사람한테 디엠했지. 이대로 입고 갈까? 그래. 덥지도 않고 괜찮겠다.


그는 굿즈 따위를 입지 않았다. 그 해의 리암이나 노엘이 입은 그 차림새를 그대로 구현해서 갈 생각이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와중에 펜필드 아노락은 안 입겠다고 했다. 올해 그 브랜드에서는 당시의 녹색과 빨강색 상의를 다시 출시했기 때문이다. 맨시티 유니폼랑 굿즈 저지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입고 올 것 같다고 했다. 어차피 그 경기장에는 몇만 명이 올 텐데 같은 차림새를 한 사람이 없기가 더 힘든 거 아닐까 생각하긴 했다.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 진짜 좀 상처받을 것 같아서 말하지는 않았다.






근데 주변에 오아시스 공연 가는 사람 많더라? 많아, 넌? 아. 많지. 나 거기서 초등학교 동창들 정모도 가능. 아. 아니, 다 어디 있다 나오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노래 들어보라고 할 땐 다 안 듣더니. 알지알지, 그런 기분. 내가 좋아하는 걸 말하려면 그보다 더 긴 설명을 곁들여야 해서 그냥 말을 삼켜야 했던 날들. 그리고 드는 이상한 배신감. 시간 너무 빨라, 그니까. 어떡해? 너 이거 끝나면 뭐 있어? 없지. 난 있는데. 다 이렇게 사는 걸까?


응, 다 그래. 덕질 안 하는 사람들도? 비슷해. 내 친구 엘지 다니거든? 일이 진짜 힘들대. 엄청 피폐하게 지내는데 일 년동안 이거만 보고 살던데. 내한 끝나면 뭔 희망으로 사냐고 했어. 아, 그런 초초대기업을 다녀도 그래? 당연하지. 다 주는 만큼 시키더라. 언제까지 이러고 살지? 몰라. 나도 알고 싶다. 근데 이거라도 없으면 안 돼. 그니까. 그게 진짜 웃겨. 그 사람들이 나한테 돈을 주냐 밥을 주냐. 돈은 내가 쓰고 시간도 내가 쓰는데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되는 걸. 어이없어.




하지만 나는 그 어이없는 부분에서 그와 짙게 공감했다. 근데 그게 내 정신줄이야. 아니야? 맞지. 너 그 날 빡종하고 싶었다며. 응. 나오고 싶었어, 그냥. 연휴가 애매하게 끝난 금요일. 그는 밀려드는 환자와 말도 안 되게 꼬이는 일들과 여느 때처럼, 지긋지긋하게 똑같은 사건들을 언급했다.

빡종이 뭔데. 빡쳐서 종료. 게임에서 그냥 나와버리는 거. 아하. 그러니까 카트 버리고 집으로 튀는 그런 거군. 빡종하면 어디로 가는데? 집에 가겠지. 너 집 기숙사잖아. 대전 본가? 안 간다매. 그러니까.. 버티는 거지. 그는 욕을 안 썼다. 아마 중간중간에 몇 번은 시발, 이 섞였어도 안 이상한, 인물사건배경 모두가 달라도 깊이깊이 공감할 수 있는 근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리고 별안간, 아니. 사실 내내 했던 생각. 야, 큰일 났어. 우리 스물아홉 살이야. 이어 둘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쳐다본 바깥. 정자역의 고연봉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길거리. 넌 계속 기숙사 살 거? 응. 5년까지 되거든. 자취하고 싶다매. 아, 돈 너무 들어. 그럼 공연이 몇 갠데. 그건 그래. 몰라, 야. 걍 안 때려치우고 잘 다니잖아? 그럼 된 거야. 결혼은 안 하니? 아직..? 여자친구가 00이니까. 아, 그러네. 스물여섯에 새댁 되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다.

걔는 안 힘들대? 힘들대. 퇴사면담도 하고 그랬어. 나 때문에 다닌다더라. 너? 본가가 대구거든. 나 아니면 관뒀을 거라고. 대단하네, 그래도. 버티는 게, 긴데.


나도 아직 애긴데, 그니까. 나도 그래. 작년이랑 똑같다고. 작년이 뭐야, 난 고등학생 때가 더 성숙했다. 이제 오아시스 가고 나면 뭐 있어? 블러가 재결합하지 않는 한 없지. 안 할 것 같지 않냐? 안할 것 같아. 고릴라즈 다시 활동 시작해서. 흠. 어카냐. 그러게.


어카긴, 여자친구랑 해필리 에버 애프터 하면 되지. 라고는 안 했다. 어떻게 그래. 개같은 업무로딩에 앞뒤없이 태워대는 인간들 그득한 곳에서 서바이벌 중인 그녀와 어떻게 머가리 꽃밭인 것처럼 행복만 하라고 하냐고. 팍팍한 인생. 연애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엔딩을 선물해줄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안 귀찮냐? 덕질에 연애까지 하는 거. 난 좋아. 그래. 신기했다. 어떻게 그러지. 그래서 그냥 1주년 축하한다, 했다. 못된 것들, 잘좀 해줄 것이지.




내가 K와의 연을 이어 놓는 이유였다. 주변 20대들은 어떻게 사는지 구경할 수 있었거든. 같은 병원 옆 병동에서 근무한다는 그의 여자친구. 당연히 일면식도 없는 그의 동기며 친구들. 걔는 어디 병원에서 일해. 2차?로컬인가? 근데 크더라. 삼백오십인가 받는대. 엥?그렇게나 많이 받는다고? 미친. 왜? 야, 다 굴려서 그만큼 받는 거야. 어디더라, 거기는 나이트인데 여섯 시까지 출근해 달라고 했대. 뭐? 미친 거 아니냐? 인력이 없으니까.. 뭔 개소리야. 아니, 씨. 사람을 더 뽑으면 되잖아. 그건 그래. 나쁜 새끼들, 진짜.


그러고 돌고돌아 또 굿즈며 티셔츠며 신발 이야기였다가 그 어디메쯤의 주제. 주변에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은 없어? 아니, 그러니까. 야구도 공연도 아이돌도 없는 상태로 그냥 직장 멀쩡히 다니는 친구는? 음. 모르겠는데? 궁금해서. 그런 거 없이도 어떻게 일 다니고 하는지. 부럽지 않냐? 그런 거 없어도 잘 사는 사람들. 그치. 모티브 없는데도 안 그만두고 잘 다니는 사람들. 그게 갓생러인가? 그럴지도?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왜? 그냥.






그의 여자친구는 이브닝 중. 헤어지기 전 그는 약국에 들러 그녀에게 줄 탁센을 두 상자 샀고 나는 자라에서 그전날 친구와 샀던 상의의 베이지색을 샀다. 오프가 하루 더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없었을지도 모르는 만남. 두고두고 신기한 일이었다. 요건만 보면 그는 나보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고 같고도 달랐다. 공감대도 많았고 결정적인 부분에서 성격이 달랐다. 이러면 사실 짱친이나 뭐 그런 거 가능 아닌가.


하지만 이상하게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면 나는 굉장히 피곤해졌다. 좀 도망쳐야 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잘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보게 되는 느낌. 그 친구에게는 조금 미안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으나 아무튼 그랬다. 자기계발은 없고 취미에는 열을 올리는 교대근무자의 자아상 같아서 그랬나. 나이기도 하고 그이기도 한 그런 모습 때문에.


그의 여자친구와 내 주변 동료들? 알아서 잘 살겠지. 걔들은 다 갓반인이란 말이야. 무대영상 보면서 혼자 방구석에서 꺅꺅거리거나 인스타에서 낯선 네덜란드 배우에게 그 옷 혹시 아직 가지고 있으면 자기한테 팔 생각 없냐는 연락을 취하는 일 따위 없는.




공연이 끝나면, 오아시스도 손동운 전우치도 끝나고 나면? 잘 살겠지. 날이 추워질 거고 눈이 와서 길이 얼면 그 날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날들이 올 것이다. K는 어제 한 할아버지가 누운 채로 토한 걸 언급했다. 호주 간호사와 그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하는 이유와 실질적인 현지 근무환경 등등에 대해 돌고 돌다 나온 이야기. 사실 대화 내내 머릿속으로는 반쯤 딴 생각을 했던 나는 그쯤에서 연휴에 봤던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죽음을 기억하는 거. 별거냐? 그렇게 늙고 약해지고 추해지는 날이 온다는 걸 기억하는 거야.


말끔한 백골이 되어 아름답게 추모받는 걸 상상하는 게 아니라고. 인생은 언제나 그런 거잖아. 멀쩡히 살다가도 갑자기 또는 서서히 그렇게 오그라들고 망가지는 것. 그들은 절대 객체가 아니며 미래의 내 모습일 수 있다는 것. 기억해야 한다고. 그걸 떠올리면 요점만 남았다. 어떻게 다 가져가.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 취사선택해야 해, 언제나. 할 거면 하고 안 할 거면 하지 말고. 후회는 가능한 적게 하고.


하지만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너무 현학적인 인간이 되는 것 같으니까. 그는 별 것 아닌 불행들을 깊게 받아들였고 쉽게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신기했다. 어떡하긴, 잘 살겠지. 오아시스 같은 건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어렸을 때와 인생의 어느 시점에도 잘만 살았던 것처럼. 덕질? 내 인생이 있고 덕질이 있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뭔데? 글쎄.





K를 만나면 편한데 불안했다. 그래서 자주는 보거나 연락할 수 없었다. 이건 뭐 멜랑꼴리인지 패션우울인지 알 수 없는 그 기류. 그의 여자친구에게는 또 다른 사람일지 몰랐으나 덕질과 락음악과 간호직과 같은 나이로 이어진 나에게는 그랬다. 영국에서 닥터마틴을 신고 혼자 요거트를 먹으며 간호사로 출퇴근할 줄 알았던 2025년의 가을. 환상은 어느새 사라졌다. 꽁으로 버는 돈은 없었고 쉬운 건 더더욱 없었다.


출근할 땐 반송 불요, 라 적힌 우편물을 한 번 쓱 읽는다. 미제, 사건은 미제가 되었고 그 오피셜 우편물은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당장 딛고 선 지층, 그 지층을 이루는데 크고 작게 기여했을 일의 마침표를 찍는 서식. 러브레터도 공연티켓도 꿈의 조각도 아닐 그 등기. 그걸 죽을 때까지 지니고 살 것 같다. 포토카드도 포스터도 태블릿도 아닌 그걸.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존재가 궁금해지긴 하겠지. 잘 지내나, 하고. 동류인듯 동류 아닌듯 동류인 그의 근황. 흥미로운 일들이 있는 인생이다. 돌아보면 알록달록했고 즐거웠다는 걸 알게 되겠지. 비가 지겹게도 많이 온다. 망설인다는 건 아직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극한으로 닿게 되면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하철 출구에 딱 섰을 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는 걸 보면 단번에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처럼. 아, 오늘은 달리기 못 한다, 하듯. 아니라면?

할 수 있단 뜻이다. 나중에 후회한다는 뜻이다. 그게 뭐든 간에. 그래서 절망은 늘 이르다. 생각하고 계산하고 있다면 아직은 시간과 여유가 있다는 미니까. 충분히.


그래서 난 맨날 즐거울거야. 사력을 다해서. 지겨워도 맘에 안 들어도 괜찮다. 잘 살아 있을니까. 우울할 시간 같은 거 없다고. 내가 좀 한심하게 여겨지면 어때? 안 할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시간낭비 안 할 거야. 할거면 재밌게 잘 할래. 여태 그렇게 살았어, 잘만.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 부족하고 아쉬운 걸 찾았어? 그럼 채우고 보강하면 돼. 그대로 즐기거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쨌든 알아서 그렇게 지내기도 하겠지만. 그는 내가 사실은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내 부분을 증폭해 가진 채 우는 소리를 내내 하면서도 잘만 살아 있는 특이종이었으니까.

뭐든 늘 나아지고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같은 나와 달리 그는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고도 어찌어찌 잘 지냈으므로. 리암 갤러거의 탬버린? 못 받을 것이다.


콜드플레이와 뮤즈의 기타 피크도 셋리스트도 드럼스틱도 못 받은 것처럼. 그래도 아무튼 행운을 비는 거지.

지척의 또 다른 나 같은, 가여운데 안 가여운 모습이니까.

말하자면.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