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피도티니핑철분스틱
0.
에서는 좀 끔찍한 맛이 난다. 다이소. 귀엽고 예뻐서 샀다. 진짜 철분이 들어 있나 봐. 분명 패션후르츠 맛이랬는데. 멀미약 맛이고 피 씹는 맛이다.
1.
애들은 소아과에 와서 아르기닌을 주입한 후 호르몬 수치의 추이를 보는 검사를 한다. 그 때 쓰는 약의 성분이 아르기닌이다. 아르기닌 젤리도 있다. 아르기닌 1000mg. 나도 아르기닌 먹으면 좀 키가 크나? 물론 안 크겠지. 말이 그렇다는 거야. 이 젤리는 초록색이다. 초록색? 내 최애 그분의 상징색이잖아. 공통점이 있다. 초록색. 그리고 키가 안 크다는 것. 이 젤리가 안 크다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2.
행복은 없다. 나는 닥터마틴을 스무 켤레 가까이 가지고 있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다. 행복 수준을 넘어.. 뭐랄까. 더 바랄 게 없게 될 줄 알았다. 내 삶에 닥치는 게 무엇이든 간에. 근데 그렇지는 않네. 없었다면 불행했겠지. 아, 이 바지에는, 이 조합에는 그건데. 하면서 못 가진 걸 슬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을 것처럼 기쁘지는 않다. 근데 그게 내 행복인가봐. 그냥 안정감.
3.
퇴사하고 싶다. 어디로? 그럼 병원을 떠나야 한다. 나는 더 이직할 곳이 없어. 교대근무가 힘들다. 인퓨전 펌프 알람 소리가 싫다. 보호자들도 싫고 애들 우는 소리도 싫다. 그냥 아픈 사람을 그만 좀 보고 싶다. 괴로울 만큼 싫다. 어차피 다다음달이면 어쨌든 떠나게 되어 있다. 근무가.. 20개 남았다. 거긴 이제 정말 할아버지 할머니들밖에 없다. 주사 붕대에 응가 묻었어요 바꿔 주세요 토 묻었어요 어쩌고 하는 보호자들 말고, 약. 언제! 드셨어요! 이거! 핑크색! 아침에! 드시는! 거!! 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언젠가 이직을 한다면, 끼니를 챙길 때 나를 안 찾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밥이 아니라도, 딱 5분이라도 나를 아무도 안 찾는 곳. 그리고 안 시끄러운 곳. 콜벨 소리에 종처럼 뛰쳐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는 곳 말고. 그런데 없겠지. 그런 병원은 없어. 원래 병원은 환자들이 모인 곳이잖아. 안돼. 병원은 여기가 마지막이야. 여긴 내 최선의 선택지였다고.
4.
애랑 눈을 맞추고 웃는 실습생을 보고서는 여기가 놀이터냐는 말을 하고 싶었다. 와보니 어떠냐는 말에 애들이 귀여워요 하고 웃던 말에 빡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나도 꼰대 다 됐다. 역시 본인이 하지 않고서는 모른다. 근데, 그럼 걔들이 와서 뭘 해야 하니. 나 얌전히 따라다니는 거 말고.
5.
코스모스가 많이 피었다. 비바람에도 안 떨어졌다. 한 철, 아니. 길면 한 달이나 피어있을 것들인데 참 예쁘게도 피었다. 덧없다는 건 그런 말이구나. 아니다. 내가 뭔데 덧없대. 걔들은 그냥 그게 잘 사는 거야.
6.
내일 눈을 좀 안 뜨고 싶기도 하고. 피곤하다.
7.
그냥 다 때려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 어떻게? 뭘? 아니, 깊은 생각 금지니까.. 아니야. 싫어. 나는 그런 빈곤한 출발은 싫어.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 힘들고 괴롭게 일했다. 한 화만 뭔가를 써놓으면 이제껏 시작했던 모든 연재 아닌 연재가 끝난다. 다시 다 읽었는데 죄다 다방면에 대해 징징대거나 지나치게 집중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런데 또 다시 보니 당시에 어땠는지가 보였다. 그렇게 짜내려던 것도, 내가 이렇다는 걸 광고하려던 것도 아닌데 아무튼 쉽지 않았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웃기기도 했고 뭐 그랬다. 그냥 써놓고 공개해서 아예 잊으려고 했던 것들인데.
8.
왜 실습생이던 나한테 그 간호사들이 빨리 자퇴하라고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정말 반농담인 말이었다. 실습생들 눈에도 안 보이는 내 고난이 남들에게 보일 리가. 들이는 인풋에 비해 나오는 건 너무 마이너스다. 왜 그렇게나 일을 해 놓고도 인계 때가 되면 나는 반쪽짜리 사람인 것 같은지, 몇 년을 해도해도 일이 돌아가는 양상은 늘 뭐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지.. 는 내가 궁금할 문제가 아니다.
신규는 다섯 시 반에도 집에 못 가고 울었다. 왜 울지. 어차피 니가 뭔 짓을 해도 병원은 널 자르지 않으니 울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진짜 쓸데없는 눈물인데. 그럼 좀 잘 하던가.
그런데 신규는 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맨날 늦게 가고 울고불고 난린데 들어온 지 반 년도 안 된 애가 그러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수선생은 걔를 위로할 게 아니라 인력을 더 넣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죽어도 안 하는 것 같다.
화장실 한 번 못 가고 바쁘게 일하는데 히히덕대고 있는 꼴에 이제는 피가 식는 기분이다. 여길 떠나서 다행이다 싶고. 뭐 어딘들 크게 다를까 싶지만. 예전에는 한없이 장점으로 보였다. 뭔 짓을 해도 안 잘리는 것. 이제사 달리 보인다. 왜 그래도 안 잘릴까. 어메이징하다.
9.
노비. 진짜 헛말이 아니었다. 난 진짜 하인처럼 일하거든.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근데 그냥 직장인이라고 그 말 함부로 쓰면 안 되겠는걸. 난 진짜 남의 종처럼 일한단 말이야. 그게 간호라서. 말 좋다. 남 수발에 요구 들어주는 건데.
밥 챙겨먹고 멀쩡히 커피 때리면서 노비라니, 듣는 노비 기분 나쁘니 좀더 고상한 단어를 써주면 좋겠다. 나만 노예 하고 싶거든. 열두 시부터 열두 시 사십 분까지 폴바셋에 미친 듯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얼탱이가 없었다. 이러고 돈 벌면서 힘들다고 하는구나. 이건 뭐 빼앗긴 노비도 아니고. 신규도 아니고, 지금에 와서도 이런 걸 느끼는 게 참. 그래도 생각 금지니까 여기까지만 한다. 그렇게 느껴지는 걸 어떡하라고.
10.
써놨던 걸 보니 죄다 부끄러웠고 좀 쪽팔렸다. 대체 왜 브런치를 글쓰기 연습 그라운드같은 걸로 삼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걸 쓰고 싶었던 거야? 정말 알 수 없다. 선후관계가 뒤바뀌었다. 쓰기 위해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냥 시작해서 쓴다. 딱히 의미는 없다. 정말 일기나 다름없다. 나중의 나는 이 시점의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똑같이 쪽팔리겠지.
11.
내일은 또 어떤 보호자들이 나한테 의사한테는 못 하는 말을 해서 귀찮게 하고 별 중요하지도 않은 걸 중요한 것처럼 요구하고 앉아 있기만 하면 일거리를 던져 줄까. 또 어떤 의사들한테 이런저런 오더를 달라고 하고 그러느라 못 하거나 밀린 일에 대해서 쿠사리를 먹어야 할까. 개같다. 어떻게 몇 년을 해도 이 일의 뭣같음은 익숙해지지를 않을까. 이 일 자체가 병원 최하급 시종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몰랐던 내 업보라는 우스갯소리도 안 나온다.
12.
엄마아빠가 좀 보고 싶어서 집에 갈까 또 생각했는데 정말 못 가겠다. 이유는 또 똑같다. 오피스텔 복도를 걸어오는데 생각났다. 집에 가서도 이렇게 웃을 수가 없다고. 그러기 싫다.
13.
깊생 금지의 주간이다. 인생은 원래 이렇다. 글 읽어보니까 그렇던데. 이랬다가 가끔 좋았다가 대부분 이랬다가. 언제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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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또 얼마나 바쁠까. 죽고 싶은 것까진 아닌데 그냥 눈을 좀 안 뜨고 싶다. 깊은 생각을 안 해서 이 정도다. 그 정도는 바랄 수 있지.
15.
정말 그만둬야 하나. 어떻게 그만두지. 그런데 나 지금까지 일했어. 이것보다 더 힘든 데서도 일했어. 그러니까 그만두면 나는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안 돼. 난 더한 데서도 버텼어.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오바해서 그렇다.
16.
갑자기 사춘기처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다 몰랐던 것처럼, 처음인 것처럼. 힘들다. 지나가겠지. 감기처럼. 그럴 것이다. 아마 나는 내일도 멀쩡히 출근해 똑같이 일할 거니까.
17.
아무것에서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난 서른까지 여기 다닐 거야. 절대 안 그만둘 거야. 갈 데도 없다. 이러다가 지나갈 거야. 지금 도망치면 다른 데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도망치게 될 것이다. 안 돼. 이것보다 더 뭐가 없던 신규 때도 그냥 다녔다. 그 때도 그러고 살았어. 그러니까 나한테, 그런 일은 없다.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없다. 언제는 뭐가 달랐던 것처럼 유별나게 굴 필요가 없어.
18.
내일 아침에 출근해서는, 철분 젤리를 먹을지 면역력 젤리를 먹을지 아르기닌 젤리를 먹을지 정할 거야.
19.
그리고 나중에는 이딴 데 돈은 왜 또 쓰고 이런 쪽팔린 얘길 이런 데에 왜 주절주절 썼을까 생각하면서 다른 일로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20.
그래서 깊은 생각 금지.
한국에서, 병원은 여기가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