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현실감
그런 거 있잖아. 한칸, 이렇게 띄우는 거. 사회적 합의, 인정?
-그쵸, 저 갈까요? 옆으로.
아. 됐고, 들은 바로는 불신이 파다하다던데?
-병동요? 신규쌤들이 하도 많아서..
벤톨린 qid로 줘야 하는 거 bid로 이틀 내내 주고, 그러고 세이퍼도 안 쓰고. 노답이야.
-아핳. 그거요.
나 어제 다 들었거등. 너도 빨리 탈출해. 다음 타자 너 아냐? 더 빨리 가는 게 나았을 것 같긴 한데, 지금이 적기다, 야.
-.. 아. 혜린이가 자기 먼저 보내달라고 카톡한 것 같던데.
넌 면대면으로 가서 말해. 카톡 말고, 주말이니까.
-수쌤 집 찾아가요? 아침부터?
월요일에, 오 분만 말하면 되잖아.
뭔 놈의 러닝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여덟 시 반 스타벅스. 다들 부지런도 하다. 까만 빨래 다 모아서 하려고 했는데 날이 꿉꿉하다. 달리기 후 땀을 다 뺀 늘씬한 사람들.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지나가는 사람들. 다 갓생이야? 오프가 짧다. 나는 고릴라 그림책 전시회나 가려고 했는데. 근데 졸리다. 안 졸린가? 내일은 친구 만나야 하는데.
여섯 시. 일이 대충 마무리되어 가는 아침. 동기는 졸음이 이목구비 하나하나에 늘어진 맨얼굴을 감쌌다. 집, 가고, 싶어. 갈거잖아. 못,가아. 왜못가. 못가아, 가고싶어. 여기서 있다가 가야 돼. 아. 이사? 일찍 하네. 빨리 불러써. 그래. 야 그럼 오늘 오전 중에 다 끝나겠다.
그녀는 이제 그 동네로 이사를 간다. 병원이 있는 동네. 야, 거기랑 정자만 아니면 돼, 라고 했다. 내일 만나는 친구는. 그전까진 그냥 병원 동네만 아니면 됐는데 이사한 후로 하나가 더 추가된 거지. 야, 우리병동 신규들 다 여기 사나 봐. 아하하. 퇴근길 버스에서 마주친 프리셉터는 내 카드를 보더니 웃었다. 넌 이사 안 가? 재계약 했어?
네. 저는 거기 좋아요. 니 카드 금액 봤어. 그래요. 4만 7천 얼마였나. 지척에 사는 프리셉터의 카드에는 9700원이 찍혔다. 난 누군가 했어, 자리가 저렇게나 많은데 옆에 붙어 앉길래. 머리 때문에 못 알아봤잖아. 아. 그래요? 그렇게 밝나? 색도 그렇고, 너 나랑 있을 땐 묶고 다녔으니까. 아하.
동기는 지하에서 자다 간다고 했다. 여자휴게실 안에는 병원 전산을 볼 수 있는 컴퓨터 몇 대와 리클라이너가 있다. 수면실 비슷한 거지. 신규 때는 노는 날에도 안 노는 날에도 거기로 출근하고 거기서 퇴근했다. 음. 거기서 사는 건 어떨까. 그러게, 그냥 의지의 문제였다.
야, 나도 거기서 살까 걍? 뭘 살아. 아. 직원식당에서 밥 먹고? 거기서 산다고? 아니다, 걍 프로틴 파우더에 아몬드 브리즈 사서 꿍쳐놓고 지내는 거지. 옷은 그냥 여기 올라와서 유니폼 데일리로 갈아입고. 그럼 한 달에 삼백 넘게 저축할 수 있겠다. 진짜네. 교통비도 안 들고 식비도 안 들고. 뭐 누가 의심이나 하겠어? 그냥 병원 직원이려니 하겠지. 물론 직원이 맞긴 하다. 그럼 그렇게 살면 6개월이면 끝나는 게임이야? 2천만의 손실 메우기? 멋지군. 그렇게도 할 수 있는 거였어. 이렇게 징징거릴 게 아니라.
넌 계속 할 거야? 선생님은요. 몰라, 하기 싫어. 근데, 나 거기서도 여기서도 한 명씩 키웠거든? 왜케 뚝딱대는 애들만 걸리는지 모르겠어. 걔도 그래. 너도 그랬잖아. 나도 그랬니? 이게 반면교사라니까?
그녀는 입사한 지 3년 반을 조금 넘게 채운 후 중환자실로 자원해 로테이션을 갔다. 나를 키워 놓고. 무섭게 딱딱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섭지는 않았다. 무서워야 할 사람인데 딱히 안 무서웠다. 나도 이 사람 같은가? 그래서 그랬나.
모르겠는데요. 하고 싶은 건 있어? 있죠,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자기계발 하기 싫단 거네? 네, 네?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진짜, 네. 맞아요. 너 왜케 웃어? 웃기잖아요. 선생님.
세상 사람 열에 아홉은 그렇게 말 안 해요. 뭐? 다들. 아, 힘들지, 힘들지만 괜찮아 누구누구야 이렇게만 말해요. 아하하하하. 야, 그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 못 써. 나는 그 말이 속시원했다. 듣기 좋은 말 못 쓴다는 그거 말고. 하기 싫은 거지? 맞아요. 하기 싫지.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게 어딨어. 나보고 뭐 달을 따 오라는 것도 아닌데. 맞잖아?
그녀는 살이 좀 쪘다. 기억이 나서 대비됐다. 3년 전, 나를 가르칠 때 그녀가 환자리스트에 동그라미를 네 개 그려놓고 텀블러에 물을 네 번 채워 마신 것. 그리고 아마 작년 가을쯤의 모습이. 사실 지난 주에 그녀 비슷한 사람을 퇴근길에 본 것 같았다. 긴가민가했는데 맞았군.
나 다이어트하거든, 물 2리터씩 마셔야 돼. 양해 좀 해 줘, 그렇다고 널 소홀히 가르치겠다는 건 아니고. 사십키로대 찍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달성했다. 병동 체중계 위에 올라서서 작게 환호했었다. 이후 보이 샤넬에 청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서 스테이블했던 휴일 근무 후 룰루랄라 퇴근했었다. 멋져 보였다. 그리고서는 현대백화점 무슨 중국집에서 밥을 먹었을 때는 까르띠에 시계 얘기를 했다.
.. 쌤 부자예요? 야, 보너스 받은 거 모아서 사는 거지. 그런 거 사라고 개같이 버는 거 아냐? 아, 네. 와근데 저거 하나가 그럼 경차 한 대인데. 자동차를 손에 갖고 다니는 거네. 뭐래애. 진짜, 너도 좀 써. 글쎄. 시계만 명품이면 뭐하나 생각했다, 그 때의, 몇 년 전의 나는. 그러니까 프셉 말고 나.
몹시 다행히도 명품에 눈을 뜨지 못한 나는 종종 그 날을 떠올렸다. 나도 샤넬백이랑 까르띠에 워치나 샀다고 생각해야 하나. 세상에나, 그걸 두 개 합한 게 이천인가. 내가 그 백화점을 갔을 때는 몇 번이고 다, 디즈니스토어와 위글위글에 키링을 사러 갔을 때뿐이었는데. 닥터마틴이나.
살만해서 그래. 너 살만하지? 네? 나 대학원 준비하거든. 알잖아, 퇴근하면 디지게 힘든 거. 자고 싶고 집중 안 되고 놀고 싶은데,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또 하게 되더라. 다 살만해서야. 닥치면 하게 돼 있어. 나 텝스 지금 다섯 번 여섯 번짼데.. 11월인가 12월이 접수거든. 그런데 대학원은 왜요? 뭐, 당연히 뭐로든의 업그레이드가 목표겠지만, 굳이 왜.
이제 CN 하려면 무조건 대학원 나와야 한다는 말이 있어. 올해 초에 나온 거라 바로 적용은 안 될 건데, 어쨌든 상향평준화 될 거 아냐? 여기서 오래 버티려면 해야 한단 거야.
너 남친은 생겼어? 아니요. 야, 표정 왜 그래? 아웃겨, 야. 좀 없을 수도 있지. 갑자기 우울한 표정 지어, 왜. 아니, 그거라기보단..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잖아요. 뭐? 뭘? 남자친구요. 아뭐래. 너 덕질하잖아. 네? 너 오아시스 좋아하고 콜플 공연 가고 그러지 않았어? 그거면 됐지. 또 뭐 좋아하지 않았나? 됐어, 그럼.
그리고 프리셉터는 길을 건너갔다. 빠이빠이.
오래 버티기라. 대학원. 간호로 대학원. 이건 내가 비웃을 만한 학문이 아니었지만.. 간호학 대학원이 가고 싶은가?아니. 별로. 버티기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이제는 정말 꽤나 있긴 했나. 대학원이라. 그녀는 또 한 번 멋있었다. 가차없기도 했고 그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잘 누렸다.
남자친구는 선생님이 왜 좋대요? 나? 내 남친? 아. 내가 씩씩해서 좋대. 아하. 그러니까 너도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 있을 거야. 제가 뭐요. 너도 약간 나 타입 아니냐? 우린 달라. 티피컬한 노선으로 가면 안 돼, 먼말인지 알즤. 암튼 걱정하지마, 생겨. 아니면 니가 만들던가. 작년에 만났을 때 그녀와 했던 대화였다. 와, 그것도 조금 있으면 1년이 다 되네.
언제나 좀 몸짱이 되고 싶었다. 유일하게 받았던 칭찬 아닌 칭찬을 좀 보존하고 싶어서 그랬나. 예쁘단 말은 안 들었어도 먹는 거에 비해 말랐단 말은 엄청 들었다. 다 옛날 옛적 이야기지만. 그 말을 듣던 어린 나는 아, 나는 얼굴은 그냥 그렇고 몸은 그렇구나 하고 판단과 결론이 혼합된 뭔가를 내렸다. 그래서 늘 타고난 거보다 더더 살을 빼고 싶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튼튼하기까지 한 몸이 가지고 싶었다.
얼굴은 뭐, 성형외과 가야지. 그런데 연예인 할 것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나 해야하나 생각했다. 하나 고칠까? 상담 받아? 근데, 모든 이목구비의 기반은 군살 정리와 제거된 붓기인데. 아무튼 내가 바란 건 그런 거였다. 몸짱이라.
대학원? 다이어트를 그렇게나 바라고, 나를 볼 때마다 넌 잘 좀 먹고 다녀, 맨날 병가야. 하던 그녀는 이제 커리어를 위해 다른 길을 열심히 걸었다. 그러게, 나 올해 5월쯤인가 빼곤 안 아팠다. 작년까지는 툭하면 항생제를 먹고 넣고 동네병원을 들락거렸다. 이게, 달리기의 힘일까? 그랬음 좋겠다. 내가 해온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것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친구와는 야, 우리 내년에 몇 살이게, 하는 카톡을 했다. 스물아홉? 스물아홉. 스물아홉을 앞둔 이 때에도 그런 거나 바라고 있다니. 내 프리셉터의 mbti는 ESTJ였다. 나와 비슷하고 달랐다. mbti의 좋은 점 하나가 있었다. 내가 남보다 못난 점을 어떤 지표의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다는 것.
내가 본 S들은 나보다 생산적인 삶들을 살았다. 나는 그게 늘 부럽긴 했다. 부럽긴 한게 아니라 부러웠다. 별게 다. 나보다 몇 달 늦게 들어와 그렇게나 로테이션을 부르짖던 동기는 기어이 수선생에게 카톡을 했다. 자길 보내달라고. 나는 로테이션이 그렇게나 간절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게 기분이 나빴다. 가끔 그녀에게는 그런 의외의 구석이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상도 없음? 아니면, 그냥 자기 갈 길에 적극적인 건가?
할 일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개같이 많다. 누가 연애도 직장 근처에 사는 것도 다 나 대신 해 주면 좋겠다. 이런 걸로까지 내가 열패감을 안 느끼게. 난 병원 근처 싫어. 싫단 말이야. 다 싫어. 진짜 싫어. 내 맘이야. 그러니까 차라리 그 두 개라도 누가 대신 해 주면 좋겠어. 딱딱딱 결혼까지 가는 그런 루트, 효율적으로 살고 경제적으로 지내는 그런 방식. 이놈의 쓸모. 언제까지 인생을 따라다닐까. 개같다. 쓸모를 쫓아 들어온 병원, 여기서도 안 잡히는 실체. 쓸모, 실효, 갓생.
나도 해야지, 카톡.
그리고 월요일에 말해야지. 저 보내 주세요.
하면 되지. 해보면 되지. mbti? 잣까라 그래. 나도 한다.
오늘 하려고 했던 거 다 해야지. 다 할 거야. 흥.
이래서 드라마에 그렇게나 계약결혼 소재가 쓰이나. 그럼 인생 태스크 하나는 그냥 끝나잖아. 대외적으로.
나도 내년엔 그냥 명품이나 하나 살까. 그게 뭐라고. 근데 사면 뭐 해. 모시고 다녀?
짜증나. 언제까지 이렇게 샛길로 새면서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