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

2017. 12.

by 이븐도





나쁘게 말해 좁아터졌고 좋게 말하면 아늑하고 귀여운 계단을 올라가니 보이는 네 개 정도의 테이블. 정말 개쫍네, 생각했다. 그건 기억난다. 거기 그가 앉아 있었다.


남색 코트 같은 걸 입은 까무잡잡한 남자. 그리고 앞에 놓인 브라우니와 커피잔. 내 건가? 시킨 적 없는데. 아. 내가 아직 카톡을 안 봤구나. 음.






쟤야?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웃지도 않았다. 역시 독특한 놈인가. 어쨌든 현실의 인간이라는 걸 알았으니 충분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머지 둘만 알아서 잘 한다면 이 모임이 와해될 일은 없군. 그냥 이대로 돌아서서 집으로 가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묻지도 않은 걸 미리 시켜놓은 게 참.. 웃겼다. 언니에게서 정보를 좀 얻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는데 의외로 언니는 단톡에 별 말을 안 했다. 이상하지. 안 이상해서 이상했다. 별 게 없었다면 오히려 신나서 떠들었을 텐데.





결국 그는 정체를 드러냈다. 문과대 사정도, 이과대 사정도, 약학대 사정도 다 알았던 건 그가 복수전공자였기 때문이었고, 정말로 나이가 있긴 했기 때문에.

대학교, 콧구멍만한 대학교 짬 5년이면 당연히 나같은 신입보다야 아는 게 많아 보일 수밖에 없지. 드러냈다기보단 그녀의 닦달에 지쳐 더는 내빼지 못한 거였다. 그는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학번 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그건 치밥의 성격이었다. 굳이 말하면, 좀 찐따 같은.






그가 정체를 드러내기로 한 날. 그가 단톡에서 실컷 떠들어댔던 치밥으로서의 모든 떡밥을 딛고 현실의 이름 세 글자로 뚜벅뚜벅 등장할 날. 우리는 삼자대면이 아니라 한 명씩 그를 각각 보기로 했다. 피곤한 인간들. 그냥 셋이 보면 될 걸 그는 언니를 따로 보고 나를 따로 봤다.


기억하기로는 뭔 사정이 있었다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사정은 뭔 사정. 늘 바쁜 척했던 사람이었다. 바쁘긴, 그래봐야 고학번 대학생인데. 마음이 바쁘셨겠지. 여하간 나는 그와 일대일로 보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필요했는데, 언니는 일대일로 보는 게 싫지 않았는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어떡해, 나한테 선택권이 어딨어.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셋밖에 없는 기둥. 하나라도 흔들리면 다 무너지는 거잖아. 만나기로 한 카페조차도 작고 쪼끄맣고 찌글찌글했다. 이건 악평이 아니다. 아무튼 그런 곳이었다. 이런 데 여기가 있어? 하는 곳. 호호커피. 석계역.




조금은, 아니 이 실체 없는 인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에 대한 절대적인 기대감이 100이라면, 그 중 15 정도는 호기심이자 미지의 영역이었다. 혹시, 내가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답이 나왔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를 앞에 두고서. 꽤 무례하지. 그러나 그런 판단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눈이 새까맸다. 언니 말마따나 '장난스러운 기운이 있는 눈빛' 인지는 알 수 없었다. 브라우니? 나중에 물어보니 그는 단 게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구우. 라고 했다. 그건 니 생각이지, 라고는 말 안 했다. 그 날 언니를 만나기 전에도 같은 걸 시켜 놓았는데 언니는 그걸 두고 '섬세하다'라고 했다. 섬세? 그게 섬세한 거야?




브라우니는 달았다.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장소를 오는 게 취향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이거나, 정말 이런 좁은 곳으로 또또 숨어들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거. 거기 프랜차이즈 카페가 없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커피는 맛있었다. 막입인 내 입에? 글쎄. 그의 취향에.


주인장 취향의 에세이, 만화책. 좁은 탁자. 조용한 음악. 카페가 아니라 다락방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공간. 그는 단톡에서도 여기서도 보려주려는 동시에 숨으려는 사람 같았다. 그 때의 내 눈에 그랬다.






그전에, 우리가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 단톡에서 가장 핫했던 주제는, 당연히 남녀 얘기였다. 그러나 연애 경험이 일천하고,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또 짝사랑한 기억밖에 없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현실의 사람에 대해 할 말이. 나는 사카구치 켄타로 사진을 보내며 너무 멋있다고 난리를 쳤고, 진짜 연애를 깨나 해본 언니는 나름 구체적인 특징들을 열거했었다. 눈빛을 보면 느껴진다고 하면서.


그래서 눈에 장난기가 녹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본인보다 하야면 안 된다고 했다. 근데 그러기는 쉽지 않지. 환자가 아니고서야. 그리고 본인보다 말라도 안 된다고 했다.


정말 모든 특성이 내가 보낸 사진 속의 그 연예인과 달랐다. 치밥은 현실을 못 보고 화면 속의 남자만 들여다보는 나를 열받게 하기 위해 본인이 사카구치 어쩌고를 닮았다는 개드립을 심심하면 날렸다. 응, 안 믿어. 진짜 안 믿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정반대로 생긴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설마 했는데..




아니. 잘생겼다고? 걔가? 정말?

왜? 그 정도면 괜찮지? 연둡. 이러니까 연애를 못 하징. 미현이도 걔 보고 아까 잘생겼다고 그랬어. 야, 봐봐. 그 정도인 애 별로 없어.

언니, 차라리 그 오빠가 나은데. 그 학회 그 사람. 아냐?

너 그 사람 좋아? 진짜? 야, 말을 하지. 소개시켜 줘?

아니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근데 진짜 잘생겼어?

잘생긴 건 아니고, 나쁘지 않다고. 야, 잘생겼다고 하면 지가 진짜 잘생긴 줄 알아.






근데.. 아닌 게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당시 언니가 사귀고 있던 남자의 외모 특성들을 해체하면, 전부 다 치밥에게도 다시 갖다 쓸 수 있었거든.

정말이었을 줄이야. 이런.


그 날 그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차피 딱히 의미도 없었다. 그냥 정말, 아. 실존인물이었군, 하나를 확인하는 데에 의의를 뒀기 때문에.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사람이길래 그렇게 특별한 척을 하는지 찾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낯선 사람과의 일대일, 그것도 상대방은 나랑 초면이 아니잖아. 그렇게 정보가 기울어져 있는데 내가 뭘 더 어떻게 해. 묻는 대로 대답하며 굳이 만나서 할 필요는 없는 대화를 잇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응, 안녕. 하고 현실의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서서 한 생각?


아니. 뭐야, 이것들. 이것들이 아닌가? 얘는 아닌 것 같은데. 언니. 정말 좋아해, 쟤를? 왜? 아니라고 하지 마. 벌써 여기다 잘 들어갔냐고 묻잖아. 이게 왜 그렇게 궁금한 거야, 응? 대체, 왜? 너무 피곤한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그러고, 그 단톡도 슬슬 숙제가 되기 시작했다.

결성 두 달 만에. 나한테는.

그래도 즐거운 과제였다. 문제집 부록의 색칠공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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