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하반기로 가서 중간고사가 끝나고 겨울이 됐다. 둘은 정말 유치했다. 나는 속으로 정말 그 말을 많이 삼켰다. 언니, 얘 여친 아니잖아. 그만 좀 해,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 그 말을. 둘은 서로 상대의 우위에 서 있는 척했지만 내 눈엔 똑같았다.
그 나물에 그 밥. 조종하려 드는 애나, 거기 또 맞대응해서 어그로를 끄는 식으로 먹이를 주는 애나. 이건 뭐 무한동력도 아니고. 언제 끝나냐고 이 게임.
언니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몇 번의 소개팅을 받았다. 언제나처럼 흥미로웠다. 직장, 학교, 학과, 출신지, 취미. 언니가 이상형이라고 했다는 사람. 입고 나갈 옷 고르기. 취준 전 마지막 머리 염색. 코토리 베이지. 새로운 알바 자리. 인턴십. 대화들은 다른 듯 비슷했다.
읽고 있는 책, 개봉작. 그리고 그 둘은 내 생일에 마샬 헤드폰을 선물했다. 같이 가서 골랐다고 했다. 나는 늘 생각했다. 이런 조합이라면, 반드시 하나는 커플이 나올 텐데 그게 누가 될까. 그러나 둘이 만나 이걸 사려고 홍대 등등의 청음샵을 돌아다닌 일화를 듣고도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생경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내 쪽은 확실히 아니겠거니 싶었다.
그런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언니가 이 사람을 아닌 척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안 읽히려 애쓰는 그가 피곤했다. 둘은 다른 결로 피곤했다. 언니는 좋고 싫고를 아이처럼 다 드러내는 타입이라 피곤했고, 치밥은 가끔 그런 걸 받아주지 않으려는 심술을 아닌 척 부렸다. 가운데서 그걸 배경처럼 읽는 나? 알아서 잘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티내지 말고.
언니가 치밥에게 진심이든 아니든 짜증을 내는 건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대는 나 자신의 잣대를 상대에게 가져다 대는 거잖아. 내게 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같이 걸어서. 나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언니는 치밥에게 기대가 많아 짜증이 늘었다. 그래서 생각한 거였다.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본인에게 맞춰 줘야 하지.
그냥 우리는 재밌게 노는 상대들 아닌가.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잖아. 하지만 소개팅을 그렇게나 해도 사실은 결론이 늘 안 났던 건 다른 게 아니고 그냥 사실 걔가 거기, 여기에 있어서 그런 거라는 게 보여서, 내가 너무 편향적으로 이 관계를 보고 있나도 생각했다. 참,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 단톡을 보면서 그런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기말고사가 얼마 안 남은 날이었다. 후문의 맘스터치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니는 피곤하다고 툴툴댔다. 이미 단톡에서도 얼마나 잠을 못 잤고 어떤 일이 어떻게 엉켰는지를 잔뜩 토로한 후였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모티콘과 질문과 리액션을 곁들여 그 피로와 짜증을 위로하려 했다.
셋뿐인 단톡. 영영 안 사라지는 노란 1을 쳐다보면서.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와서 위로든 쌍욕이든 해 주라고. 세상 욕이든 교수 욕이든 시험 일정 욕이든 하란 말이야. 언니가 기다리는 건 너라니까? 만나기로 한 시각 직전이 되어 1이 사라졌으나 답장은 없었다. 짜증이 났다. 상도덕 없는 새끼.
뚱한 표정의 언니. 별생각 없어 보이는, 없는 척하는 게 분명한 치밥. 그리고 나. 이 모임이 지금까지 유지된 건 사실 치밥이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고 감도가 높은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일을 잘 위로하고 때로는 있어 보일 법한 말을 한 번씩 곁들여 사람 마음을 건드릴 줄을 알았다. 나는 그래서 가끔 그의 부재가 열받았다.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거니까. 이 감정들의 처리를 나한테만 일임하고 있는 게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말하면, 언니는 뭐가 돼. 앞뒤없이 징징대는 애새끼? 그럴 수는 없잖아.
슬슬 질려 가고 있는 거였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셋 다. 아니면 내가. 근데 정서의 공유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그걸 통상 뭐라고 하지? 분위기. 분위기.
나는 계속해서 아, 힘들었겠다. 진짜. 아, 왜 그랬대?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말을 변주시켜 그녀의 힘든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끌어냈다. 치밥은 한 마디도 안 했다. 슬슬 위로의 래퍼토리가 떨어져갈 때쯤, 언니는 치밥에게 말을 붙였다. 야, 넌 맨날 같은 거만 먹냐? 딴 것도 먹어. 그리고 그는 포장을 반 뜯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장난기 있는 눈'에서 모든 장난기를 지운 채 그녀를 쳐다봤다. 짜증 좀 그만 내. 여기 너만 있어?
-뭐라고? 나 힘들었다고, 새끼야.
왜 욕해. 니 힘든 거 뭐, 우리가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는데?
야, 우리..
그는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 정작 언니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런 척했던 거겠지.
-아, 내가 징징거려서 빡쳤어? 너 어차피 카톡 읽지도 않았잖아. 안읽씹한 거 아냐?
안읽씹이든 읽씹이든, 여기가 니 감정 처리소야? 적당히 해.
-뭘 적당히 하는데. 힘든 거 말도 못하냐?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뭐? 내가 뭘 그렇게 했는데? 야.
..먹기 싫으면 가. 가서 너 혼자 놀아. 짜증내려고 왔냐고. 왜 니 힘든 얘기를 여기다 터는데.
언니는 그제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어떡해. 나는 치밥을 한 번 째려보고 언니를 따라 일어났다. 아. 피곤한 인간들. 그는 꿈쩍도 안 했다. 햄버거나 먹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힘든 걸 징징거렸다고 해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닌 게 뻔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셋뿐이라면 알 수밖에 없잖아.
너 언니한테 왜 그랬냐? 그냥 좀 들어주면 되잖아.
-왜 들어줘, 내가 그걸.
그냥..
-난 걔 그러는 거 예전부터 맘에 안 들었어.
뭐가, 또. 그럼 둘이 해결하라고. 둘이서 맘에 안 드는 걸 꼭 거기서 그렇게 말해야 돼?
-그럼 언제 말해. 쟤 저러는 거 버릇이야. 애도 아니고, 원하는 거 남들이 다 해주길 바라는 거.
또 언제 그랬는데. 그리고 니가 뭔데 버릇을..
-너 알잖아. 몰랐어?
알았다고는 말 못 한다. 어떻게 그렇게 대답해. 근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고. 니네가 뭔데. 남친 여친이야? 그럼 사귀면 되잖아, 라고도.
-맨날 지 좋다는 남자들 가지고 놀고, 가스라이팅하려 들고, 다 해주길 바란다고. 나한테도 그러길래 그렇게 말한 거야, 거기서.
그건 또 뭔.. 아니. 너. 언니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았어?
-알지, 왜 몰라? 나한테 고백 받아내려는 거.
아는데 그 지랄했다고, 여태?
-다 떠먹여 주길 바라잖아. 내가 왜 걔 맘대로 해야 하는데.
씨발. 이 진절머리 나는 것들.
치밥은 언니가 그에게 사인 아닌 사인을 보내는 걸 진작에 다 알고 있었다. 굳이 과잠바를 빌려가는 것, 언젠가는 돌려줘야만 하는 물건을 구태여 달라고 하는 것. 소개팅을 그렇게나 하고도 나만 단톡에 있으면 이야기를 덜 하는 것. 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서 게임 아닌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서의 이질감보다 허무함이 좀더 컸다. 그리고 비로소 좀 지긋지긋해졌다. 사실은 내 눈에도 보였던 것들.
셋이 밥을 먹거나 하면 그냥 내가 먼저 빠져 주던 자리, 차라리 둘이 싸우던 시절이 나았던 듯한, 조용해진 단톡. 불편한 기류는 정말 불편한 기류였다. 끊임없이 던지는 사인, 이미 다 읽고서 모조리 내빼는 상대. 안 끝나는 게임. 언니는 그 날 옆을 쫄쫄 쫓아가던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치밥 욕은 안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있던 소개팅 상대와 사귀기 시작했다.
단톡은 조용해졌고, 이따금 말이 오갈 땐 그 모든 단어와 문장에 정중함이 담겨 있었다. 겨울 공기처럼. 건조하고, 비어 있고, 단정하고. 그렇게나 더운 여름에는 잔뜩 싸돌아다니며 웃고 먹고 떠들었으나, 해가 넘어가자 셋이 바깥에서 모이는 일은 없어졌다.
성탄절, 새해 전야.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 날이 아니었으나 구실을 붙여 매번 놀거리를 찾았던 날들. 언니는 남자친구와 만나기 바빴다. 게임은 끝났고 심심이들은 완전체 활동을 중단했다. 그 스미스키들? 아무리 불을 어둡게 해도 야광빛을 내지 않았다.
셋 다 사실은 더위를 사랑했던 건가. 아니면. 추워지면 빛을 잃는 그런 성질이 있던가, 그 고무 피규어들에?
모른다. 그냥, 시간이 되어 야광색이 다 바랜 거였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