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죽여 주세요
흐어어어엉.
진짜 미쳐버리겠다.
아니야, 안 미쳐.
아무 일도 안 생겨. 알잖아?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그냥 거기 주저앉아서 아무데도 안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으면 날이 밝겠지? 그럼 나는 일하고 있겠지? 정확히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르쳐 줄 누구쌤을 따라서 뭔가를 막 적고 눈치를 보고 있겠지? 그러다 어버버버버버 하고 나면 퇴근하겠지? 그렇게 4일을 사는 거야. 그러고 나면.. 아마 8일 인스파이어 아레나의 하이라이트 클립들이 막 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나이트를 하고 집에 갈 거야. 시꺼먼 머리를 한 상태로. 그래그래.
인생에서 가장 머리색이 밝던 시기가 끝났다. 태블릿이랑 키보드가 없던 때는 대체 어떻게 살았나 했는데 그 때는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그 전에? 왕두꺼운 일기장을 썼다. 언제나 그렇게 잡생각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나 정리를 해댔는데 왜 하나도 남는 게 없냐고. 아, 나 진짜 미쳐버리겠다. 무서워서 돌아버리겠다. 뭐가? 내일의 출근이.
장난이 아니고 진짜다.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다. 색깔별로 나눠 놓은 빨래도 했고 분리수거도 했고 엄마가 추석에 갖다준 탕국도 드디어 다 먹었고 설거지도 다 했고 더 이상 집에는 정리정돈할 것도 없다. 아마도. 염색도 했다. 그 때 맘에 안 들었던 어두운 갈색과 핑크브라운 색을 섞어서. 머리가 너무 노랗고 밝았던 탓에 또 이번엔 시뻘건 갈색이 나올까봐 섞었다. 그랬더니 팀버튼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몰골이 됐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닌데 그냥 적응이 안 되어서 그렇다. 얼굴이 엄청 창백해 보인다. 망했다. 근데 머리색은 그냥 머리색이라고. 여차하면 두 시간만에 또 바꿔 버리면 그만이야.
첫 출근. 대체 몇 번의 처음을 거쳤더라. 나는 늘 봄이 싫었다. 새학기가 싫었기 때문에. 타고나길 찐따라 가만히 있으면 착하고 말 많은 친구들이 나를 어느 순간 구원해 줬지만 이제 나는 학교를 다니는 게 아니잖아. 아, 무섭다. 대체 여기 처음 출근하는 날은 어땠더라. 기억이 안 난다. 무서웠다. 아니지. 그 때는 무서운 줄 몰랐던 것 같아. 나는 그 전 병원을 지옥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무섭지 않았다. 거기만 하겠냐, 생각했던 것 같다.
근데 왜 지금은 무섭지. 나 덜 힘들었나? 지하철역 입구에서 받은 전단지를 서서히 구기며 걸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긴장될 때 하는 짓이다. 아. 왜 긴장되지? 처음이라. 그리고 너무 오래 놀아서. 생각해 봐. 10월엔 일한 날이 별로 없었어. 그러니 그럴 수 있다.
엄마 아빠는 어딘가를 가게 되면 항상 똑같은 말을 했다. 인사 잘 하고, 말 우물우물 하지 말고, 표정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는, 어깨를 움츠리고 입은 앙다문 그런 자세였다.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 허리를 폈다. 갑자기 손도 좀 떨리는 것 같아서 성미에게 미안하다고도 다시 전하고 싶어졌다. 미안해, 내가 공감능력이 좀 부족했어. 보호자 앞에서 손 떨지 말라고 그래서 진짜 미안해. 내가 지금 떨려. 넌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아. 나한테는 그냥 집만큼이나 편했던 거긴데. 분명 그 병동이나 내일의 거기나 사실 다를 것도 없을 텐데.
나의 귀여운 신규 성미는 며칠 전 마지막 근무 날 선생님 진짜 가세요, 저도 가면 안 돼요 했다. 너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그럼 와. 했더니 여기서나 거기서나요. 하면서 웃었다. 그래서 연락하고 싶다. 성미야, 나도 할 줄 아는 거 없거든. 쌤쌤이니까 니가 대신 갈래? 정말이야.
지금 차라리 병원으로 가 버릴까도 싶다. 가서 그 사람들 일하는거 구경하다 엎드려서 자면 안 되나. 왜, 막 보면 수능시험장 ASMR 같은 것도 있잖아. 그런 거 들으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나도 그러는 거지.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없을 거야. 없어. 어차피 안 할 거잖아.
여섯 시 반. 시간이 많아서 그렇다. 만약 오늘이 노는 날이 아니고 이브닝 근무였다면 이렇게 벌벌 떨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진짜 시간이 많아서 그래. 대체 어떻게 살았지? 수능? 너무 오래됐어. 거진 10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지만 어땠더라. 미치게 불안해질 때는 그냥 가지고 다니던 쪼끄만 노트에 몇 자 적은 후에.. 뭐. 다시 공부했지. 2시간. 규칙이었다. 아무튼 2시간 동안 뭐든 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정말 차라리 그 소아병동이라도 가서 일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근데 그렇다고 지금 진짜 병원에 가서 일할 수는 없어. 진짜 갈 거야? 안 갈 거야.
또 뭐가 있더라. 국가고시. 나는 내가 국시에 못 붙을 줄 알았다. 공부할 건 너무 많은데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서. 그래서 그냥 문제만 풀어서 답이나 외우려 했다. 아무튼 책상에 앉아는 있어야 했고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한 달을 샐러드만 먹었던 것 같다. 최대한 변수를 줄이려고. 어떻게든 기분이 업다운될 요소를 줄이고 싶어서.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날 채점 후 정말 이상하게도 불합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동시에 모든 것을 다 잊었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과 갈비집이나 삼겹살집이나 오리구이집 등등에서 나오면 엄마아빠는 자갈이 깔린 그 식당들 앞에서 차문을 닫은 후 몇 분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 라디오를 틀었다. 입었던 잠바에는 고기 냄새 비슷한 게 배 있었다. 아주 깜깜해진 차 안에서 집으로 향하고 있으면, 나는 이제 엄마아빠가 어떤 말을 할까 긴장했던 것 같다. 이름 세 글자를 부르면서, 아까 너 그 아줌마가 이렇게 할 때 왜 그러고 있었어. 라는 말을 하면 어떡하지, 같은 걸 열심히 생각하면서.
당연히 그런 것들이 뭐였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고 아무튼 계속해서 긴장하면서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만 떠오른다. 그게 왜 생각나는지는 모르겠다. 대체로 그런 식사자리가 있던 때처럼 날이 추워져서. 나 이제 스물여덟인데. 두 달 있으면 스물아홉인데. 어떻게 그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 정말 무서워 죽겠다.
아니야. 안 무서워. 그러니까, 무섭긴 무섭지. 무서워. 처음인데. 다 비슷한데 다 다 다른 거기에 앉아 있으면 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앞으로는 평소들의 전철보다 더 이른 걸 타야 한다. 층수도 높고 사물함도 다른 곳에 있으며 아무튼, 진실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럼 해야 할 일. 집 가는 SRT 예매하기. 다이소 가서 그 클립보드 사기. 아. 버리지 말 걸. 그거 끌어안고 다니는 건 입사한 지 일주일 된 신규나 실습생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다시 써야 한다. 아무튼 5일간의 출근 중에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하는 모든 행동들을 기록해야 하니까.
매뉴얼이 있지만 그건 다가 아니라고. 진짜 귀찮을 정도로 물어대야 한다. 뭐 하는지 보고, 이전에 했던 내가 아는 거랑 어떻게 다른지 보고, 여기서 이런 건 어디서 해야 하는지 보고, 혹시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빨리 머리를 굴려서 묻고, 당장 못 묻는다면 적어놓고 묻고. 어쩔 수 없다. 이번 주는 그러라고 있는 기간이다. 그래. 그런 거야.
병원이 무섭나? 무섭지. 하지만 몇 년간 배운 게 있다. 망하는 건 없어. 정신 똑바로 차리면 돼. 진짜 그게 다야.
그리고, 인사 잘 하고. 말 우물우물 하지 말고.
표정 이렇게! 하지 말고.
무서워도 어쩔 수 없다.
최악의 케이스? 내일 지각이지 뭐.
근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안 그럴 거야. 출근 한두 번 하니? 다 똑같아. 그게 어디든 어쨌든 내일도 결국 출근이라고. 오케이?
그리고 역시 가는 SRT는 없다. 또 일주일간 취소표를 찾아대야 한다. 어떻게 이것도 이렇게 한결같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