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꺼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 현금이 똥이 되는 시대! 라고 붙어 있다. 월세를 받아 노후를 대비하라는 광고. 그제인가 탈의실에서 삼각김밥에 쌀과자를 우걱우걱 먹던 내게 조무사 선생님이 그랬다. 일은 삼 분의 이만 해, 뒷턴한테 피해 안 갈 정도로만. 그리고 다른 데에 시간을 써야 해, 선생님. 미친 세상이라니까? 쫌이라도 더 빨리빨리 머리 써서 판에 뛰어들어야 돼. 천천히, 쉬엄쉬엄 하구. 알겠지? 일은.
그리고 그녀는 냉장고에서 카프리썬을 꺼내줬다. 왜 카프리썬은 제로가 없을까. 과자와 밥은 사랑하지만 제로가 아닌 음료를 먹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 앞에서 저 주스는 별로, 라고 할 수 없어 아이 감사합니당 하고 빨대를 꽂았다. 맛있었다. 카프리썬, 맛있지. 선생님. 저는 2천을 잃었는데요. 나조차도 지겨운 이 레퍼토리. 하지만 어쩔 건데. 없어지지도 않는 일. 이제 이것도 일 년 다 돼 간다구.
덕현씨는 새벽에 나한테 그랬다. 언니, 언니가 해. 그러지 말구. 뭘 하지 마요. 아니, 나 두 번이나 찔렀어. 더 못 해요. 잘하는 사람들 불러 줄게. 나는 못 해서 그래요. 아니야, 아니야. 다른 사람 말고. 언니가 해 줘어. 그 사람들, 막 찔러. 막막 찔러. 지난 번에 나는 그의 손등 혈관을 두 번이나 터뜨렸다. 안 그래도 토니켓을 묶어놓은 자국이 오래오래 남게 부은 팔, 피주머니라도 든 것처럼 부풀어오르는 부위가 진짜 미안했다. 해 줘. 응? 부르지 마. 그 사람들.
신분당선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인지 몰랐다. 강남역에서 노선 끄트머리나 다름없는 집까지의 거리가 멀지도, 지겹지도 않았다. 여섯 글자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여섯 글자? 사실 그 대화 전체를.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게 좀 그러면 녹음이라도 해 둘걸. 그냥 워치 한 번만 눌러둘걸. 그래서 계속계속 재구성했다. 어차피 길지도 않은 몇 마디. 돌아보니 나는 항상 고백하고 튀는 입장이었다. 근데 그래야 편했다. 신기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런 거 말고 이제 교류를 좀 해야 하는데. 내년에 스물아홉인데. 흠.
성인 병동으로 와서 좋은 점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 예측도 가설도 아닌 진짜에 가까운 시뮬레이션. 나나 그들이나 똑같이 늙는 몸을 가진 사람인 것만은 같았으므로. 덕현씨한테 물은 적 있다. 왜 결혼 안 했어요? 좋은 여자가 없었어. 좋은 여자? 어떤 여자가 좋은 여잔데요?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 아, 그렇구나. 괜히 그런 게 궁금했다. 무례한 건가?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라 물은 게 맞다. 그는 좀 귀엽게 웃을 줄 알았다. 진짜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웃음. 여기서 몇 번 하지도 않은 나이트. 하루는 그의 난동이 심해 처치실로 빼 놨었고 하루는 근무 시작부터 검사를 보냈다. 딱히 멀쩡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며칠은 이상했다. 어제는 더. 잠을 정말 많이 잤다. 평온하게도.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그랬지.
다른 사람 말고 니가 해 달라고. 오늘 검사 할 때도 가만히 계셔야 해요, 이렇게. 그랬더니 무릎 어디께로 손을 뻗어 말했다. 여기까지인 줄 몰랐지, 나아 참. 나는 요기까진 줄 알았어. 뭘요? 아, 자르는 거. 아아. 네.
그는 내가 없는 혈관을 찾아 주사를 찔러댈 때도, 근육주사 전 소아과에서 하던 버릇대로 아프다고 겁을 그렇게나 줄 때도 미동도 없었다. 바늘을 팍 하고 꽂아 넣어도 그랬다. 정말 보통의 인자한 노인 같았다. 왜 이럴 때만 제정신인 것 같지? 그런 걸 느끼는 게 싫었다. 대체 얼마나 어떻게 참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니까.
슬슬 착각이 들려 했다. 내 말은 잘 듣는다는 착각. 너무 아픈 사람 옆에 있으면 그런 이점이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쉬워지는 것. 나는 매시간 그에게 나쁜 사람이기도 했으나, 사실 똑같은 맥락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는 더 쉬웠다.
뉴이스트 해체 전 마지막 앨범을 시켰었다. 하얗다. 코팅된 재질이 아니라서 잘 모셔야 한다. 왜 그렇게나 흰색인지 참, 마음에 안 들었지만 뭐 어떡해. 다 끝내고 내는 앨범인걸. 뭐든 받아들여야지. 거기 사인을 받아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멍청하게 굴었다는 걸 알았다. 하이라이트 팬들이 모인 분위기랑 다를 게 없었다.
규모는 확실히 작았고, 평일이라 인파도 적었지만 아이돌 구경은 아이돌 구경이라서. 승영언니가 생각났다. 떨림도 기대도 정보 공유도 다 함께였는데. 완전히 혼자 오는 연예인 덕질 장소. 이건 거기다 콘서트나 팬미팅처럼 돈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뭘 어떻게 하다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루 전에 공개된 일정. 멀지 않은 장소. 그리고, 갈 수 있잖아? 오프라고. 충분했다. 가야 할 이유.
하이라이트 공연 한 번에 사진이 만 장씩은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일자별로 폴더에는 사진이 400개 정도가 들어 있었지만 그건 400개가 아니었다. 죄다 연사로 눌러댄 탓에 사진 한 장 뒤에 99장이 숨어 있는 게 태반이었다. 하다하다 정리할 게 없어서 이젠 그걸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 지우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거지. 집은 좁고, 물건은 많고. 휴대폰은 뭐 다른가. 할 일을 하려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 거치적거리는 게 없는 공간. 500기가짜리면 뭐 해. 정리 안 한 게 잔뜩 겹쳐 있다는 사실에 늘 숙제가 남은 기분이었다.
한 번에 7천 장 정도의 사진이 사라졌다. 휴지통에서도 지웠다. 폴더 한 번에 3기가씩은 공간이 늘었다. 이제 내 마음대로 가용할 공간 230기가. 속이 시원했다. 사진들을 보면서 알았다. 진짜 많이 좋아했구나. 지금도 좋아하지만, 정말정말 내가 그걸 찍으면서 행복했던 게 느껴졌다.
좋아했던 연예인들을 보면 항상 먼저 느끼는 건, 실존하는 인물이었구나, 하는 것. 노엘 갤러거도 하이라이트도 사카구치 켄타로도 그랬다. 내가 아는 장소, 익숙한 사물들, 그리고 안 익숙한데 익숙한 저 사람. 정말 같은 땅을 밟고 동시대에 사는 사람이었구나. 이어서는 뭐, 아. 역시 저걸로 돈을 버는 직업은 다르구나, 하는 인상.
저 사람이 대사를 읽은 장면과 소리. 이역만리 방구석 또는 앞으로도 일면식 없을 작곡가의 믹싱 버전, 거기에 한두 단어 또는 문장만을 본인이 입혔을 수도 있는 가사. 그리고 그 컨텐츠의 어떤 것과도 유사한 일을 겪지 않았으나 그 모든 것과 함께한 나. 감상한 시간의 추억은 과연 누구 걸까 생각했다. 노래를 들으며 지나쳤던 지하철역, 새벽 탈의실, 집 가는 기차. 추운 길거리. 또 지하철역. 방구석에서 본 영화, 쓸데없이 모아댄 갤러리의 사진들. 그리고 무대 위의 원작자. 와, 저 사람이잖아? 하는 감정.
정보가 없던 나는 당연히 아주 뒷번호였다. 그래도 신기했다. 와, 저기 있구나. 이 노래들 부른 사람. 진짜네. 정말 화면이랑 똑같이 웃는구나. 그리고 양옆에서는 자기들끼리 떠드는 이야기들. 럽페 때 팬미팅, 헬미 때 뭐. 민현이 군대. 어쩌고. 장카유설 중에 카가 어떻고. 보넥도였으면 여기서 못 했겠지? 당연히 안 되지. 나 내년에 경희대 꼭 갈 거야, 그래서. 거기 매년 온 거 알아? 대충 이 사람 데뷔 때는 다섯 살쯤이었을 텐데 어떻게들 좋아하는지 신기한 애들.
엄마뻘에서 그런 십대까지 연령대는 하이라이트 때보다 더 다양했다. 올림픽공원 부근에서 보던 그, 화려한 사원증 같은 포토카드 홀더. 뭔가를 상징하는 게 분명한 인형. 나와 비슷하고 다르고 또 비슷한 이 사람들. 어디나 다를 게 없는, 이 판이 굴러가는 양상.
하다하다 콘서트도 아니고 이렇게 팬미팅이나 다름없는 자리에도 오다니. 사실 그냥 집에 갈까 생각했다. 할 말 없는데. 나는 그냥 싸인해 달라고 앨범 내밀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팬사인회가 아니잖아. 내 뒷사람들 형평성은? 할 말 없는데. 차례는 다가오는데 더 할 말이 없어졌다. 한 번씩 놀라기만 했다. 와, 지인짜 잘생겼구나. 그러게, 잘생겼다.
태블릿 파우치에 앨범 포토북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걸 들고 갔다. 무거웠다. 그 무거운 걸 들고 여기까지 왔다구. 그래서 돌아갈 순 없었다. 컨텐츠 찍는 자리, 내놓는 초상권. 굳이굳이 와서 이 무리에 낑겨 있잖아. 다시 언제 와, 이런 델. 콘서트 가도 하고 싶은 말은 못 해. 하고 싶은 말? 앨범 들고 왔잖아. 원작자한테 사인받으려고. 떠오른 말은 정말 딱 하나였다. 노래 좋아요. 진짜 그거.
잘생긴 사람은 널렸고 몸 좋은 사람은 더 많았으며 뭐 기타등등 항상 많았다. 근데 그 노래가 좋았다고. 당신들의 그 곡들. 어쩌겠어. 안녕하세요, 하고 앨범을 살짝 꺼내 말했다. 노래 계속 만들어주세요, 진짜로. 그리고 붕어빵을 사이에 두고 그가 그랬다. 어, 니들 앤 버블이네요. 정말 갈색이다 못해 황토색인 그 눈동자.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파리 들어간 호박색. 아이돌들 길거리 캐스팅 썰 다 뻥이라는데 이 정도면 구라는 아니겠다 싶은 이목구비의 단정함.
저 팬클럽 가입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게 알아서 못 했어요. 아.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 표정에서 뭔가를 읽으려 했지만 어차피 다 촬영하고 있는 현장, 놀랐을 수도 아닐 수도. 더 할 말? 나 혼자서도 질리게 한 생각. 밤에, 달릴 때 듣기에 너무너무 좋아요. 최고, 짱. 쌍따봉 엄지척. 진짜 그게 다. 그리고 아마 그가 웃었다. 적당히 달려요. 그래서 그냥 화이팅! 꼭 계속 해주세요! 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던 길로 뛰어갔다. 역삼역까지. 팥붕인지 슈붕인지 기억도 안 나는 붕어빵이 든 종이컵을 잡고. 아마 그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었을 사람들을 두고 집까지 왔다. 채 1분도 안 될 대화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적당히 달리라니. 달리기는 어차피 적당히 하게 되어 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피곤하면 못 하고 비가 너무 와도 못 하고 어떤 이유로든 퇴근이 지나치게 늦어도 못 하고 몸이 뜯길 것처럼 아파도 못 한다. 그래도 적당히 달리라고 했다. 살면서 이렇게 강렬한 여섯 글자가 있었나? 없을 거야. 일단 올해는 없어. 퇴근길 전철의 피곤한 사람들, 나이트 후 두 시간도 안 잔, 똑같이 피곤할 나. 그래도 눈 보면서 하고 싶던 말 했다. 노래 좋다구. 아무것도 안 찍어놓은 게 아쉬운 만큼 계속 생각했다. 근데 어차피 찍어놨어도 안 봤을걸? 남사스러워서. 웃기잖아. 사람 앞에 있는데 휴대폰에 대고 말하는 나.
마음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응답받을 필요가 없는 마음을 던져 놓는다고 생각했다. 공연장에서 소리지르기, 환자에게 말 걸기, 돌아오지 않을 호의, 내가 준 게 15인지 30인지 계산할 필요 없이 그냥 주고 떠나면 되는 일들. 왜 그런 게 편한지 모르겠다. 내가 뭐라고, 수만 수천 명 중의 한 명일 내 생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와닿길 바랐을까. 알 수 없는 기전이다. 실존하는 걸 확인하고, 내가 겪은 걸 굳이굳이 알려 주는 것.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마음.
나는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닌 것 같다. 그렇게나 자의식이 강하지 않으면 안 할 행동들이잖아. 좋아했었다고 말하고, 거기에 사귀어 달라는 건 아니라고 또 덧붙여 말하고, 되도 않는 친한 척을 하고, 어떻게 뭐가 좋다고 말하고. 그렇게 도장을 찍는 걸까? 그 시간은 내가 본 당신의 것이 아니라, 그걸 본 나의 것이라고 종결시키는 그런 거?
정리된 휴대폰. 정리된 집, 출근 전에는 어떻게든 하고 가는 설거지, 끊이지 않는 애벌빨래와 빨래 돌리기. 최근에는 다리미를 샀다. 좀 비싼 걸로. 가전제품에는 가성비라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어차피 옷 펴는 기능이 전부인 다리미인걸. 싼 건 싼 대로 별로였다. 5년 전 기숙사에서 쓰려고 샀던 손바닥만한 다리미는 티셔츠 한 장을 다리려고 해도 오 분은 걸렸다. 이번 건 좀 다르겠지? 매일매일을 단정하게 시작하고 끝내는 게 필요했다. 이건 투자야. 내 하루는 내 거여야 한다고.
나는 모든 시간이 다 내 것이길 바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갈색 눈의 아이돌 누구씨를 보고 오늘 알았다. 아, 이미 그랬구나. 월급, 듀티, 환자, 애들, 늙는 것, 아픈 거. 그런 걸 다 피해 매번 우주 밤하늘을 쫓아 달리고 달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거 다, 내 거였구나. 하고. 왜 거기서 그걸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어.
그래서 되게 피곤하고, 평안하다. 웃기지. 나는 올해 보이스피싱도 당했고 일은 몇 년을 해도 내게 그 자체로 염증 덩어리인 것처럼 힘들었고 어쩌다 온 여기서도 적응 중인데.
음, 그거 다 내 꺼였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나중의 나는 알려나, 이 횡설수설한 글을 읽으면? 그렇게 느낀 이유를 말이지. 그러니까 추억도, 시간도, 다 내 거였구나. 나는 그냥 쫓고 원하기만 한 건 아니었구나, 하고 느낀 이유를.
다시 진짜 겨울이다. 찬 공기가 신선해 반가운 계절.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이라서, 겨울은 이 시린 온도가 정신을 들게 해서 좋다.
적당히 달려요. 실화일까? 실화다.
그 말이 그냥 가나다라마바사 였어도 나는 이 말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려 들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