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
모모에는 도시의 사람들이 정적을 견디기 힘들어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들은 그러면 미칠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고. 나는 미칠 것 같은 불안은 안 느낀다. 대신 과자를 먹고 싶다거나 뭘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이어폰을 꽂는다. 흑백요리사를 봤다. 다들 대단히 사는 것 같았다. 요리에는 거짓말이 없다. 보기 싫거나 보기 좋거나, 맛있거나 맛없거나. 요리도 기술이고 경험인데, 난 뭐 하지. 이대로 살아도 되나 생각한다. 그러다 말았다. 출근해야 하니까.
나이트 출근 때는 튀김 냄새가 난다. 갈비 냄새도 삼겹살 냄새도 난다. 차량경보기에서 주기적으로 울리는 소리도 나고 그 기계가 번쩍이면서 나는 뻘건 빛도 보인다. 그만하겠어? 모든 게 빛이다. 오가는 버스, 불 켜진 엽기떡볶이, 횟집, 빵집, 또 빵집, 또또 빵집, 와플대학. 등등. 그리고 가게마다의 엄청난 사람들. 퇴근했거나 퇴근하는 중인 사람들. 그러니까 인생은 정적과 거리가 멀다. 불안할 틈을 주지 않는다. 대신 시도때도 없이 스미는 거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과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 수 있는 건가? 그렇다고 막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닌데. 좋다. 로망이 생겼다. 오프가 기니까 어디든 가볼까, 말고. 환율이 어떻다니까 가볼까, 도 말고. 두 군데를 가고 싶어졌다. A에서는, 상하좌우 끝을 모르고 펼쳐진 땅과 하늘을 볼 것이다. 몇 달 전에 거길 다녀온 누가 그랬다.
좋아요? 그냥 그래. 좋아. 그냥 그런 거랑 좋아요가 어떻게 같아요. 못 씻어. 못 씻는다구요? 먹을 것도 없고. 엥? 밥을 안 줘요? 그게 아니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었어. 아하. 근데 하늘은 이쁘더라. 아, 냄새도 나. 냄새요? 응. 까탈스러운 성질머리 어디 안 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갈 곳도 못 되겠다고.
병원 사람들은 여행을 자주 간다. 달에 한 번은 어딜 다녀온 누군가 사온 물건너 바깥의 간식거리가 탈의실에 있었다. 병원 사람이 아니라, 그냥 요즘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다. 부럽다. 돈과 여유. 난 없는데.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가고 싶어졌다. 몇 년에 걸친 남들의 여행과 간식과 기념품들을 지나친 후 처음으로. 그 시간과 돈을 들여 밖에서 고생하는 거. 다 변경될 그 계획과 일정에 한정된 재화 베팅하기.
B에서는, 거지 중의 상거지처럼 다닐 것이다. 습기와 소나기에 엉망이 될 머리와 얼굴로 슬리퍼나 샌들을 질질 끌고 소용도 없을 우산을 든 채 시끄럽고 후덥지근한 거리를 어슬렁거릴 것이다. 숙소 반경 십 미터쯤 떨어진 술집에서 맥주를 세 잔 마시고 내가 영영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드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 가게의 냄새와 생김새를 취한 시선으로 구경할 것이다. 그리고 안전히 숙소로 돌아올 것이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바깥에서 취했던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언젠가일 그 날을 빼면.
거기서는, 땀에 전 티셔츠를 입고 빗물이 찝찝하게 마른 바지를 입은 채 맛이 간 눈으로 앉아있다 올 것이다. 애초에 읽지도 못하는 간판과 비슷한 듯 다를 그 너저분한 길거리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과 말소리의 높낮이를 잔뜩 듣다 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두 군데 모두에서 나는, 상당히 추레한 모습일 것이다. 추레하다는 표현도 사실 안 어울린다. 그냥 되는 대로 다닐 거라서. 안 추운 옷을 가져가고, 호텔 세탁기에 대충 돌려도 상관없는 상의 쪼가리와 바지를 챙길 것이다. 레티놀이고 무슨 마이신이고 하는 건 다 버리고 그냥 세수 되는 티슈와 튼튼한 로션이나 챙길 것이다. 그 여행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여야 한다. 내가 가지만 내가 거치적거리면 안 되는 유료 이벤트.
나는 가서 정적 아닌 정적을 경험하고 올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와 여행. 아마 올해의 마지막이 될 꿈에는, 생뚱맞은 강아지가 나왔다. 강아지에 대해 잘 몰라서 그게 무슨 견종인지도 알 수 없다. 아마 말티즈였겠지? 집에 갔는데 그 강아지가 내 배 위로 올라와 너무 귀여운 얼굴로 나를 빤히 봐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걸 키웠는데 집에 처박아놓고 근황도 안 물어봤나? 이렇게 까맣게 잊고 살았다고? 말도 안 돼. 데리고 와야 하나? 그럼 내가 출근했을 때 얘는 어떡해? 근데 내가, 우리 집 식구들이 언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지? 뭐야, 하다 깼다. 당연히 강아지는 없지. 그런데 그 배 위의 온기와 귀 뒤의 말랑한 듯 연골 같은 느낌 같은 게 기억났다. 감각은 참 신기해. 이렇게나 사람을 속일 수 있어.
몽골에 다녀왔다는 그 사람은 예전에 아프리카에 산 적이 있다고도 했다. 돈 주고도 못할 경험이다.
보통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생각할 때는 삶이 조용할 때였다. 그 생각은 내 인생에서 뭔가를 바꾼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망한 인생 같은 건 없다. 여행을 가든, 안 가든, 변하는 건 없다. 다만 즐겁겠지. 그 때가.
기대치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자연경관에 대한 기대? 해도 되지. 날이 흐리든 쨍쨍하든 하늘이고 평원일 테니까. 시끄럽고 너저분하고 축축하고 냄새 나는 오후와 저녁과 밤에 대한 기대? 읽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이 채우는 시간? 이건 무너질래야 무너질 수가 없어.
올해, 아니 내년 장기오프를 언제로 신청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출근해서 확인해 봐야 한다.
기대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리고 올해도 안녕. 작별인사는 이걸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