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는 실
황민현 씨가 공익근무요원에서 일반인이 되었다. 나는 이걸 꽤 기다렸다. 누군가 트위터에 썼던 내용을 내내 기억했기 때문에. 40일 남았다는 거였다. 이 병동으로 발령받아 출근하게 된 12월에 본 그 포스팅. 그가 민간인이 되어 어디든 얼굴을 비추기 시작할 때쯤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진짜 시간이 그렇게 갔다.
근래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를 가끔 읽는다. 조용해서 좋다. 책이니까 당연히 조용하겠지. 하하. 전자책 기준 300페이지가 조금 넘고 이제야 160페이지가 넘었다. 이 다음부터는 형님께 쓴 편짓글이다. 지금까지는 자식들에게 쓴 글이었다. 글이라 쓰고 잔소리 모음집이라 읽는 그것들.
내가 이거이거 하라 그랬는데 이건 했니, 너네 형은 그나마 뭐가 어때서 이만큼은 했겠지만 넌 그것도 안 되는데 그렇게 살아서 어떡할 거니, 이만저만한 소식을 들었는데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니, 이 아비는 이렇게나 애를 썼는데도 요만큼인 것을 너네는 머리에 뭐가 들었길래 그렇게 지내니, 남들을 좀 돌아보긴 하고 징징대는 거니, 너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등등. 읽다 보면 꼬았던 다리를 펴고 허리를 세워 앉게 된다. 그게 카페든 공연장 자리든 지하철이든.
갤러리에 숨겨 놓았던 폴더를 지웠다. 예전에, 전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몇천 장이 들어있던 폴더를 그런 식으로 놔두다 얼마 안 있어 말끔히 지웠다. 지아 사진이 3000장쯤 들어 있던 폴더. 휴지통까지 비웠다. 20기가가 늘었다. 그 친구의 사진과 영상들이 그렇게나 용량이 클 거라고는 못 생각했다. 500기가짜리 휴대폰. 기본적으로 필요한 어플은 다 깔려 있고, 이제는 아이돌 사진도 백 장도 안 되는걸. 용량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도 자꾸 지우고 정리하고 싶었다. 23년 추석 즈음부터 25년 극초반까지 그녀를 매개로 했던 병동에서의 기록이 모두 없어졌다.
이백 년 전의 옛날 사람이 하는 잔소리. 그걸 구태여 돈 주고 사서 시간을 들여 읽는 것. 재밌는 점이었다. 나는 정작 집에 가서는 덜 차려진 식탁에 서서 이런저런 반찬을 마구잡이로 먼저 집어먹는데. 진짜 엄마아빠는 나한테 팥죽 사진을 보냈는데. 나는 거기에 반말로 맛있겠다, 라고 보냈고 그들은 본죽 사 먹고 액운을 쫓으라는 말을 보내왔는데.
마음이 삐뚤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어제는 좋아하는 그룹이 라이브 방송을 했다. 며칠 전에 팬들 사연을 받았다. 즐거운 거, 슬픈 거, 웃긴 거 등등 다. 그들이 거기서 몇 개를 랜덤으로 골라 읽어주었다. 그 중 하나였다. 조부모들이 돌아가셨다. 슬프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이 나이에도 잊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고. 짜증이 나서 듣다가 유튜브를 껐다. 다시 들어가니 또 비슷한 사연이 나왔고 읽던 멤버들은 울기 시작했다. 아닌 줄 알았는데 약해빠졌구나 생각했다. 또 어플을 껐다. 애처럼 생각했다. 그럼, 그럼 내 슬픔은 누가 알아 줘? 난 어떡해? 아. 나 슬펐구나. 슬픔? 왜?
오늘 읽은 부분에서 마음에 들어온 건 아무튼 거짓말은 쓰지 말라는 것. 당신은 그 편지가 저잣거리에 떨어져 원수가 읽더라도, 수백 년 후의 사람들에게 읽혀도 부끄러움이 없을지를 거듭해 생각하고 세상으로 내보낸다고 했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말을 예전에 본 적 있다. 난 거짓말 쓴 적 없는데. 정말 없나? 정말 없었다. 사실 있을까? 모르겠는데. 없어.
나는 그 영역에 발을 들이면 안 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마 맞을 것이다.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아프고 죽었다. 이제 와서, 조금 인정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정말 많이, 자주 생각했다는 것. 달라진 건 없었다. 대신 결론은 같았다.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내가 애초에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므로. 나는 어디에 가서 슬퍼해야 하는 걸까. 내가 슬퍼해도 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디서도 이 감정을 지우지 못하는데 남의 슬픈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죽어 버린 걸 뭐 어떡하라고.
차라리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눈물이 안 났다. 나는 그들과 완전한 남이었다. 2020년에 할머니가 죽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서야 잔뜩 울었고, 울지 않는 아빠를 보고 신기해했다. 슬퍼서 운 건 아니었고 미안해서 울었다. 나는 애교 많고 붙임성 있는 손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집에 가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어색하게 앉아 밥을 먹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아빠가 새빨간 눈으로 무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안쓰러웠다. 안 피곤할까, 생전 귀여운 손녀가 아니었던 내가 밉진 않을까. 아빤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다.
나는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병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 깊이 공감해주고, 따스한 위로 같은 걸 건네던가, 말없이 안아 준다는 식으로. 그런데 나는 그랬던 적이 없었다. 나는 나만 생각했다. 내가 혼자 삼킨 것만 생각했다. 21년도 2월. 동대문구 다른 병원에 있던 환자가 생각났다. 이름도 기억 안 난다. 한 듀티당 평균 8명의 환자를 본다 치면 내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마주친 사람은 못 해도 천 명은 넘었다.
그는 깜박거리는 장면처럼 남았다. 과일 그물망 같은 걸 뒤집어쓴, 어디서 쥐어터진 것 같은 얼굴, 목의 기관절개관, 유리병에 든 만니톨. TA, Hydrocephalus, 운수업. 그 때 나는 사실 프리셉터에게 이건 왜 병에 들어 있냐고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때의 내가 생각해도 혼나기만 할 질문 같았어서. 아마 그는 내게 일생이 뒤틀려 멈춘 최초의 표본이었다.
오늘 아침 그 머리의 그물이 스타키넷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당시에는 몰랐고, 지금은 알았다. 여기서 알게 된 거였다. 이어 만니톨을 썼던 다른 환자들을 생각했다. 일고여덟 살쯤 됐던 남자애가 뇌수막염으로 입원해 있을 때 그걸 생리식염수와 2시간 간격으로 번갈아 맞으면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같이 나갔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엄마가 나에 대한 항의를 넣어 불만글을 썼기 때문에. 채혈하시는 간호사님이 미숙하셔서 어쩌고.. 그런 걸 보면 그 땐 정말 입사한 지 몇 달 안 됐을 때였다. 22년 여름쯤.
그 애는 그러다 호전되어 퇴원했다. 시간이 훨씬 지나 또 만니톨 처방이 다른 애 앞으로 나자 그 병상으로 가기 싫어졌던 게 기억났다.부모에게 해줄 말이 없어서. 뇌압 좀 뺀다고 달라질 게 없는 경과. 외과에서 수술도 답이 못 된다고 온 답신. 그리고 그러던 여자애 둘은 나란히 죽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지. 내가 기억 못 하는 일들이 훨씬 많을 테니까.
영안실에서, 형광 핑크색의 립스틱이 입술에 발린 채, 하얗게 화장을 한 할머니의 얼굴을 봤던 게 20년 끄트머리였다. 아마 12월. 나는 그 때도 아빠의 기분이 어떨까만 더 생각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 같은 거였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사실 어떤 데이터도 업데이트되지 않아야 했던 게 맞았다. 가까운 사람들은 아무도 죽거나 심하게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오늘도 이러고 있나 생각했다. 남의 인생들을 훔쳐보느라 너무 바빠 그랬다.
이름을 꼽아 보니 열 개에 달했다. 내 앞에서 죽지 않았더라도, 중환자실의 코드블루 방송이 들리고 정말 퇴원 표시가 이름 옆에 떠 버린 그들까지 포함해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난들, 나라고 그렇게 될 줄 알았겠냐고. 이렇게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방해할 줄 알았냐고. 어디다 말하지도 못하고 도움도 안 되는 이런 기억들.
정약용이 거짓말을 쓰지 말라고 했지. 술이나 퍼마시고 안 일어나고 싶다. 뭣 같은 세상살이다. 본인의 슬픔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사람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쓸데없는 일들. 갑자기 인생이 부서진 채 정지하거나 사라진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환자라 불렀고 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거창하게, 이제야 생각한다. 그게 일이라고.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처리한다고. 보고, 다음 일로 넘어가고, 인계하고, 가끔만 떠올리고, 갈무리는 알아서 해야 한다고. 그리고 사실 나는 그렇게 유들유들한 타입도 아니었다. 못할 것도 없었다.
슬프지 않고 억울한 점 없는 인생은 없었다. 내 슬픔은, 내가 이걸 슬픔이라 명명해도 된다면, 그래서 평범한 거였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안고 사는 것. 이건 슬픈 게 맞았다. 많이 슬프다. 내가 그들을 알았던 게 슬프고, 손이 닿았던 게 슬프다. 슬픈 게 맞았다. 슬픈 걸 슬프다고 하지 뭐라고 해. 슬퍼. 어떻게 안 슬퍼? 비록 권한이 없을지라도, 웃고, 인사를 나누고, 나아지길 바라고, 또 인사하고, 소식을 전하고, 얼굴을 맞대어 교류하던 이들이 그렇게 뚝 끊겨 사라졌다. 슬플만 하잖아. 내가 철인도 아니고. 나는 그냥 사람인데.
일어나서는 지아의 사진들을 다 지운 걸 조금 후회했다. 성현이가 죽은 날은 내 생일 즈음이었다. 그다음날 근무가 끝나고 지아 아빠는 버스정류장에서 나한테 스타벅스 케이크를 줬다. 정확히 말하면 지아가. 지아야, 생일 축하해요, 하면서 드려. 그 날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냥 받았다. 감사합니다, 고마워 지아야, 하고. 모든 순간을 찍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나 우는 걸 보고서 위로차 건넸을 그거. 아마 집에 와서도 사진은 안 찍었다. 그래도 기억은 난다. 실체가 있어야만 근거가 되고, 정당화되지는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난 시간이 좋았으면 사람들은 추억이라고 불렀다. 나쁜 것에는 딱히 단어가 없다. 그러니까 해석하기 나름이었고, 그냥 이름이 그렇게 예쁘게 붙은 거였고, 애도며 슬픔도 다 그렇게 지나가는 현상에 특별히 이름이 붙은 거였다. 시간. 시간에 얹힌 사건들. 얼마나 어떻게 마음을 줄지는 내 선택이 아니었다. 다만, 회수는 스스로의 몫이었다. 내 슬픔은 그런 거라고 정해놓기로 했다. 대신 하나의 패널티는 준다.
녹는 실이라고. 외과에서 쓰는 녹는 실. 시간이 좀 필요한 것. 놔두면 알아서 녹는 것. 어쨌든 흔적은 있지만 구태여 드레싱을 떼고 자꾸 들춰 본다고 더 나아지지는 않는 것.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유배지에서 보낸 잔소리,를 읽다 보면. 너무 많지. 그런데 당장은, 스스로를 잘 갈무리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 그러니까 티내지 말아야겠다. 내 뒤틀린 마음을. 시간이 또 지나면 그 실들이 없어진 때가 올 테니까.
지금은 그거면 충분할 것 같다.
동시에, 일상을 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