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워. 모르겠으면.
근데 어떻게 그래. 일을 더 많이 하는데.
아무튼 외운다. 아니라고.
못 넣은 차팅을 넣으려는데 추가오더 알림이 칠십 개는 떴다. 접수취소된 검체 알림은 또 따로. 구라 같지만 구라가 아닌 전산. 1월 1일 일곱 시 반의 오더. 그럼 사실 내가 할 일은 없다. 그래도 멍청히 앉아 있게 된다. 내가 최선을 다 했나. 할 만큼 했나. 정말로. 난 언제 멋져질까.
출근. 스크롤을 슬슬 내렸다. 좀 열받았다. 어제는 한 시간마다 혈당 재서 약물조절, 오늘은 15분마다 혈압 재기? 여기가 중환자실이야? 물론 내가 아니고 기계가 알아서 재. 근데 환자수 이게 뭐야, 쟤는? 왜 굳이 이 방 환자를 찢어서 나한테 다 몰빵한 거야? 아, 이제 뉴비 봐주기 타임 끝났다, 이건가. 나한테 어제도 오늘도 인계를 준 애는 일을 띄엄띄엄 하는 건지 그냥 신규라서 그런 건지 뭐 하나 제대로 매끄럽게 넘어가질 않았다. 근데 그건 그 사람 잘못은 아니니까. 배정 꾸역꾸역 거지같이 한 차지 잘못이지.
지난 번엔 그 할아버지랑 그 환자 아무리 같이 있어도 딴 팀한테 안 주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그대로 봐? 그래. 사정이 있었겠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진짜 열받는 건 따로 있었다. 자기 방 환자가 섬망에 젖어서 제정신이 아닌 소리를 내내 내지르는데 히죽히죽 웃으면서 '아 진짜 공포영화 같지 않아요? 무서워여. 쌤 새해 노래 들으셨어요? 머 들으셨어요?' 하던 옆 방 담당. 그간 분명 올드거나 선배일 거라 생각했다. 말하는 꼴이 어처구니가 없어 사번을 보니 나보다 후배였다. 이래서 나한테 살살거렸군.
복도에 앉자마자는 자기 방 환자가 내 환자가 내는 괴물 같은 소리에 잠을 못 자겠다고 항의하자 내 환자를 처치실로 빼면 안 되냐고 했었다. 시작부터 진짜 열받게. 제가 뺄 테니 혹시 가능하실까요, 도 아니고, 빼면 안 돼요? 그럼 복도 저 끝에서 입구까지 니가 왔다갔다 하실래요? 할 것도 아니고. 선생님 저 환자 십오 분마다 BP 보면서 니카 조절해야 해요. 너무 멀어, 좀만 이따가.
근데 거기다. 미친 것 같아요, 공포영화가 어쩌고? 말이 곱게 안 나갔다. 웃겨요? 선생님. 그런 말 하지 마요. 공포영화라니, 진짜 무섭잖아. 흐흐. 성질 더러운 애로 찍힐까 봐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어쨌든 머리가 꽤나 비었구나 싶었다. 노래? 니 그 무서운 아줌마가 내는 소리 때문에도 집중을 못 하겠는데 뭔 노래 타령이야, 씨. 아, 노래요? 저기 있네요. 저거. 그 병실 문을 가리키면서 웃었다. 좀 닥치라는 뜻이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애환의 소리를 뽑는 중인 진짜 저 환자 말고, 너요. 나 이어폰 꽂고서 너랑 잡담할 시간 없다고. 못된 성질머리가 박박 긁혀서 짜증이 있는 대로 다 났다. 바빠 죽겠는데.
제인 에어의 버사. 버사 메이슨. 아주 늙지는 않은 여자가 혼돈 속에서 지르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생각났다. 제인 에어 남자주인공이 다락방에 처박아둔 전처. 서인도 제도의 어쩌고였다는 설명이 따라왔던 걸 떠올리면 정말 제정신이 아닌 여자였다기보단 당시의 인종차별이나 식민지 시대의 돼먹지 못한 산물 같은 게 소설에서도 드러난 거겠지.
어릴 때도 그 여자에 대한 언급이 소설에서 짧은 게 의아했다. 제인 에어부터 무슨 잉그만 양이었나 하는 여자, 기숙학교의 친구 누구까지도 다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그려놓고서는 그 여자만은 무슨 물건 취급해 놓은 게 이상했거든. 실습생에 이어 진짜 직원이 되어 병원에 발을 들이는 지금은, 그 여자에게 알콜성 간경변이나 조현병 등이 있던 게 아닐까 싶다. 이상하거나 미친 게 아니라 아팠던 거 아닌가, 하고.
섬망의 밤이었다. 돌비 서라운드로 펼쳐지는 남녀 혼성의 괴성 아카펠라. 이 방에서 으어어어어, 어어어어으어, 하면 저 방에서 엄마아아아, 어음마아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 담도배액관을 쌍으로 꽂은 60대 남자는 교양있는 척 인상을 잔뜩 쓰고 나와 무식한 컴플레인을 했다. 저런 걸 입원시켰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이건 환자를 위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내가 시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고.. 잠을 못 자잖아요. 환자분, 저런 거라는 건 혹시 뭘 말씀하시는 걸까요, 묻고 싶었다. 뒤통수에서 그 머리 빈 담당이 죄송하다며 뭐라 중언부언 떠드는 거 말고 그것만 머리에 남았다. 죄송? 니가 죄송하다고를 왜 해? 뭐가 죄송한데?
약물 용량은 끊임없이 바꿔야 하고, 누구 교수의 부친이자 어디 기업 뭐라고 했던 할아버지는 그냥 투석이 시급한 단백질 덩이가 된 채로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없는 힘까지 잔뜩 주는 통에 혈압은 계속 200에 98 같은 숫자나 뜨고. 거기다 갑자기 혈당 널뛰는 이 아저씨까지 추가. 열이 받아, 안 받아. 벽두부터. 이래서 새해고 나발이고 의미가 없는 거였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모르는 인간들, 진짜 기능이 저 멀리로 가 버려서 망한 사람, 새해 복은 무슨, 고개를 휙 돌려 그쪽으로 눈부터 부라리고 싶은 걸 참았다. 인생 왜 이 모양일까. 뭐가 미안해, 저 환자의 존재? 아, 알지. 근데 굳이 해야 하냐고, 하나마나한 그런 말.
어제보다 바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일이니까. 나도 휴일 좋아. 일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좋아. 휴일에는 의사들도 안 나오고 검사실도 안 하고 혈관조영실도 수술실도 외래도 안 해. 할 게 없다고. 내일이 노는 날인 나이트. 하지만 사람 몸은 안 쉬지. 늘 꼴같잖았다. 사려 깊은 척하며 결국 본인 안위에 징징대는 인간들. 차라리 처음부터 직구로 말씀하시지. 옆 사람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 병실 바꿔달라, 그러면 될 걸 무슨 환자가 어쩌고.. 네, 그 옆에 분은 환자가 아닐까요? 더 중환이시고 그 분도 회복에 만전을 기하셔야 하는 상태라서요. 아. 지겹다. 지겨워. 이런 상상을 끊을 수 없는 나. 언제 크냐고. 뭔, 사춘기 중학생이야? 요새 중학생들 안 이럴걸?
결국 그는 다른 병실에서 잠을 청한 후 아침이 되어 짐을 다시 원래 병실로 돌려놔 달라는 조무사의 말에 핀트가 나가 사과를 요구했다. 편의를 봐줘요? 병원에서 편의를 봐준 거라고?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환자분, 그게 아니고.. 그러자 그는 손 한 쪽을 들었다. 아, 조용히 하라 이건가. 어제도 오늘도 아저씨들 물이 왜 이러나 싶었다. 어제는, 뭐, 이딴 병원이 다 있어, 안 해, 나가요! 아, 안 한대도? 하더니. 그럼 난 뭐, 뭐라 해? 네. 그럼 꺼지세요, 할 수도 없고. 꼴에 그러고 덧붙인다. 나는, 환자로서 응당.. 그 말에 기분이 상한 거예요, 편의를 봐줘? 병원 입장에서 좋은 거지. 2인실 비용 덜 받을 거 아니야, 병원 측이. 안 그래요?
지겨운 게임이었다. 병실 배정을 정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병실료는 똑같이.. 어쩌고, 로 이어질 언쟁도 뭣도 아닌 것. 내 쪽에 섰던 조무사가 말을 잘못 얹는 바람에 그는 내게 화를 냈고 정작 내 앞에 서 있던 그의 담당은 내가 쌈닭인 거라고 생각했는지, 의외로 영리하게 불똥을 피하려 한 건지 입을 꾹 닫고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는 정말 내게 사과를 원하는 것 같았다. 아, 제가 환자분께 그렇게 말씀드렸을까요? 진짜 그렇게 치사하게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떡하냐고.
본가 식탁에서 푸념을 잔뜩 했었다. 약제부 망할 놈들 죽어도 미안하단 소리 안 해. 지들이 잘못해놓고 그런다니까? 왜 그럴까? 왜긴, 그거 미안하다는 게 미안하다는 게 아냐.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건데, 그니까 너도 미안하다고 함부로 하지 마. 알겠냐? 어우, 가시나 순진해가지고. 죽어도, 죽어도 미안하다고 하기 싫었다. 그리고, 담당인 쟤도 닥치고 있는데 내가 왜? 야, 너 뭐하냐? 니 환자 아냐? 하고 싶은 걸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노래. 오아시스의 톡투나잇. 한 해가 그 곡대로 흘러갈 거라는 미신. 그럼 빌 에반스의 하우스 이즈 낫 홈인가. 진짜 그랬으면? 안 바빴으면 나도 했을 거다. 선생님은 뭐 들으셨어요? 왕부자 되는 노래나 찾아야겠다, 하면서. 근데 아니잖아. 연예인들이 시상식에서 모여서 뭐라 떠들고 세상이 밖에서 카운트다운을 뭐 얼마나 뻑적지근하게 하고 있든 무슨 상관인데, 뭐가 달라? 너랑 난 일하는 중이잖아. 병원에 처박혀서. 너보다 배는 많은 환자 보느라 열 받아 있는 게 이 새해 벽두인데 노래는 얼어죽을.
노엘이 리암과 밴드를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 호텔인가 어디 박혀서 작곡했던 거라고 했나, 아니면 그 때 만나던 여자랑 뭔가 잘 안 돼서 만든 거라고 했나. 모르겠고, 일이 한 텀 정리된 후의 병실 간접등처럼 누렇고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 콘서트에서 그 곡이 나올 때는 그래도 소리가 안 찢어져서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다음날 집에 와서 녹음본 듣다 그 파트 나오자마자 방구석에서 빽 소리질렀는데, 좋아서. 좌우간 새해라고 의미를 덧씌우려 하면 할수록 별로였다. 별로. 진짜 별로.
내가 오프인데 병동에서 그 때 그 환자가 그래서 컴플레인 했다는데요, 하고 말이 돌고 돌아 며칠 후 수선생님이, 누구쌤, 나 좀 볼까. 하는 건 더 별로. 그래서, 했다. 사과. 누구님, 커튼 좀 열어도 될까요? 네. 제가 아까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린 건 아니었지만, 기분을 상하게.. 어쩌고. 지겹다. 진짜. 이러느니 그냥 니카디핀 환자 다섯을 보겠어. 그리고 그는 과연 신사 워너비답게 손을 다시 들어서 느물거리는 웃음을 짓고서는 베개를 갖다 달라고 했다. 이게, 좀 높네? 하면서. 그것도 일이다. 내 일, 돈 받고 하는 직업.
피자와 호두과자와 쿠크다스 오레오 미니약과 등등 각종 아름다운 당 덩어리들. 뭔 평가에서 매번 상위권이라는 이 병동에 들어온 지 두 달 끝. 이런 단체 간식이 흔한 부자 병동이다. 나 소아과에서 보호자 응대 지겹게 한 거 아닌가, 왜 이 모양일까. 왜 이런 게 이렇게까지 싫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박박 긁히며 성질을 감추려 노력해야 할까. 언제쯤 좀 우아하고 단단하게 일할 수 있을까.
아침 여덟 시. 도미노피자 네 쪽을 다 먹고 쿠크다스를 도합 여덟 개 먹고서 할 생각은 아니긴 해. 그렇게 먹은 사람에게 멋진 삶은 없다. 없어. 없는 게 맞아.. 하려다 이 발상 자체가 안 멋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궁금할 수는 있지.
집에 가야 하는데 못 갈 것 같았다. 스타킹 벗을 기운도 없었다. 이는 30분 전에 닦아 놓고선 보이는 대로 과자를 뜯고 다 식은 피자를 먹었다. 탁자에 잔뜩 쌓인 봉지를 보고 조무사들은 내가 데이번인 줄 아는 것 같았다.
새해 복 많이 받어, 쌤. 하고서. 네, 선생님도요. 하하. 해피 뉴 이어? 링크를 잘못 누른 인스타. 동기의 일본여행 사진. 그래. 나도 이런 걸 좀 꿈꿔야 하는 거 아닌가. 몽골 대만 가서 거지꼴로 돌아다니겠다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빅픽처 말고 그냥 이런 거. 새하얀 눈밭에서 남자친구가 찍어 주는 인생샷 같은 거. 청춘이다, 야. 내 인생은 언제 멋져지지? 저런 걸 찍어 주는 사람을 사귀게 되면? 근데 피사체가 다르잖아. 음. 거기다 헤어지면 다 지워야 돼. 그래. 근데 그런 게 아냐. 왜 이렇게 됐지? 진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나는?
29살의 아침. 뭐 달라? 여덟 시간 전엔 그냥 빡친 스물여덟 노동자였고 이 아침에도 그렇다. 개춥다. 개추운 정초 아침. 안 멋진 나. 흔하디 흔한 환자 응대와 안 맞는 직장 동료 하나를 못 삼키고 이렇게 곱씹는 사람은 멋질 수가 없다. 이번 생은 틀렸을지도. 새해 할 일. 있어. 있긴 있다. 목 가벼운 인간 되기. 멋진 게 뭘까?거기서 할 말 다 하는 거? 아니잖아. 그건 그냥 사회부적응자의 망상이잖아. 안 그래? 그치? 그래.
앞으로는, 그 무엇에도 날을 세우지 않고 꼬박꼬박 고개를 숙이는 인간이 될 것이다. 일할 때의 나와 퇴근해서의 나를 위해. 몹시 피곤하다고. 내가 충분히 어떤 사람이었나 곱씹고 또 씹는 거. 병원, 아무튼 출근해서 일을 하면. 정말 가끔은 매일매일이 성장통인 것 같다.
말이 좋아 성장통이지. 끝물 사춘기 못된 성질을 못 참는 어린애인 걸 매번 확인받는 기분이다.
난 언제쯤 고요하게 일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될 것이다. 바라고 바라면 닮게 된다고 한다.
그 모습을. 나도 그렇게 될 거야.
언제, 어떻게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햇수로 5년짼데. 언제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