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반한 시간 셋 하나 넷

어디야 지금 바빠?

by 이븐도





아 내가 널 좀 사랑해.

그렇지 않고서야.






가까워지고 싶은 이성이 있으면 놀이공원을 함께 가라는 조언이 있다. 잔뜩 흔들거리고 쿵쾅거리는 걸 탈 때 움직이는 마음을 서로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고. 흔들다리 효과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후들후들 효과? 후들후들까진 아닌데 비슷하다. 내가 일하다 이런 걸 느끼게 될 줄이야.


양 손을 다 채우고도 남은 뭐 같은 선임동기후임검사실직원의사등등.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은 늘 존재했다. 언제나, 띠꺼운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지. 당연히 여자 아니면 남자였다. 그래서 낯설다. 이런 유형은 또 처음이라서.





공포영화는 내게 둘로 나뉜다. 살이 터지고 피와 내장이 튀는 것, 희부연 물체 또는 영혼이 튀어나와 주인공과 영화 밖의 나를 괴롭히는 것. 언제나 후자를 더 무서워했다. 어느 종류도 좋아한 적 없지만 더 싫은 걸 굳이 꼽자면 후자.


전자는 치우면 된다. 내 몸도 저렇게 찢기고 짓이겨진다면 똑같을 테니 받아들일 수 있다. 무서워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령과 귀신과 전설은 스스로에게도 납득시키기 힘든걸. 눈을 감고 귀를 닫아도 내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걸 어떡해. 친구에게도 엄마아빠에게도 설명하기 어렵다. 어릴 때야, 그러면 아빠 나 무서워 하고 엄마아빠 사이에 낑겨 자면 됐다. 약간 짜증을 내는 것 같은 엄마와 내쉬는 숨마저도 피곤한 것 같은 아빠 옆에서. 그래도 무서웠다.

엄마아빠 곁에 있다 해도 침대 밑 괴물이 사라지지는 않았잖아. 커튼 사이에 스며 있다는 영혼이 저 방 변기에 있는지 시계 뒤에 숨어 있는지는 모르잖아. 그건 새벽 두 시, 세 시, 네 시를 지나서도 내 쪼끄만 머릿속에 둥둥 떠 있는걸.






그는 자상한 사람이다. 병동의 릴레이 칭찬 보드에 그렇게 쓰여 있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 함께. 아마 못해도 7, 8년 전에는 찍었을 사진. A쌤은 언제나 친절하고 자상한 어쩌고로 저쩌고를.. 그리고는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그를 칭찬해야 했던 사람은 그를 그렇게 썼다. 전체인계 시간마다 그 벽보를 한 번씩은 멍청히 쳐다보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붙은 메모의 문장은 그렇다.


병동에 남자 간호사가 셋 있다. 나는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가슴이 그렇게 뛸 리가 없어서. 같은 복도에 있기만 해도 몸에 힘이 엄청 들어간다. 누굴 마지막으로 좋아해 본 게 언제더라. 그 때도 그랬나? 아무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누굴 보고 좀 설렐 수도 있지. 이유는 나조차 모르겠지만 그럴 수 있지.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뀌면 한 번씩은 좋아하는 애가 있던 것처럼. 나중엔 얼굴도 안 떠올라도 한두 번은 오 멋지당 싶은 직원들이 있던 것처럼.





그가 담당하는 병실은 내가 보는 병실보다 더 뒤쪽에 있다. 그를 빼고 못 해도 열 명은 내가 보는 병실보다 뒤쪽의 병실을 본다. 그리고 그는 내가 보는 병실을 지나갈 때마다 그 병실을 쳐다본다. 독보적이다. 안 보는 척하지만 다 보인다. 일하다 보면 발소리를 구분하게 된다. 차지 선생님, 수선생, 누구 사원님, 누구 조무사님, 아니면 어떤 교수 등등. 그는 꽤 두꺼운 크록스를 신는다. 그 발소리도 알아듣게 됐다. 그래야 피하니까.


내가 커튼을 걷고 할 일을 하고 나와 다시 병실 한가운데로 갈 때 그가 지나간다. 이 쪽을 빤히 보면서.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안 본 것처럼. 항상 그렇게 지나간다. 나는 내가 그걸 의식하는 것조차 그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아. 남자친구가 있던 게 꽤 오래 전이라 또래 누굴 마주치기만 해도 건덕지를 만들고 싶구나, 하고. 그 전에는?

그를 향해 일부러 손을 들고 물었다. 어, 선생님. 혹시 뭐 말씀하실.. 그러나 그는 늘 내가 그 문장을 다 뱉기도 전에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그러면 불쾌감보다 먼저 떠오르는 생각. 내가 착각했구나. 이쪽을 본 게 아니구나. 그렇구나.





나는 이 곳에서 일하면서 의도치 않게 울거나 울 것 같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쪽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탈의실이나 화장실을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향할 때가 있었다. 나이트 때면 지겹게도 까였다. 이건 왜 이렇게 해요? 이걸 아직 몰라요? 확인 안 해요? 뭐, 나이트 때뿐인가. 선생님, 잠깐 나와 보세요, 하는 메신저가 오면 언제든 또 시작.


이거 왜 아직 안 해요? 이거 왜 여기다 갖다 놔요? 보긴 하세요? 아니. 왜.. 왜 안 봐요? 왜 안 까봐요? 나는 나를 객체로만 만들고 싶지 않은데 그 상황이 그렇다. 아, 네네. 아. 이건 아직.. 아. 네넵. 알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네. 선생님. 와보세요. 앗, 네네. 넵. 등등. 인간들이 하도 많아서 같은 사람들과 안 마주칠 것 같지만 지겹도록 마주친다. 인계 전이나 후, 같은 근무 시간. 아니면 또또 같은 근무 시간. 환자한테 까이거나 그들에게 까이거나. 그는 나를 그렇게 족치는 인간 중 하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고 하기도 그렇다. 공교롭게도 늘 그 자리에 있긴 했어서.






그가 차지를 보는 날이 싫었다. 싫다고 생각하게 됐다. 분명 나이트 때 중증도가 높은 환자가 한 팀에 몰리면 환자를 좀 찢어서 배정하는데 그 날은 그러질 않았다. 다음날에는 내가 그 팀을 보는 날이 아니었다. 바뀌어 있었다. 열이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따질 것도 아니고. 왜 어제는 이 분들 다 제가 봤는데 오늘은 아니예요? 라고 해, 그럼? 어떻게 그래. 그걸 나 때문이라고 하기도 웃기다. 그냥 잊어버렸거나 귀찮았던 것일 테니까.


데이. 안 바빴던 데이. 보통 전동은 두 시 전에는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인계시간에 안 걸리니까. 전동을 보내는 병동도 받는 병동도 그게 편하다. 그가 내게 메신저를 보낸 건 한 시 오십 분쯤. 인계장 정리는 되고 있어요? 새로고침하니 보이는 낯선 환자. 외래든 응급실든 입원도 별로 없던 날. 내내 널널했던 것 같은 오전. 할 수 있는 게 있나. 아, 제가 지금 확인했습니다. 얼른 정리할게요. 네네. 데이 때 받을까봐요.

데이? 데이. 오십 분 남은 데이 근무. 막상 까보니 그쪽 병동에서는 오전부터 보내려고 했던 사람. 생판 모르는 환자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정리하고 물품을 받고 자리를 준비하고 오더를 요청하기. 열받았지만 열받을 수 없었다. 바빴겠지. 아마도. 내가 이미 안다고 생각했겠지.




두 시 반쯤이 지나 그가 다시 메신저를 보냈다. 전동은 이브닝 때로 넘어가나요? 아니요. 데이 때 오실 겁니다. 그래요? 애매한데.. 그리고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바빠서. 바쁜 머리와 몸 뒤로 생각했다. 애매? 그럼 니가 받던가. 아니면 제때 알려줬어야지. 뭐 하는 새끼야, 진짜?






환자는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게 만들었다. 밤새 약을 맞을 때 아무 일이 없었는데 왜 본인의 귀중한 시간을 입원에 다 써야 하냐는 거였다. 금번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구요. 그러니까 외래에서 맞겠다는데 왜 병원 의견을 환자한테 강요합니까? 이런 병원에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 합니까? 환자한테도 권리가 있어요. 누구님, 그게 저희가 억지로 필요도 없는 절차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해서 투약은 외래보다는 병동에서 진행해야.. 아니이. 그러니까.

요 밤에 아무 일이 없었잖아. 안 그래요? 멀쩡하잖아요? 당신 같으면, 그 아까운 시간을 써서 하루종일, 이틀 내내를 병원에서 버리고 싶어요? 시간의 가치라는 게 있잖아. 내 말이 옳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번에는.. 이번 투약 때는 그러시긴 했는데.. 어쩌고.




그리고 차지를 보던 그가 등장했다. 마약장 열쇠를 짤랑이면서. 내가 들었던 이야기와 내가 했던 이야기가 똑같이 펼쳐졌다. 그래도 그는 남자였고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어쩌면 그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상대적으로 더 경청하는 척을 잘했다. 아니지. 경청했겠지.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게 프로구나. 그렇죠,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서운하시죠, 그런데 그게 저희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맞습니다. 네네. 아아. 그러셨군요. 무조건 병원 입장만을 말하지도 않았고 적당한 때에 징징거림을 이끌어낼 줄도 알았고 그 너절한 반복에 더 따뜻한 맞장구를 칠 줄도 알았다.


술기와 액팅은 애초부터 잘하는 인간들이 있긴 했지만 환자 응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느꼈다. 이 새낀 절대 둔하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말도 잘했고 시선처리는 더할 나위 없었지만 그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눈에 보이나? 안 보이지. 안 보이는데도 우스울 정도로 공허한 광경. 조악한 연극을 보는 것처럼 웃음이 났다. 나는 진짜 그래서 웃음을 참았다. 엄숙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당황스러워서.






어떤 상황에서도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는 좀 과장인가? 하지만 맞을걸? 굳이 그의 성별을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으나 그 행태를 이해하려면 어떤 단서라도 잡아야 했다. 어떤 뭣 같은 여자 선임들도 인사는 받았다. 고개를 까딱한다든가,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을 짓거나, 어쨌거나 니 행동을 봤다는 사인이라도 대충 보내거나. 그게 의사소통이니까. 의사소통은 명확하고 효율적이어야 하니까.

그래서 병동에서는, 누군가 복도에서 내 쪽을 보며 오면 먼저 말을 걸거나 물꼬를 미리 튼다. 의사든 직원이든 보호자든 같은 동료든 그게 불문율이자 이곳에서의 방식이었다. 안 탈 버스가 지나가면 굳이 고개를 숙이거나 딴 델 쳐다보는 것처럼.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흔들거나, 저 멀리서라도 내게 용건을 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웃기라도 하면서 지나갔다. 가끔은, 밥은 먹었어요? 하고. 그러나 그는 나를 끊임없이 쳐다보면서도 아닌 척했고 내가 어떤 '하실 말씀'이 있느냐는 의사를 전하면 그 신호 자체를 개무시했다. 열받았다. 그것만큼 사람을 바보 만드는 게 없어서. 그렇다고 쌩깔 수도 없고.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넵. 네. 네네. 죄송합니다. 등등.


어릴 때의 유령이나 커튼 괴물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는 기분. 누구한테 말하자니 나만 이상해지는 느낌. 왜? 그 선생님 자상하잖아. 친절하잖아. 쳐다봐? 아. 뭐 하나 보는 거지. 그렇지. 감시해야지. 근무자들 다 모인 전체인계 때도? 다른 애랑 인계하는 교대 시간에도? 수선생에 교수에 주치의까지 다 있는 회진 시간에도? 그래. 뉴비니까, 맨날 까이는 뉴비.





어쩌다 가까이, 뭐 한 반경 5미터쯤 있게 되면 몸이 굳었다. 내가 좋아하나보다 생각할 수밖에. 구태여 내가 다 채워 놓은 쪽의 한가운데 물건을 가져가고, 도움은 주더라도 말은 다 씹고, 그러면서 기록으로 남는 모든 문장은 친절했다. 내가 이상한가? 내가 이상했다. 그는 하늘 같은 선배였고 이 병동에서 실제 평판이 어떤지는 나는 알 길이 없었으며 그런 가십을 떠들 만큼 친한 사람도 없었다. 뭐라고 말해. 자꾸 쳐다본다고? 환자 배정하고도 안 알려준다고? 다 해 놓은 일을 한 번 더 하게 만든다고? 몰랐겠지. 못 봤겠지. 그냥 가다가 본 거겠지.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잔뜩. 그것도 내 관점의 심증만. 나조차도 못 믿는 것들.


열받았다. 머리에서 떼어낼 수가 없어서. 그런데, 좋아하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나? 나는 그가 무서웠다. 왜 무서운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심박의 상승은 호감과는 달랐다. 눈에 안 보이면 편했고 오늘은 절대 출근하지 않았다는 걸 퇴근이 임박해 알게 되면 마음이 가벼웠다. 언제 이렇게 사람이 무서웠지? 나는 보이스피싱범에게도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했었는데. 그러게.






그가 또 복도를 지나가면서 아닌 척 이쪽을 잔뜩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근무 중, 내 어떤 인사에도 대답하지 않는 퇴근 후. 그는 내 머릿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남사스럽고 또 막상 이야기하기에는 싱겁기만 해서 누구에게도 알리기 뭐한 화젯거리. 뭐가 문제인지를 몰랐고 내가 아는 공식을 대입할 수 있는 건지는 더 모르겠어서 머리가 아팠다.


음. 내가 니 눈에 좀 이쁘니, 내가 니네 사번에게 엄청난 폐급으로 까이니, 질질 짜는 멍청이로 오르내리니, 아니면 눈이 그 쪽으로밖에 안 돌아가니. 등등. 어떤 가설을 갖다 붙여도 결론은 늘 하나였다. 뭐 하는 새끼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답 없는 결론을 밀어놓고 출근한 병동? 또 앉아 있는 그 인간. 뭘 얼마나 했다고 이렇게 지긋지긋해졌을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무섭다. 정말 처음이라 알 수 없다.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라.





난 어떤 상황에서도 방법을 찾아냈던 것 같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래서 열받는다. 어차피 사람 속은 모르는 건데 이렇게 신경이 쓰여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도, 그렇게까지 튀어서도 절대 아닐 이 상황. 그렇다고 나를 객체로만 설정하기엔 더 열받는 시추에이션. 그럼 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서 그냥 결론을 내린다.

병신새끼. 싸이코패스 나르시시스트.

정말 그밖에는 없다. 뭐 어때? 다 내 착각이잖아. 내 착각 속의 그대. 실제로 그가 어떤 머저리건 고단수건 아니면 차원을 넘어 둔한 인간이건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어차피 멍청한 개복치 후배일 뿐인데.

그 병신의 입력값이 1이든 100이든 내 아웃풋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앗. 넵. 선생님. 혹시.. 아아. 넵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인걸? 맞잖아.


하. 밥 벌어먹기 힘들다. 뭔 변수가 이렇게 끝이 없을까.

근거도 없는 걸 이렇게 분석하고 있는 게 현타가 온다.




그러니 한 번 더 써야지.


븅신.

모자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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