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속 수천 개의 빛깔 Chapter 1
캔버스 위로 오일이 묻은 붓을 들고 선 마크 로스코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마 추상적인 감정의 흐름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영혼 밑바닥에 거친 밤바다처럼 꿈틀대는 절망과 외로움과 우울의 감정들은 어둠 속에 고개를 숙인 파랑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크 로스코가 산 1903년에서 1970년의 삶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사람들은 인간이란 존재를 잊어가고 절망 속에서 바위의 얼굴과 마음을 머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연기 속을 해치며 뛰다가 스물의 찰나로 죽어갔을 것이고 누구는 그 스물의 기억을 평생 마음에 간직한 채 심장을 그러쥐었을 것이다. 마크 로스코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이민이란 또 다른 칼날 위를 걸었다. 차별과 공포와 죽음과 기억의 아픔. 대기는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마크 로스코의 심장에 빨강이 보였다. 그 빨강은 어떻게 불꽃을 짚였을까?
마크 로스코의 심장 속에는 부서진 파편들을 바리케이드처럼 새워놓은 중앙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 깨어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집이기도 하고 살려는 의지로 타오르는 불빛이기도 한 그 무언가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빨강에서는 살겠다 다짐하는 가장 경건하고 인간다운 목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해서든 이 땅을 딛고 서있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목소리의 고요한 고함이 캔버스 위에 불을 짚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죽음의 전장 속에만 고함치지 않는다. 우울의 파란 수평선 위에서도 고함칠 수 있어야 한다. 그 고함이 수평선 위로 타올라 추위를 걷어내고 목을 조르는 물살을 내쫓을 거의 유일한 것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희미하다. 위대한 이유도 없고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우린 이기적이고 볼품없고 추악한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영혼 속 가장 경건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경건함을 마음에 품으라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름답게 사는 것, 높이 솟아오르면서 절정까지 날아오르는 것, 나 자신에게, 또 누군가에게 고함이 되는 것. 살겠다는 것은 그 다짐만으로 아름답다. 그 형용할 수 없고 정확한 물체들의 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함의 빛을 마크 로스코는 색으로 담았고 그 원초적인 색 아래에서 사람들은 위로와 감명을 받았다.
마크 로스코는 1970년의 겨울 아침에 맨해튼 작업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면도날로 양팔 동맥을 끊은 채였다. 유서 한 장 없었고 남은 것은 피바다 속에 앉아있는 그의 몸뚱이뿐이었다. 그의 지인들은 일제히 타살을 주장했다. 그의 죽음 이후, 딸들에겐 작품 한 점 돌아가지 않았고 798점의 작품들이 모두 말보로 갤러리에 싼값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타살은 더욱 힘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다. 지인들과 그림들의 상황으로 봐서는 타살이 타당하지만 마크 로스코가 우울증 또한 가지고 있었다는 것 밖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자살을 했더라도 나는 무제 No.14에서 느껴진 살고자 하는 마크 로스코의 외침은 그의 가장 진실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울의 수평선은 밀물과 썰물의 흐름으로 끊임없이 바뀐다. 물의 온도와 물살과 그것이 비추는 하늘의 색감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섬세하게 바뀐다. 그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기억할 수 있다면, 하늘을 바라보고 꼿꼿이 서서 익사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수면 위에 얼굴을 내놓을 힘이 있다면 우리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를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