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장례식장에서 웃었습니다. 제가 이상한가요?
1975년 봄. 22살,
나는 제천 시내 작은 양장점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손끝이 야무지고 얼굴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던 터라 중매 제안이 꽤 들어왔다.
"명희야, 저 남자 괜찮다. 공무원이고, 성실하대. 술도 안 한다던데?"
그렇게 맞선을 봤다.
남편, 아니 그때는 '그 남자'는 키가 크고 인상이 온화했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다방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 때, 그가 말했다.
"명희 씨, 나는 평생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힘든 일 없이, 편하게 살게 해줄게요."
그 말이 정말로 달콤했다.
그시절 양장점에서 매일 밤 11시까지 일하던 내게, '편하게 산다'는 말은 꿈같은 소리였다. 하루 종일 재봉틀 페달을 밟으면 종아리가 퉁퉁 부어 있던 시절이었다. 밤이면 침대에 쓰러져 정신없이 잠들었다.
그런 내게 그는 '쉴 수 있는 삶'을 약속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결혼식은 간소했다. 제천 읍내 작은 예식장에서 하객 50명 남짓 모여서 절 한 번 하고, 밥 한 끼 먹고 끝이었다. 신혼여행도 없었다.
"우리 돈 아껴서 집부터 마련하자."
남편의 말이 참 현실적이고 좋다고 생각했다. 그땐 정말 그랬다. 이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믿음직하구나 싶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생활이 시작됐다.
처음 1년은 괜찮았다.
남편은 아침마다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했고, 나는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며 문 앞까지 배웅했다.
저녁 식탁에서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오늘 반찬 맛있네, 명희야."
"그래요? 다행이다. 내일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그런 평범한 일상이 좋았다.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 2년차,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남편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식이라며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고, 늘 술 냄새가 배어 집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회사 생활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그게 일주일에 한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결국엔 거의 매일이 됐다.
그리고 결혼 3년차.
"명희야, 우리 부모님 모시고 살아야지. 그게 도리 아니겠나?"
남편의 말은 상의가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나는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결혼 전 시댁을 방문했을 때, 그 넓고 깨끗한 집을 떠올렸다. 시어머니는 그때 분명히 말했었다.
"우린 네가 신경 쓸 일 없어. 우리 살 집은 아마 있으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예요? 어머님 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겼어요?"
남편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부모님께서 지금 좀 어려운 상황이셔서."
알고 보니 시댁은 엄청난 빚을 졌다. 시부모님은 살던 집을 헐값에 처분했고, 미리 사둔 땅을 팔 때까지만 임시로 신세를 지겠다고 했다. 금방 팔릴거라 했다. 빠르면 올해. 늦어도 2년.
나는 대답도 못 했다. 그냥 "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좁은 우리집에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둘, 남편의 미혼인 남동생까지 총 7명이 함께 살게 됐다.
그날부터 내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됐다.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세 가지 차리고, 시아버지 수저 놓고, 시어머니 물 떠드리고, 남편 출근 챙기고, 동서들 아침 먹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점심 장보고, 또 저녁 준비하고…
숨 쉴 틈이 없었다.
그 와중에 아기가 생겼다.
집안일을 하며 아기를 보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재봉틀만 돌렸었지, 집안일은 해본 적 없던터라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엄마였고, 아내였고, 며느리였다.
나는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했다. 그것이 내가 내 삶을 지탱해나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책임감.
'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야.'
손은 늘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담겨 있었고, 허리는 늘 굽어 있었고, 무릎은 늘 시려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기에.
부모님이 어릴 적부터 중요하게 여기신 책임감.
이 빌어먹을 책임감 때문에...
사실 허리가 굽었어도, 손이 갈라져서 피가 나고, 손목과 무릎이 시려오는 신체적인 변화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남편의 변화였다.
남편은 점점 달라졌다.
처음엔 술만 마시고 들어왔다. 그러다 짜증을 냈다. 그러다 화를 내기 시작했다.
"명희야! 밥이 이게 뭐야? 너무 짠데 이 걸 먹어라고?"
"여보, 죄송해요. 다음엔 조심할게요."
"조심? 조심을 몇 번을 해? 너는 도대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쾅!
밥상이 뒤집어졌다.
김치찌개가 벽에 튀었다. 밥알이 마룻바닥에 쏟아졌다. 반찬 그릇들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무릎을 꿇고 밥알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손이 떨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소리 내 울 수 없었다. 시댁 식구들이 다 듣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시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셨다. 시어머니 말이 더 미웠다.
"명희야, 네가 음식을 좀 정성껏 해야지. 아들이 밖에서 얼마나 고생하는데."
그날 밤, 아이를 재우고 나서 화장실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뭘 얼마나 더 노력해야하는걸까?'
거울 속 내 얼굴을 봤다. 25살인데 40대처럼 보였다. 눈 밑이 퀭하게 꺼지고, 입가에 주름이 생겼다. 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저게 나야? 정말?'
결혼 5년차였다. 셋째를 낳고 얼마 안 됐을 때. 집에 갑자기 낯선 남자 두 명이 찾아왔다.
"김명희 씨 맞죠? 카드빚 3천만 원 언제 갚으실 건가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3천만 원?
그게 무슨 돈인가? 남편은 매달 월급을 고스란히 생활비로 준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절반도 안 주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 도박으로 날려버렸다.
그날 저녁, 남편과 처음으로 싸웠다. 아니, 싸움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물었을 뿐이다.
"여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이런 빚을…"
"시끄러워!"
찰싹.
뺨을 맞았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부모님한테도 맞아본 적 없는데, 남편에게 뺨을 맞았다.
순간 귀에서 윙 소리가 났다. 눈앞이 하얘졌다. 뺨이 화끈거렸다.
"여자 주제에 감히 나한테 대들어? 내가 돈 벌어오는 거 당연한 줄 알아? 니가 벌어와 봐, 벌어와 봐!"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의 폭력은 일상이 됐다.
밥이 늦어도, 빨래가 안 됐어도, 그냥 기분이 안 좋아도 주먹이 날아왔다.
처음엔 뺨이었다. 나중엔 팔뚝, 허벅지, 등…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곳을 골라서 때렸다.
멍이 들었다. 보랏빛으로, 검푸르게. 여름에도 긴팔을 입었다. 목욕탕도 못 갔다.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명희 씨는 좋겠어. 남편이 공무원이잖아. 월급 꼬박꼬박 나오고 연금도 나올 거고."
"우리 남편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명희 씨 남편은 정년까지 보장되니 얼마나 안정적이야."
"아이고, 복 터졌어, 복 터졌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어야 했다.
"호호, 그러게요. 감사하죠."
그런데 속으론 울고 있었다.
'복이라고? 이게 복이라고?'
공무원 월급이 뭐 대단한가. 그 월급의 절반은 남편이 술값, 카드빚으로 쓰고, 나머지 절반으로 10명이 먹고살았다. 나는 명절에도 새 옷 한 벌 못 사 입었다. 아이들 옷은 언니네 조카가 입던 걸 물려받았다. 내 옷은 10년 된 걸 기워 입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명희 씨는 남편 잘 만났어" 하고 말했다.
그 말이 칼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시누이들.
"올케, 우리 오빠가 술 좀 마시고 그래도, 그래도 바람은 안 피우잖아. 요즘 남자들 다 바람피는 세상인데, 그 정도면 양반이지."
"올케, 오빠가 손찌검 좀 해도 밖에서는 가장 노릇 하잖아. 참아야지, 뭐."
참으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참았다.
'그래, 바람은 안 피우니까 다행이지. 그 정도면 괜찮은 거겠지.'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누이 큰언니가 내 멍든 팔뚝을 보고도 이렇게 말했다.
"올케, 너도 오빠 화나게 하지 말고 좀 조심히 살아. 남자가 화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 사람들은 평생 내 편이 아니구나.'
더 가슴 아픈 건 아이들이었다.
큰아들은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닮아갔다. 말투도, 행동도, 화내는 방식도. 내가 밥을 늦게 차리면 "엄마, 밥도 제때 못 해?" 하고 짜증을 냈다.
둘째 딸은 조용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더 무서웠다. 내가 남편한테 맞는 걸 봐도, 그냥 방문을 닫고 공부하는 척했다. 한 번도 "엄마, 괜찮아요?"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셋째 막내아들은 어렸을 때는 내 편이었다. "아빠, 엄마한테 왜 그래!" 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 아이도 고등학생이 되니까 달라졌다.
"엄마, 엄마도 좀 참지. 아빠가 밖에서 돈 벌어오는데, 집에서까지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아, 내 아이들마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날 밤, 베란다에 나가 별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겠구나.'
어느 날, 화장실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거울 속에 낯선 여자가 있었다.
눈 밑은 퀭하게 꺼지고, 머리는 반이 하얗게 세고, 입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허리는 새우처럼 굽어 있었고, 손은 마치 80대 노인의 손처럼 거칠었다.
나는 이제52살이었다. 그런데 70살처럼 보였다.
'저게 나야? 정말?'
나는 거울을 보며 울었다.
'나는 어디로 갔을까?
스물두 살에 양장점에서 재봉틀 돌리던 그 예쁘고 씩씩했던 명희는 어디로 갔을까?'
남편의 아내로, 시댁의 며느리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면서, '김명희'라는 사람은 증발해버렸다. 그 자리엔 그냥 '누군가의 무엇'만 남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도 말했다.
"너는 평생 내 밥이나 차려주는 게 어울려. 그게 네 팔자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설거지를 했다. 눈물이 설거지통에 똑똑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숨 쉬듯 맞고, 숨 쉬듯 참고, 숨 쉬듯 살았다.
내 인생에 기쁨이나 행복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버티는 것'만이 내 일상이었다.
가끔 친구들이 전화를 했다.
"명희야, 우리 여행 갈래? 설악산이라도 다녀오자."
"아, 미안해. 나 바빠서 못 갈 것 같아."
거짓말이었다. 바쁜 게 아니었다. 남편이 허락을 안 했다.
"여자가 무슨 여행이야. 집이나 잘 지켜."
그래서 평생 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영화도, 콘서트도, 맛집도, 쇼핑도,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집과 마트와 병원, 이 세 곳만 오가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심장은 뛰는데 영혼은 죽어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2023년 10월 어느 날, 장을 보러 시장에 나가 있었다.
고등어를 고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명희 씨 맞으시죠? 남편 분이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오세요."
고등어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담담했다.
'드디어 끝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끔찍하다. 남편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산소호흡기를 끼고, 온몸에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뇌출혈이 심합니다. 아마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울었다. 큰아들은 "아빠!" 하고 소리쳤고, 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막내아들은 아버지 손을 잡고 "아빠, 정신 차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그냥 창밖을 봤다.
10월의 하늘은 참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더라.
그 하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40년 동안, 저 하늘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구나.'
밤 11시 47분.
남편은 숨을 거뒀다.
심장박동 소리가 '삐—' 하고 길게 울렸고, 의사가 "임종하셨습니다" 하고 선언했다.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시누이들이 달려와서 "오빠!" 하고 소리쳤다. 시어머니는 기절할 듯 쓰러졌다.
그런데 나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냥 '끝났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장례식은 3일장으로 치렀다. 제천 시내 큰 장례식장.
많은 사람들이 왔다. 남편 직장 동료들, 동네 이웃들, 친척들까지.
다들 말했다.
"좋은 분이셨는데…"
"성실하신 분이셨어."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하셨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런데 둘째 날 오후, 조문객이 끊긴 틈에 혼자 앉아 있을 때였다.
문득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왜 웃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제 저 사람 밥 안 차려도 되겠네.'
'이제 저 사람 눈치 안 봐도 되겠네.'
'이제 맞지 않아도 되겠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미소가 점점 커졌다.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는데, 소용없었다.
그때였다.
시누이 큰언니가 그 모습을 봤다.
"올케… 지금 웃고 있어?"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그냥…"
"지금 오빠 장례식인데, 웃어? 정신이 있어, 없어?"
그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돌아봤다. 나는 급히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내 얼굴에는 분명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왜 웃은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슬퍼야 하는데, 울어야 하는데, 웃음이 계속 나왔다.
장례식이 끝나고, 소문이 퍼졌다.
"명희 씨가 남편 장례식에서 웃었대."
"남편 죽었는데 웃었다니, 말이 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동네 슈퍼 사장님은 나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성당 신자들은 수군거렸다.
경로당 할머니들은 대놓고 말했다.
"명희 씨,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남편 장례식에서 웃다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제가 40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아세요? 매일 맞고, 참고, 죽은 듯 살았어요. 그래서 웃은 거예요. 드디어 해방됐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웃었을까?
사람들이 말하듯 내가 미쳤을까? 정신이 나갔을까? 비정한 사람일까?
아니다.
그날 나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감옥에서 풀려났다. 무거운 쇠사슬이 끊어졌다. 숨통이 트였다.
그래서 웃은 것이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40년 동안 참고 참았던 것들이, 그날 비로소 끝났다는 안도감.
그게 미소가 되어 나왔다. 그건 40년만에 진짜 나의 미소였다.
다음 이야기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낡은 사진 한 장 - 그 속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남편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