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며느리가 아니다

나를 위할수록, 가족들과 멀어졌다

by 오래피스 orapeace

안녕하세요, 김명희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시누이의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말씀드렸죠.

"저는 이제 며느리 안 할래요"라고 말하고요.


그날 저녁, 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번에는 큰시누이가 아니었어요.

작은시누이였습니다.



작은 시누이는 매섭게 말했다.

"올케, 정신 차려.

언니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오빠가 평생 너 먹여 살렸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시어머니 모시기 싫다고? 양심이 있어?"


양심? 40년 동안 맞으면서 살았는데, 40년 동안 무시당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와서 양심을 말한다고?


"오빠는 저를 먹여 살린 게 아니에요.

저도 이 가정을 위해 헌신했어요. 그러니까 서로 빚진 거 없어요."


전화기 너머로 큰시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줘 봐. 내가 말할게."


그리고 큰 시누이의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올케 잘들어, 지금 당장 집 빼고 작은 데로 이사 가.

오빠 재산, 다 유족 몫이지만 우리 엄마 몫도 있어.

그러니까 집은 팔아서 반반 나누고, 올케는 작은 빌라로 이사 가.

알겠어?"


'40년을 살았던 집을 팔라고?'


"언니, 이 집은 제 집이예요. 제 명의라구요. 그리고 집을 팔지도 않을거구요."

10년 전 세금 문제로 남편이 내 명의로 바꿔놨던 게 이렇게 구원이 될 줄이야.


"그래도 그 집 반은 우리 엄마 거야! 엄마가 오빠한테 해준 게 얼만데?

그리고 뭐 명의? 올케가 법을 지겠다고? 좋아, 그럼 우리도 변호사 선임할 거야!"

뚝, 전화가 끊겼다.


그날 밤, 큰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고모들한테 전화 왔었어요. 엄마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요?

아빠 돌아가시자마자 고모들한테 이렇게 막 대한다고요?"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누이들은 내 약점인 아들에게 일부러 말한 거였다.


"할머니는 혼자잖아요.

엄마가 맨날 집안일로 바쁠 때 저 챙겨준 게 누군지 아세요? 바로 할머니였어요!"


"아들아, 할머니는 고모들이 모시면 돼. 엄마는 이제 할머니와 고모들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럼 저희는요? 저 결혼할 동안만이라도 엄마 좀 참아주시면 안 돼요?"

"..."


한참을 침묵하다가 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빠는 이제 돌아가셨어. 엄마는 이제 며느리 안 할 거야. 엄마는 이제 명희야. 김명희."

"엄마, 정말 이기적이네요. 아빠가 평생 고생해서 집도 사주고,

엄마 일 한 번 안 하도록 편하게 살게 해줬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툭-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흔들렸다.

'내가 잘못한 걸까?'


아들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엄마, 정말 이기적이네요."


내가 정말 이기적인 걸까? 45년을 희생했는데, 이제 내 인생 살고 싶다는 게 이기적인 걸까?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기적이어도 괜찮아.

40년 동안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까.

이제는 이기적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이상했다. 나를 위한 선택을 할수록, 평생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다음 날 아침, 둘째 딸 혜연이가 찾아왔다. 울먹이는 얼굴로.

"엄마,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예요?"

"혜연아, 엄마가 변한 게 아니야. 엄마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딸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혜연아, 엄마는 40년 동안 너희 아빠한테 맞으면서 살았어.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어. 엄마를 때렸고, 무시했고, 다른 여자를 사랑했어."


혜연이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이야. 그러니까 이제라도 엄마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딸은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우리 아빠가요?"

"응."

"왜 말 안 하셨어요? 왜 이제야..."

"말해봤자 소용없었어. 너희 아빠는 이미 죽었고, 말하면 너희만 상처받을 것 같았어."


딸이 나를 안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 죄송해요.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도 눈물이 났다. "괜찮아.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그날 저녁, 막내아들이 찾아왔다. 의외로 웃고 있었다.

"엄마, 누나한테 다 들었어요. 엄마, 마음 고생 많으셨어요."

그 한마디에 또 눈물이 났다.

"엄마, 이제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고모들 할머니 신경 쓰지 말고요."


"그래도 될까?"

"네. 엄마도 행복할 자격 있어요. 평생 희생하셨잖아요."


막내아들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엄마, 저는 엄마 편이에요. 항상요."


그날, 깨달았다.

가족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일주일 후, 큰시누이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올케, 변호사랑 상담했어. 법적으로는 올케 말이 맞대. 집은 올케 명의니까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시누이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올케, 정말 이럴 거야? 우리 사돈 사이 아니야? 40년 동안 가족이었잖아."


'40년 동안 가족이었다고? 날 가족으로 대우한 적이 있었나?'


"언니, 40년 동안 언니가 저를 가족으로 대해준 적 있나요?

오빠가 저를 때릴 때, 언니는 뭐라고 했죠?

'올케가 오빠를 화나게 하지 말았어야지'라고 했잖아요."


"그건—"

"언니, 저는 40년 동안 충분히 가족 노릇 했어요. 이제는 됐어요. 어머니는 언니들이 모시세요. 저는 이제 제 인생 살 거예요."


"올케! 우리 오빠가 평생 너한테—"


"언니." 시누이의 말을 끊었다.

"오빠는 평생 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다른 여자를 사랑했죠. 그 사실, 언니는 아세요?"


침묵이 흘렀다.


"오빠가 평생 재희 씨를 사랑했다는 거, 언니는 몰랐죠?

"재희? 우리 사촌동생 재희 말하는 거야?"

"맞아요. 오빠는 재희 씨랑 45년 동안 만났어요. 저랑 결혼하고도 계속요."

"..."


시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언니, 이제 그만해요. 저한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이 가벼워졌다. 40년 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시댁과의 관계, 며느리라는 의무, 순종하는 아내라는 가면. 전부 다 내려놓았다.


나는 웃고 있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웃음.

"이제 시댁과는 정말 끝이야."


다음 날부터 집 정리를 시작했다.

남편의 물건들, 시댁에서 받은 물건들, 40년 동안 쌓인 것들. 큰 쓰레기봉투가 열 개도 넘게 나왔다.


10년, 15년 된 낡은 옷들.

'이제 새 옷 사 입어야지.'


낡은 신발들을 버리며 생각했다.

'이제 새 신발도 살거야.'


집이 점점 비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비워질수록 마음은 더 채워지는 것 같았다.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했다. 결혼식 사진. 스물둘의 나와 스물여섯의 남편.

나는 수줍게 웃고 있었고, 남편은 무표정이었다.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함께 살았지만 함께하지 않았던 45년.

같은 집에 있었지만 다른 곳을 바라봤던 그 시간.

남편도 행복하지 않았을 테고, 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미운 정도 정인가 봐. 그래도 45년을 함께 늙었으니까."

갑자기 남편의 인생이 불쌍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숨어 지내야 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불쌍했다. 사랑받지 못하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못했으니까.


정리가 끝나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로웠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따뜻한 햇살과 바람을 온 몸으로 느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며칠 후, 저는 복지관에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더니 수군거렸어요.

"저기 명희 씨 왔네., 장례식에서 웃었다는..."


그때 순자 언니가 다가왔습니다.

"명희야, 잘 지냈어?"

"응, 언니. 잘 지냈어."


순자 언니는 제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어요.

"명희야, 표정이 많이 좋아졌네."


저는 웃었습니다.

"맞아, 언니. 이제야 살아난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

저는 순자 언니에게 모든 걸 말했습니다.

남편의 비밀을, 시누이들과의 싸움을, 그리고 제 결심을.

순자 언니는 조용히 듣더니 제 손을 꽉 잡았어요.


"잘했어, 명희야. 이제 너를 위해 살아."

"응, 그럴 거야."


그날 밤, 공책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명희의 새로운 인생 계획>

집 정리 끝내기 ✓

시댁과 거리 두기 ✓

나를 위한 시간 갖기

하고 싶은 것 하기

제주도 여행 다녀오기

새 옷과 새 신발 사기

새로운 친구 만들기

웃으며 살기

취미 만들기

헬스장 다니기


하나하나 적다 보니 신기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다니.


일주일 후, 큰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미안해요. 혜연이한테 다 들었어요. 아빠가 바람피웠다는 이야기요...

제가 엄마 편을 들어줬어야 하는데. 저는 항상 아빠 편만 들었어요. 죄송해요 엄마.."


"그럴 수 있어 엄마는 이해해.

아빠가 장남이라고 우리 아들 얼마나 예뻐했는지 잘 알아. "


"엄마...."

큰아들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엄마, 이제라도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저도 엄마 응원할게요."


큰아들 말에 나는 울컥했다. "말이라도 고마워"


이제 나는 며느리가 아니다.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다. 나는 그냥 김명희다. 40년을 참고 견디며 살았던 한 여자. 그리고 이제, 이제라도 나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다.

이제라도 시작하면 된다. 나의 인생을. 나의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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