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포닥 사이
복직하고 3개월이 지나갔다. 칼퇴근 덕에 불붙은 실험 스킬은 나날이 발전을 했고,
연차가 오래되어 논문세미나쯤은 한 달 전이 아니라 3~4일 전에 발표자료 만듬과 동시에 논문을 쭉쭉 읽을 정도로 만렙을 찍게 되었다. 역시 집중과 선택의 힘은 위대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필자 스스로 내가 만렙을 찍었구나...라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지도 박사님이 드디어 하산을 명하였다.
드디어 졸업! 이 다가온 것이다.
졸업 준비 요건 역시 미리 채웠기에 큰 어려움 없이 디펜스 하겠노라 당당하게 학교에 신청서를 냈다.
논문 신청을 할 때 결정할 사항이 있었다.
학위논문을 국문으로 할지 영문으로 할지 결정해야 했다.
졸업을 앞둔 나에게 아주아주 큰 고민이 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일주일간의 고민 끝에 나는 영문으로 쓰는 것을 결정했다.
Native speaker도 아닌 주제에 건방지게 영문으로 학위논문을 쓰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꼭 영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꼭, 반드시 나는 영문으로 학위논문을 써야 할 이유가 있었다.
대게 이공계에서 대학생-대학원생이 된 뒤 학문의 길이나 정출연 (정부출연연구소)에 갈 때 필수는 아니라고 다들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필수인 코스가 있다.
해외 포닥이다.
특히나 신약, 유기합성분야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포닥 정도는 하고 들어와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포닥은 매우 중요한 커리어였다.
이전 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필자는 사실 정출연에 자리를 잡고 싶었다. 학교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저 학위과정 때처럼 정출연에서 지속적인 project를 하며 지내고 싶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 꿈은 연구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포닥이 된다면 꼭 가고 싶던 나라도 있었고, 연구소도 있었다.
필자는 꼭 미국에 나가보고 싶었고, 미국에 가게 된다면 NIH나 스크립스연구소에서 포닥을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꿈은 꾸라고 있는 법....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같은 랩에 NIH와 스크립스 등에서 포닥을 하고 오신 박사님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고 꿈을 꿨었더란다.
그런데 그 계획을 접었다.
석사를 시작했던 연도가 2009년... 석사 시작과 동시에 박사를 생각했고, 당연히 포닥 후 연구원의 삶을 꿈꿔온 필자에게 포닥의 계획은 나름 2009년부터 졸업을 앞둔 2014년 겨울까지 꽤나 긴 시간 동안 바라본 목표였다. 그런데 그 목표를 칼같이 수정했다. 아이가 생기고 졸업을 앞두고 나서야 필자 스스로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포닥을 접은 이유는 나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 정정하겠다.
솔직히 말하면 포기했다. 도전하지 않고 포기했다.
포닥만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출연 연구원이라는 내 꿈도 같이 포기했다.
다른 꿈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포닥을 가고 싶었다.
주변에서 포닥을 가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때 공부하기 싫어서 안간다고 했었지만 사실 정말 가고 싶었다.
그런데 포닥을 가기 위해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자의 현실은 포닥을 가기에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1. 아이
2. 남편
3. 시부모님
3가지의 문제가 얽혀 있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지금 필자의 배우자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썰을 풀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었지만, 이제는 결혼생활도 곧 10년 찍을 것이고 이 정도는 필자의 배우자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썰을 풀어보겠다.
1. 아이 문제
필자가 포닥을 준비한다고 치면 아이는 빠르면 돌 직후 늦어도 2돌 전에 외국에서 생활을 하게 될 것이었다. 문제는 필자가 포닥을 나가려면 미리 가서 3~4개월 혹은 6개월 정도 혼자 나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올 준비를 해야 할 텐데 그동안 아이를 누가 봐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사실 아이가 없을 때만 해도 필자의 신랑은 굉장히 쿨한 척 자기가 다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필자가 슬그머니 이 문제를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니 기겁을 했다. 자기 혼자서는 아이를 볼 수 없다고.... 기겁을 하는 배우자를 보고 나간다면 아이를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정말 포닥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갓난아이를 들쳐업고라도 포닥을 가야겠다는 결심과 이럴꺼라면 신랑은 한국에 두고 가겠노라 결심한 날이기도 했다.
2. 신랑
필자의 신랑은 영어울렁증이 있었다. 그리고 성향상 낯선 환경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 것을 알면서 나와 같이 새로운 곳에서 힘든 포닥 남편의 삶을 살라고 하기엔 좀 미안했다. 그리고 결혼 전엔 그렇게 살겠다 해서 결혼했지만, 사실 살아보니 이 남자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미 포닥 가기 전에 포기했었다. 함께 가는 것 자체를....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의 신랑을 데리고 가면 필자가 더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사실 신랑에게는 당신은 남고 나 혼자 1년만 다녀오면 안 될까?라고 물어봤지만 거절당했다 ㅋㅋㅋㅋㅋ
3. 아이와 시부모님
필자의 신랑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약간이지만 포닥에 대한 끈을 완전히 놓을 수 없었던 나에게 정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날도 포닥에 대한 미련으로 신랑에게 미끼를 툭툭 던지던 날이었다.
1년만 혼자 다녀오면 안 되겠냐...
땡그리 데리고 나 혼자 갔다 오겠다..
아니면 당신이 땡그리랑 6개월만 기다렸다가 들어와라..
어차피 들어가면 나 거기서 자리 완전히 잡게 노력해보려고 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신랑이 툭 필자에게 말을 던졌다.
그럼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떡하라고?
................... 그걸 나한테 왜 묻냐고 하고 싶었으나 그냥 더 이야기 안 하고 아이 케어한다고 튀었었다.
그리고 필자의 신랑이 필자에게 이렇게 쐐기를 박아 주었다.
왜 당신은 인생에 내가 없어? 왜 당신의 인생에는 항상 당신만 있고 나와 땡그리는 없는 거야?
그 이야기가 필자가 인생 계획을 바꾸게 된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이 맞았다.
필자에겐 가족이 있었고, 필자는 인생계획에 연구자로서의 내 인생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가족들도 그 인생에 들어갔어야 했다.
포닥은 필자에겐 엄청난 기회고 스릴만점의 모험이겠지만,
단순히 필자의 가족이란 이유로 함께 가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녹록지 않은 삶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낯선 나라
낯선 환경
낯선 언어
필자는 연구라는 목표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필자의 가족들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인생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연구소장이 되겠다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정출 연에 대한 미련은 접었다.
그리고 포닥도 포기했다.
필자는 정말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필자의 선배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포닥 나가기 전에 가족들이 있으면 나가서 외롭지 않으니테니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기는 것도 뭐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었다.
필자의 선배들은 박사과정 때 결혼을 했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와 아내와 함께 유학을 가거나 혹은 포닥을 갔으니까...
나 역시 그렇게 순서를 밞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필자는 우습게도 그 선배들과 함께한 배우자들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았다.
함께 공부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집에서 출근한 남편만 기다려야 했을 선배의 와이프가 어떤 삶을 보냈을지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 선배들과 성별이 반대인 입장이니
필자의 배우자가 그 남자 선배들의 와이프처럼 집에서 나를 기다려야 할 것이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며 픽업을 하는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필자의 배우자는 심지어 장남...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렇듯이 우리 시부모님은 노후준비가 되신 분들은 아니셨다.
필자의 배우자는 언젠가는 부모님을 케어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나 역시 그 부분을 알고 결혼했었다.
외국에서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필자의 삶이 필자 배우자에겐 부모를 버리란 뉘앙스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필자는 포닥을 포기했다.
사실 늘 아쉽긴 하다
그리고 그 아쉬움의 끝은 나에게 아이가 없었더라면 혹은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란 생각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없다고는 말 못 한다. 인간은 늘 후회하는 동물이니까...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문화에서 연구를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고,
새로운 연구를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사실 미국을 못 가봐서 겁나 아쉽다... 임신해서 ACS를 못 갔기 때문에 더 집착한 듯...)
그리고 포닥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날. 나는 영문으로 학위논문을 쓰기로 결정했다.
아직 화학이란 분야는 영어가 주된 언어로 이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용어가 모두 영어로 되어 있고, 현재 이 계열의 학문을 하신 분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동네는 토익은 보지 않아도 얘가 영어 논문을 읽는지 혹은 해석을 하는지 또 쓸 수는 있는지에 관심을 많이 갖는 곳이다.
그래서 영어로 썼다.
일종의 내 커리어로 승화시킨 셈이다.
나는 외국에서 포닥을 하진 않았으나, 학위논문을 영어로 써본 사람이다.
내가 토익은 없어도 이 정도는 가능하다... 는 셀프 포장인 셈이다.
그래도 그 덕에 취업은 곧잘 했다 ㅋㅋㅋㅋ
나는 사실 마리 퀴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배우자는 피에르 퀴리가 되길 꿈꿨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꿈으로 두었어야 했다.
나는 마리 퀴리가 될 수 없었고 (애 키우면서 실험 올인은 쉽지 않으므로...)
내 남편은 피에르 퀴리가 될 수 없었다 (피에르 퀴리는 와이프 실험실 차려주기도 함... 우리는 불가능)
뒷바라지의 개념은 서로 다를 수 있으니....ㅎㅎㅎㅎㅎㅎ
어디선가 포닥 때문에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혼자 몸이면 가길 추천한다.
두런두런 들어보면 포닥은 결혼과 비슷한 것 같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다. 그러니 그냥 해보고 후회가 낫다.
그러니 아이 문제만으로 포기하진 않기를 바란다.
포닥과 엄마의 삶은 꼭 경쟁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는 충분히 공존이 가능한 삶이며
그 공존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처럼 속마음을 숨기고,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필자는 용기가 없었다. 한 번도 신랑에게 정면으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툭툭 나오는 신랑의 이야기를 취합하여 혼자 데이터화하고 분석해서 결론을 내린 것뿐이다.
그러니 필자처럼 용기 없이 행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내 남편이 피에르 퀴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사실 우리 신랑이 피에르 퀴리가 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당신의 배우자가 피에르 퀴리를 닮고 싶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