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이 과학자에게 끼치는 영향
학위과정 동안 대학원생 엄마로 사는 것은 그럭저럭 할 만한 일이었다.... 고 말하고 싶다. 쪼오금 할만했다.
그럴 수 있던 이유가 있다. 간단하다. 아이가 어렸다.
필자가 복귀를 하고 졸업을 위해 달려가던 시기는 아이가 돌도 되지 않았던 무렵이었다.
따라서 아이의 생활패턴이 매우 일정했다. 먹고 자고 싸고의 시간 텀이 조금씩 길어질 뿐 일정한 패턴이 존재했다. 또한 클라이언트(=땡그리)의 요구 사항이 매우 단순했다.
물론 중간에 씻겨야 하는데 이것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라기보단 그냥 같이 잠을 자야 하는 에미의 개인 의사가 반영되어 있다. (아기도 매일 씻지 않으면 쉰내가 난다.....ㅠㅜ)
그리고 아이가 누워 있던 시기였다.
즉, 이동의 자유가 오롯이 에미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 에미가 어디를 가고자 하면 아이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아기띠나 혹은 유모차를 통해 에미와 다녀야 했다.
정말 행복한 시기였다. 울든지 말든지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역시나 자든지 말든지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면 되는 것이었다. 아이가 누워서 손만 휘적거리며 꿈틀대던 시기이기에 아이를 눕히고 자동으로 노래 나오며 돌아가는 최첨단 모빌 하나를 켜주면 논문을 보건, 논문을 쓰건 땡그리는 필자를 전혀 방해할 수 없었다.
오롯이 필자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할만했다. 게다가 이 시기를 통해 필자는 유기합성 연구자로서 갖춰야 하는 필수 레벨을 만렙 찍고 나올 수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정확성과 스피드를 동시에 트레이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없던 출산휴가 후 복귀한 나는 역시 같은 팀 박사님들의 배려로 출퇴근 시간을 조절하게 되었다.
물론 출산휴가와 마찬가지로 쓸 수 없는 제도를 또! 썼다....
당시 내가 적을 두고 있던 연구소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정책을 시범으로 진행 중이었다. 그중 하나가 유연근무제도였는데, 하루에 8시간만 일하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박사님들 중에서는 초등학생 자녀를 두신 분들이 꼭두새벽에 출근해서 3시쯤 퇴근하곤 하는 아주 흥미로운 제도였다.
우리 팀 박사님들은 이러한 제도가 연구소에 있는데 네가 학생이라 못 쓸 것이 무엇이냐며 쓰라 했다;;;;
(이쯤 되면 연구원의 적은 우리 랩인가.... 규정 개무시...)
물론 신청하려고 연구원 포털에 접속해보았지만, 필자는 학연생. 해당되지 않아 신청하지 못했다.
하여 이런 내용을 보고하니 또다시 친정아버지로 빙의한 지도 박사님께서는 그냥 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놀랄 수 있으니 너의 출퇴근 시간만 알려드리고 너는 그냥 출퇴근하면 된다고 승인해주셨다. 이미 출산휴가로 철면피가 된 필자가 쭈뼛쭈뼛거리자 지도 박사님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있으면 안 된다며 우리가 이 정도도 이해 못할 사람들이냐고 또 큰소리를....(이분들 이쯤 되면 거의 습관성 규정 어기기...ㅠㅠ)
그렇게 필자는 팀의 배려로 8시 반 출근 5시 반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다들 예상하는 대로... 뭐 그랬다...... 할 말은 많지만 패스.....ㅠㅠ
아마도 이때 들은 뒷말들을 고려해볼 때 필자는 무병장수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할 수 있다....(쭈굴쭈굴...)
필자가 백날 쭈굴쭈굴해봤자 사실 지도 박사님의 말씀은 잘못된 것이 없었다. 어린 아기가 기관에 오래 있는 것은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 것이 맞다. 이제 100일 된 아기가 아닌가... 게다가 학연 생의 출퇴근과 근무시간, 휴가는 전적으로 지도 박사에게 재량권이 있다. 지도 박사님이 결정해준 사항에 뒤에서 말을 하건 말건 사실 필자도 지도 박사님도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 맞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살면 뒤에서 돌을 맞을 수 있으니 필자는 지도 박사님의 허락하에 다른 팀 박사님들을 찾아뵙고 출퇴근 시간 조절됨을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진짜 그렇게 하기로 했냐는 한 빌런 박사님의 대꾸에 우리 지도 박사님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어 내가 그러라 했어~"라고 한 것은 안 비밀....
뻔뻔한 지도 박사님 덕에 그렇게 필자는 강제 배려를 받게 되었다.
사실 이 배려가 없었으면 필자는 아이를 케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유기합성 연구자인 필자의 신랑은 이 동네에서 꽤나 입소문이 난... 출근은 있으나 퇴근은 없다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이 딜을 받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임신 전 연구실에서 일을 할 때에는 사실 출근은 8시 반 전, 퇴근은 대충 저녁 8시로 잡고 실험 스케줄을 잡고 실험을 했었다. 굳이 이렇게 맞춰서 일을 했던 이유는.... 아무도 퇴근하지 않아서?
음.... 처음 석사를 입학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유기합성은 9 to 9이 기본이라고...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실험실 생활을 하다 보니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모두 의도해서 남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실험이 9시 전에 안 끝나서 못 나가는 것이었다.
실험을 시작하고 종료하는 시간이 석사 초기에는 일정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8시를 넘기는 것이었다.
실험실 생활 초창기에는 손이 익지 않아서 실험 정리를 하다 보면 늦는 것이고,
실험실 생활이 익숙해진 자는 자신의 체력에 맞게 일을 배분하여하다 보면 여유롭게 마무리하면 8시 정도 일이 끝나고, 대강 다음날 실험 준비하고 나면 9시... 그 정도면 눈치 덜보고 퇴근이 가능한 시간이 되는 것이었다.
Anyway, 필자가 8시 퇴근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process가 필요하다.
자신이 벌려놓은 모든 실험의 종료 시간을 5시 반으로 맞춘다. 종료할 실험은 정리하고, 다음날까지 지켜볼 실험은 밤새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세팅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 일단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바로 사용한 실험 도구를 각 실험자의 개별 스타일에 맞춰 정리하고 쌓인 설거지를 끝내면 7시 정도면 마무리가 끝난다. 그리고 실험 결과를 노트에 정리하고 다음날 실험할 내용을 미리 체크하고 나면 7시 50분. 짐을 챙겨서 8시 땡과 동시에 내 주변에 앉은 모든 박사님들께 한분 한분 나의 퇴근을 알리는 인사를 함과 동시에 나가는 것이 그간의 일상이었다 (8시 땡인데 박사님들은 대체 왜 남아 계시는 건지...).
아니 왜 인사를 할까라고 생각할까 봐 코멘트를 덧붙이자면,
일종의 자기 관리랄까....
저 실험 다 하고 나갈 거니까 뭔 일 터져도 저 찾지 마세요~라는 실험실 고참의 노하우였다.
이렇게 도장 찍고 나가면 절대 뒤에 다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쿨럭...
단점은 나중에 필자를 8 땡으로 부른다는 것이지만, 어차피 퇴근할 땐 배 째란 근성으로 나가는 것이니 그 정도는 감수했다.
하튼 그런 생활을 해오던 내가 빠듯하게 5시 반까지 맞춰서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하던 process의 마감시간을 2시간씩 모두 당겨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당기면서 또 임신 전에 하던 실험량을 소화해야 한다는 미션도 존재했다.
8시 퇴근할 때 맞춰서 일하던 양을 5시 반 전에 모두 마무리하고 나간다는 전개가 된다.................ㅠㅠ
어쩌겠는가 하라면 하는 것이 필자와 같은 대학원생의 설움인 것을....
그래서 맞춰서 실험을 했다.
처음엔 못해먹겠다 싶었는데, 웃긴 게 사람이 극한에 처하니 능력이 200프로 발휘되면서 1년간 그 생활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생활을 하다 보니 실험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지면서, 할 일을 체계화시키는 것이 가능했고, time table을 분단위까지 세세하게 쪼개서 쓰게 되었다. 실험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레벨업을 하였다. 정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그 안에 데이터화가 가능한 것 불가능한 것을 분류하고 버릴 거면 빠르게 버려야 하기에 능력치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 되든 안되든 필자는 5시 반에 나가야 6시에 아이를 픽업할 수 있었으니 반드시 나가야 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아기를 케어 중인 선생님도 퇴근을 못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되므로 타인의 퇴근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꼭! 퇴근시간을 엄수해야 했다.
이때의 생활은 지금 필자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필자는 자칭 타칭 손이 빠른 자이다. 그리고 손이 빠른 만큼 실험도 정확하게 진행한다. 움 하하하하!
칼퇴근은 이런 면에서 실험을 하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제도가 아닐까 싶다. 오히려 퇴근시간에 대한 압박은 실험 스케줄을 빈틈없이 짜게 하고, 제시간에 실험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하여 손이 빨라짐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안 되는 실험을 버리는 안목도 길러 주었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분야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과학기술계의 실험이란 것이 종류가 워낙 많은지라, 이 모든 것이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칼퇴근이란 경험이 주는 하드 트레이닝을 경험해본 터라 지금 직장에서도 같이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이 경험을 강제 공유시키고 있다. (물론 데쓰벨리 넘느라 숨넘어가는 벤처지만...)
필자 팀의 연구원들은 그래서 사실 힘들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연구원들을 늘 달달 볶는다.
빨리해~나 집에 가야 해. 우리 애가 기다려. 그러니까 5시 반까지 끝내.
이렇게 필자가 들들 볶는 이유가 있다. 필자가 연구소에서 뼈에 새긴 말이 있었다.
책임자가 마지막에 퇴근한다
필자의 소속 팀의 박사님들이 늦게 가는 이유는 뭐 일도 많았겠지만, 박사급이 마지막에 퇴근하면서 점검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덕에 학생들도 늦게 갔던 것이 사실이지만....
필자는 지금도 책임자가 마지막에 위험한 것이 없는지 점검하고 나가는 것이 실험실 안전상도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의 퇴근을 위해서 밑에 연구원들을 볶는다....;;;;;;;
물론 실험을 하다가 정말 마무리가 늦어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럴 땐 필자가 쿨하게 야근을 허한다.
그리고 필자가 배운 것처럼 6시 이후에는 정리하는 시간이라는 원칙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
6시 이후엔 실험 벌리지 말고 반드시 정리만 한 뒤늦지 않게 퇴근할 것.
덕분에 필자네 대표님이 매일 툴툴대고 있다는 것은 안 비밀....
필자의 대표님은 연구원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를 주장하고 또 그렇게 살아온 세대라 필자를 외계인 보듯 할 때가 있긴 하다. 일이 많으면 주말도 나오고 늦게까지 일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묻곤 한다. 그러면 필자는 요즘 그러면 신고당합니다라고 응수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필자가 트레이닝받은 대로 하는 것뿐이다.
필자의 지도 박사님은 늘 말씀하셨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돈이라도 받아야 일할 맛이 난다.
죽도록 일하면 진짜 죽는다......;;;;;;;;
요즘 일본과의 문제로 인해 수입하던 제품의 국내 생산화가 시급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기업에서는 연구원들이 밤을 새워서 연구를 하신다고 하시고...
주당 근무시간이 짧다고 타박을 한다고 한다 (아니 왜...?? 안 짧던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구환경은 분야별로 갭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필자가 코멘트를 달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저 필자의 지도 박사님이 해준 이야기를 지금 노동정책을 후퇴시킨 분들께서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