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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엄마 Mar 07. 2020

엄마 과학자 생존기 - 21

엄마 과학자가 "하마"가 되었던 이유

21. 엄마 과학자는 왜 "하마"가 되었는가



필자는 어쩌다 보니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이름을 올리고 살고 있다.

이번 포스팅은 필자의 삶에서 엄마도 과학자도 다 해 먹자고 결심을 하게 된 계기....

“정치하는엄마들”“하마”로 살게 돼버린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앞서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필자는 애 낳고 기업에서 직업 과학자로 바로 삶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연봉도 잘 받는 편이었고(나이 대비...)

우리 집 아저씨랑 눈떠서 잠잘 때까지 주구장창 얼굴을 본다는 사실이 좀 그렇긴 했지만...

(같은 직장, 같은 사무실 근무....)

뭐  풍족한 용돈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기에 괜찮았다.


단점은 돌봄비용에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는 것과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달이 돈 백을 쏟아 넣음)

입사 6개월 만에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정도?


그래. 필자는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바다 한가운데 어떤 섬에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또한 매일매일 윗선에게서 테스트를 받는 느낌으로 실험을 했었다.


첫회사는 본인이 창립 이래 들어온 3번째 여자 연구원이라 했었다.

그래서인가.... 유난히 남자 연구원들 (흡연자건 비흡연이건) 끼리 흡연타임+커피타임이라며 몰려다니는 일(=뒷담화 타임)이 많았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필자는 그 무리에 어울리지 않았는데 다른 동료 과장(=남자) 로부터 거기에 어울려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전 취업특강에서 여성이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대기업의 여성 상무가 승진을 위해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저들 면상에 담배연기를 뿜어버릴까란 생각을 잠깐 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 (담배냄새가 싫었고, 남얘기 하기 싫었고, 그 무리가 쪼잔해보였고) 로 거절하고 아웃사이더를 택했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그 덕에 필자는 회사에 떠도는 여러 소문을 놓쳤고, 결국 사내 정치는 실패한 셈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웃사이더를 선택한 덕에 오히려 동료 과장인 신랑이 더 빛을 발하기도 했고 (티타임 참여자+흡연자)

윗선에서 계속 나를 테스트하는 것들에 대한 정보 역시 놓친 것이 맞기 때문이다.


필자가 회사를 블랙기업이라 부르는 이유는 굉장히 simple하다.

이 회사는 사람을 시험하는 회사다.

사람이 들어오면 나무 위에 올라가라 시키고, 올라갈 때 사용한 사다리를 치운 뒤, 나무를 툭툭 쳐대며 이놈이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를 확인하던 회사였다.


본인이 회사로부터 늘 시험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늘 나에게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다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주의 입장과 근로자의 입장은 늘 다르기에 날 보고 대체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늘 나에게 떨어지는 프로젝트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미루어어서 데드라인이 급박한 것들이거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만들기 어려운 것이거나,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프로젝트였다.


박사란 타이틀을 달았단 이유로 나는 늘 그런 프로젝트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그런 거지 같은 프로젝트를 다 성공시켰다.

만들어 본 적도 없는 물질을 만들어낸 경험도 있었고,

회사에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실험을 성공시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늘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공-질책, 실패-질책....

무엇을 해도 듣는 평가가 동일 해지는 상황에서 나는 계속해서 작아졌다.

뭘 하던지 응원을 받는 동료 과장인 신랑과 비교하며 점점 더 작아졌다.


심란한 시기였다.

나에게 쏟아지는 실험들은 하나같이 레퍼런스도 없고,

시간은 늘 촉박하고....

그런데 난 칼퇴근을 해야 하고...

아이는 계속 아팠고....

그런데 주말에 또 출근을 해야 했고...


퇴사 전 프로젝트는 test에서는 성공을 했으나, 결국 방사성 동위원소를 치환하지 못했었다.

실험이 안되니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시간을 쏟아 넣는 것이었다.

6시에 출근하고, 12시에 들어왔다.

그리고 땡그리는 그때 돌발진으로 고열에 시달렸다.

밤에는 아이 열을 체크하고, 해열제를 먹이고,

잠이 부족한 상황에서 다시 출근하고 퇴근하고...

주말도 출근하고 퇴근하고....


쉬지 못하고 한 달을 그렇게 일을 하자 회의감이 들었다.

실험도 못하는 주제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밤늦게 출퇴근을 하다 보니, 차도 없고, 도로도 한산하고...

그냥 가드레일에 차를 몰고 들이박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아이는 아픈데 엄마가 돼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도 갈 수 없고,

아픈 아이에게 얼굴도 보여주지 못하고,

실험도 못하고,

실험도 못하는 주제에 박사라고 달고 있고....

왜 사냐 죽지...라는 생각에 힘들었다.

엄마로도, 과학자로도 살 수 없다는 현실이 닥쳤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표의 말실수를 빌미로 삼아 사표를 집어던지고 나오게 된 것이었다.


과학자의 삶을 던지고 엄마로만 살면 무엇인가 해결될 것 같았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았다.

엄마로만 사는 삶은 역시 나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과학자의 삶을 버리게 된 이유를 스스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름 실험을 잘한단 소리를 듣고 살았었다.

지도교수가 변경되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논문을 썼었다.

물론 논문 쓰는 것보단 실험하는 것을 더 좋아해서 교수님들한테 혼나기도 했지만,

나름 우리 지도교수님이 "넌 이제 하산해도 돼~"라고 하실 만큼,

인정받는 게 익숙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대학원에서 한 모든 실험이 다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 팀에서 늘 안 되는 실험을 도맡아 했었다.

만들기 힘든 것, 만들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동물실험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것들까지....

나는 실험이 쉬웠던 적이 없었다.

늘 어려운 실험을 했어도 단 한 번도 스스로 자존감을 무너뜨리며 자책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회사를 다니는 동안 같은 상황에서 왜 그렇게 자책을 했을까?


퇴사를 한 후에도 그 자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웠다.

무의식적으로 남편과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우연히 회사 이야기가 나온 날은 혼자 서재에서 티브이 보며 울었던 적도 있었다.

SNS의 다른 사람들 이야기만 보며 현실을 잊고 싶어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칼럼을 보았다. 그 칼럼의 마지막에 우리 만나자는 말에 땡그리를 끌고 서울로 향했다.

2017년 4월 22일,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만나서 우리가 한 일이라곤, 그냥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했던 것 뿐이었다.

온갖 사연이 다 튀어나왔다.

이름, 나이, 엄마인 건 동일한데, 엄마이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등등...

그리고 그날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우리가 공통적으로 깨달았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엄마가 된 뒤, 직장에서건, 혹은 가정에서건 좋은 혹은 훌륭한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발버둥 치고 있었다.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여성이고 엄마라는 사실이 핸디캡이 되지 않을까 싶어 실적에 연연했고,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는 순간 중앙에서 점점 밀려나는 것들을 경험했었다.

자발적인 퇴사였으나, 그 퇴사까지 과정이 전혀 자발적이지 않았던 경험들이 공유되었다.

그리고 공감하던 이야기 하나...

왜 우리는 평범한 직장인일 수 없던 것인가...

왜 우리는 늘 일을 잘하는 혹은 뛰어난 직장 인어야 했던 것인가....


언니들을 만난 첫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때려치운 그 회사에는 나 말고도 동료 박사인 과장이 1명 더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 먼저 들어온 선임이었다.

나에게 친절하게 티타임에 합류하란 조언을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만나본 이들 중 가장 실험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흔히 박사급 연구자들이 모두 실험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끔 연구자들 중에는 머리는 팽팽 잘 돌아가서 글도 잘 쓰고 그러는데 희한하게 똥손인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동료는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똥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처럼 기대치가 높지 않았다.

쉬운 실험만 전담했고, 쉬운 실험도 간혹 말아먹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평가는 받지 않았다.

참 이분은 아빠 육아를 하시는 분이라 퇴근시간이나 주말출근 불가 등등 조건이 나와 꽤 비등비등했다.


그래....

사측의 어떠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동일한 스펙의 동료보다 나에게는 더 많은 요구치가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화수분처럼 나는 늘 Hard 한 일을 하고, 늘 질책을 받았던 듯하다.


언니들을 만난 후에 이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야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다.

자책 대신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고, 그 질문을 떠올리며 빡쳤다.


왜, 나는 평범한 연구자이면 안 되는 것인가? 왜 나는 엄청난 기대치를 가진 비범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인가?

같은 직급의 남성 연구자인 저 냥반은 나보다 실험을 못하는데 저 사람은 괜찮고 나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필자는 빡쳤다.

왜 나에게 Tight 한 평가가 주어져야 했던 것인지 묻지 못하고, 가장이 아니니 당장 그만둬도 문제없겠단 뉘앙스를 팍팍 풍겨댄 대표에게 따지지 못한 것이 그렇게 빡이 쳤다.

그리고 그 빡친 덕에 하마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전직 전문직이 총출동했던 4월 22일...

그리고 두번째 만난 5월 13일....

비슷한 사연으로 다 같이 빡쳤던 우리는 마침 일도 쉬고 있고,

그동안 전문직에 있던 터라 일하는데 도가 텄고 해서...

그렇게 3번째 만난 6월 비영리 임의단체를 출범시켰다.

마침 쉬는 엄만데 전직 국회의원이 있었고, 마침 그 자리엔 전직 마케팅 전문가들이 좀 계셨고,

전직 과학자지만 사생팬이라 SNS에서 팬클럽을 운영해본 경험자인 필자도 있었고....

마침 전직 기자도 있었고, 전직 디자이너들도 계셨고....

그렇게 우리는 탄생했다.

원래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는데, 때마침 엄마로만 살게 되었고,

마침 몸도 근질근질했고,

섬 같은 고립된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옆 섬에 사는 동료를 만난 기분이었달까...

ㅋㅋㅋㅋㅋㅋ(모 언니의 말로는 이것을 육아 둥둥섬이라 한다)


생각해보면, 본인은 원래 파이터이긴 했었다.

대학-대학원 생활을 거치며, 남초 집단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대학교 1학년 때에 비해서 성질머리가 죽긴 했지만....

굳이 싸움을 피하던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술을 권하는 선배들보다 더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고, 담배 피우는 선배들을 X먹이려고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과의 돌+I였으나, 그래도 아이 낳고 욕도 끊고, 술도 덜 마시고, 흡연은 하지 않는 바른생활을 하던......

아! 필자는 흡연자였다.ㅋㅋㅋㅋㅋ

대학교 1학년 때 이과대 건물 앞에서 담배피는 남자 선배들이 재수 없고, 아니꼽고...

왜 저기 몰려서 지들끼리 여학생 품평회를 하는지 너무나도 재수 없어서 담배를 배웠다.

나도 거기서 피려고..ㅋㅋㅋㅋㅋ

그리고 피웠다. 남자 선배들이랑 똑같이 건물 앞에서 담배를 태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느 날부턴가 그 앞에 몰려있던 남자 선배들이 사라진 뒤 나 역시 비흡연자가 되었다.


그러던 나였으나 엄마가 된 뒤, 싸우는 게 싫었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위협받지 않을까 싶었고,

내가 타인에게 나쁜 마음을 먹으면 혹시 그게 내 아이에게 업보처럼 올까 무서워

항상 착하게 혹은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이 없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하는엄마들"이 되기로 했다.

왜 우리가 양육자로도 혹은 직업인으로도 사는 것이 어려운지...

왜 우리는 이렇게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서 있어야 하는지...

함께 물어볼 사람들이 생겨 묻기로 했다.

그게 첫 시작이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마"라 부른다.

"정치하는엄마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는"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하는 엄마 = 하마"라 칭한다.

뭐 사실 하마는 매력적이다.


야행성이고..(육아 퇴근을 즐기는 양육자들처럼)

잡식성이고...(양육자들은 늘 배가 고프다....)

영역 침범에 예민한.....

사실은 아주 무시무시한 동물이다.(물면 다 죽는다 ㅋㅋㅋㅋ)


그게 육아 둥둥섬에서 표류 중인 양육자들의 현실하고 왠지 비슷하다 느꼈다.

평소엔 가만히 있는데 빡치면 흉폭하다는 점이 특히 유사하달까....

내가 이 단체에 후원을 하고, 또 활동가가 되어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이다.

내가 굳이 비범한 능력을 가진 엄청난 능력의 과학자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엄마이고, 과학자이길 바란다.

엄마로도 살 수 있고, 직업 과학인으로도 사는 삶이 평온하길 바란다.

이런 삶이 당연해져야, 왜 나에게 다른 동료들보다 더 많은 평가가 따라야 했는지..

왜 나에겐 더 많은 능력이 필요했는지 다시 질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하루 평범한 엄마이고 또 과학자이고 싶다.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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