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엄마 과학자 육아기
처음 아이를 임신했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편하게 하는 것이 나는 의외로 어려웠다.
오히려 주변 동료들에게 오픈하는 것이 편했지...
정말 이상하게도 우리 집 식구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는 게 편치 않았다.
아마도 그 일이 편치 않았던 것은 내가 임신을 한다는 것이 우리 가족들에겐 엄청난 이슈가 될 것임을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내가 결혼을 하던 당시, 우리 집에서는 반대가 격렬했다.
내가 속한 연구실 박사님들 역시 "이 결혼 반댈세!"를 강하게 어필하셨는데,
이유는 앞서 1편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과연 시댁 문제만이었을까....
과연 취업문제만이었을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임신 - 출산 - 육아로 이어질 내 인생이 과연 순탄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중심이 되었으리라...
우리 집 어른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 내가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리라 걱정하였을 것이고,
내 지도 박사님들은 자신의 여자 동기들이 결혼 후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자신과 같은 전공을 가진 배우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았기에
나 역시 그러한 삶을 살까 많이 저어되었으리라...
모두가 나를 걱정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걱정되었다.
결혼을 해서 누군가의 배우자로 사는 3년은 사실 어려운 일이 없었다.
결혼을 통해 새롭게 생긴 가족들을 챙기는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하기로 한 일이기에 딱히 불편한 것도, 또 어려운 일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야기가 달랐다.
나는 많이 두려웠다.
불이 날 수도 있는 실험을 쫄지 않고 해내던 간 큰 내가 그렇게 엄마가 되는 게 무서웠던 이유는 한 가지다.
내가 reference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문헌을 search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험하고,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다.
위험한 시약은 시약 정보에서 위험성을 알려주기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되는 것은 reference가 없다.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나의 상황이 변한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더더군다나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여자 선배를 만나기 힘들었다.
(대학원생이 아이 엄마인 경우가 하늘의 별따기...)
또한, 선배 여자 박사님들의 삶은 나하고는 괴리가 있었다.
대부분 여자 박사님들은 결혼 후 딩크가 되거나,
혹은 아이가 있어도 누군가 아이를 케어하는 이가 있었기에 나처럼 직접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 드물었다.
(친정부모님 찬스, 시부모님 찬스, 베이비시터 찬스....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이미 이러한 치열한 삶을 사는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나는 이미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
그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이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엄마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내가 우리 김여사님과 별도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고모는
64년 용띠, 무려 연대 나온 여자고, 그 시대에 졸업 후 프랑스 유학도 다녀온 여자다.
유학 이후 대기업을 다니며 멋진 커리어우먼이었던 고모는... 정말 핵멋진....
어린 내 눈엔 기가 막히게 얼굴에 그림을 잘 그렸고, 또 그런 모습이 보고 싶어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대 옆에 매달린 조카들을 딱히 내쫓지 않았던...
(귀찮게 해서 미안해 고모)....
뭐 하튼 되게 멋진 어른여자였다.
그런 핵멋진 고모는 결혼을 하고 달라졌다.
결혼한 뒤 어느 날 고모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고모부랑 같이 미국에 간다 했었다.
그리고 돌아온 고모는 대기업에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학위가 필요하다며 다시 대학원에 다녔고, 아이를 키웠고, 사촌동생들 케어하느라 늘 운전을 했다.
그리고 시간강사가 되어 강의를 나갔다. 학원 강의도 하고....
또 언젠가는 사업도 한다 했었다.
항상 그리 바쁘게 동동거리며 지냈다. 우리 고모는...
내가 알던 핵멋진 커리어우먼인 고모가 없어졌다...
고모부가 좋은 회사로 옮기고 승진을 하는데 반하여 고모의 직업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세상 물정 1도 모르고 지내던 나는 10대에는 고모가 그저 회사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나 보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고모가 왜 친정엄마인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도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고모가 할머니랑 살고 싶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살던 시절에 고모는 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사에 진학한 뒤 고모는 어느 날 박사과정을 포기했다.
나중에 들은 소식엔 고모부의 엄마가 아프시다고 했다.
난 고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20대가 흘러갔다.
대학원에 간다고 하던 날 고모는 내 손을 잡고 꼭 박사를 마치라 했다.
박사 마치기 전에는 절대 결혼도 생각하지 말라했다.
(아마도 내가 당시 신랑과 사귀던 시절이라 고모에겐 더 중요한 이슈였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고모를 다 이해하지 못한채 대학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신랑의 가족과 결혼으로 가족이 된 뒤, 나에게도 시댁이란 곳이 생겼다.
그제야 고모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배우자의 강한 지지가 없으면 며느리란 존재가 당당해지기는 어려운 게 대한민국이었다.
아..... 왜 네이X에 그렇게 시댁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학위를 마칠 때까지 돕겠다는 배우자의 약속이 있었고,
공부하는 며느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준 시부모님과 시할머니께서 계셨다.
그랬다. 운이 좋았다.
그래서 공부를 진행할 수 있던 것이었다.
고모가 겪은 일은 나의 똑똑한 고모가 대한민국의 평균 며느리였기에 겪게 된 일 중 하나였으리라...
그렇게 고모를 이해하고, 또 고모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내 엄마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자신들의 딸들이 고모처럼 직업을 갖고, 공부를 많이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도 자신의 일을 하길 바랬다.
그래서 남편에게, 또 시댁에 당당하길 바랬다.
그러니 너희는 고모처럼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 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야 포기하지 말라던 엄마의 마음도,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인 조카를 걱정했던 고모의 마음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 늦게 철이 든 셈이다.)
고모의 삶을 이해하면서 나는 어쩌면 고모가 늘 다양한 일에 도전해야 했던 것이 결국 고모가 엄마였기 때문에 겪은 일이 아닐까 했다.
또, 어쩌면 고모가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던 시기는 다름 아닌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
일명 할마 찬스 (할머니 엄마 찬스)를 쓸 수 있던 시기였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할머니 육아 찬스가 불가능한 내 입장에서 임신은 적색경보가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임신이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 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임신 역시 내 의지와는 1도 관련이 없기에...
뭐 그건 별 수 없는 것이니....
그냥 받아들인다 하고...
임신을 하고,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출산휴가며 기타 등등 정책을 알아보면서 고모 생각이 참 많이 났다.
고모가 동생들을 케어하던 시기는 내가 임신한 2014년보다 더 척박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돌봄 공백은 지금보다 심각했을 것이며,
출산휴가 역시 2개월 정도? 그것도 있으면 다행인 시절이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내 고모라면,
육아를 책임지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과중한 업무량에 치여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고모부를 대신하여
독박 육아를 해야 했던 고모는 할머니의 도움이 없다면 아마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고,
간신히 이어가던 경력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하게 변화한 고모의 직업군은 경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 엄마가 되고서야 고모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6살까지 키우며 나는 고모의 전처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나는 과학자로서의 경력과 엄마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두 번의 선택을 했다.
나 역시 간신히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다.
엄마 과학자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주변에서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 대해 상담을 많이 받는데,
나는 늘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아이는 직접 키우는 게 좋긴 하다.
아이와 부딪히며 힘들지만 부모로서 나 역시 성장할 수 있기에 그보다 더 소중한 기회는 없다고...
하지만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힘들다고.
육아는 아름답지 않다고.
그리고 도움받을 수 있으면 그냥 받으라고.
받을 수 있다면 제대로 받으라고
굳이... 인 것 같다. 자신의 경력을 갈아 넣어 육아를 한다 해서 아이가 나에게 행복만을 선사하지 않고,
솔직히 대화도 잘 안 되는 아이와 하루 종일 말 같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는 건 힘들다.
그래서 되도록 일을 포기하지 마라 강조한다.
특히나 내 경우처럼 예기치 않은 야근이 생기는 연구직일수록 누군가의 도움은 되도록 받는 게 나은 듯하다.
연구라는건 확실히 꽂히면 쫘악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보통 그 시간이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서 실험을 정리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ㅠㅠ
아무튼...
어쩌면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여자에서 엄마로 변하는 순간 겪게 될 일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와 가장 가까운 윗세대를 보며 은연중에 알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10대에 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고
20대에 엄마란 단어에 기겁을 하게 되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때는 엄마가 되면 인생이 끝날 것처럼 느껴졌으나 사실 지금 보면 인생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엄마가 되는 경험이 왔기에 유리천장이란 단어에는 크게 관심도 없던 내가 세상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들어 유리천장이란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간혹 한다.
미혼여성일 때 느낀 유리천장이었을지도 모르나, 엄마가 되는 순간 다이아천장이 되어 내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실 미혼일때도 유리천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다이아 천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엄마라는 나의 핸디캡(?)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 손에 망치를 쥐어주어 내 목에 태워 아이와 함께 천장을 두드리기로 했다
나와 아이가 두드리고, 또 다른 이가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두드리다 보면 더 빠른 속도로 천장에 흠집을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곤 한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사람인 우리 고모와 우리 엄마에게 오늘 이 글을 바칩니다.
늘 애정하고 존경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