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의 왕 두리안
철퇴 모양이었다. 원뿔의 날카로운 가시가 구형 몸통을 빈틈없이 감싼 모습은 영락없는 철퇴였다.
숨을 멈췄다. 단내를 머금은 음식을 먹고 싼 똥을 장기간 발효시킨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녔기 때문이다.
부패한 똥내를 풍기는 철퇴라니. 난생처음 접한 두리안의 인상은 그토록 충격적이고 강렬했다.
과일의 왕이라 일컬어지기 전, 그것이 간직한 어둡고 잔인한 과거가 잿더미 속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그가 걸어왔다. 생명을 잃은 씨앗들이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소리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울 만큼 기괴했다. 한때 찬란한 생명으로 빛났을 열대 과일은 차디찬 땅 위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들려있었다. 움켜쥔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무기에서 흘러나온 악취는 이미 무력해진 적들의 남은 전의마저 증발시켜 버렸다.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노란 과즙을 찔끔 지리는 망고 녀석이 철퇴 너머로 보였다.
그의 이름은 두리안 장군. 북슬북슬한 털로 뒤덮인 야수 람부탄도 하루아침에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타오르는 불덩이를 쏘며 최후까지 버틴 드래곤 프룻도 그와의 대결에서는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었다. 두리안 장군의 철퇴 앞에서는 만물이 평등했다.
한편, 높다란 왕관을 쓰고 있는 킹 파인애플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무수한 전쟁을 거치며 굳어진 거친 살갗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소름인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두리안 장군에게 왕좌를 넘겨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정성스러운 개소리가 역동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바람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두리안 냄새에 취한 건지도 모르겠다.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 캔 유 잇 김치?" 우리나라 사람이 노랑머리 흰 피부의 외국인에게 많이 던졌을 법한 질문이 말레이시아에서는 "두 유 노우 두리안? 캔 유 잇 두리안?"쯤으로 번역돼 사용되는 것 같았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된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한결같이 묻던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일이 내 관심을 차지하는 비율은 보잘것없었다. 고백하자면, 총각 때는 과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가식적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상큼한 이미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꾸미기 위한 것일 뿐, 진심으로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실존할 수 없다고 믿었다. 태어난 딸에게 월급의 절반을 과일로 상납하는 현실을 철퇴로 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쨌든 여전히 과일과 야채란, 육식으로 쾌락을 즐긴 몸뚱이에게 죄의 사함을 선사하는, 끌리진 않지만 이로운 용도의 음식일 뿐이었다. 그러니 과일 할아비가 온들 알게 뭐냐. 그랬던 나이지만, 기대에 차 두리안 질문을 던지는 현지인들에게 좋다 싫다 대꾸라도 하려면 일단 먹어보고 답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였다.
퇴근길이었다. 회사 앞 도로변으로 발길을 향했다. 야외 천막을 쳐 놓은 두리안 킹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널따랗고 녹슨 네모난 칼로 두리안을 내려쳐 쪼개기 전까지 주인장이 물어보는 질문이 많았다. 어쩌고저쩌고, 무상킹이 어쩌고저쩌고 무슨 질문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가격표를 대충 훑어본 나는 제일 좋은 걸로 달라고 했다. 이백 링깃이 이만 원쯤 되나 하고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할 정도로 말레이시아에 풋내기인 시기였다.
누런 덩어리를 덜렁덜렁 들고 집으로 왔다. 식탁에 앉은 아내와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을 교환했다. 열대의 바깥 온도와 차이 없는 미지근한 덩어리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잘 읽은 홍시처럼 물컹거리는 촉감이다. 아보카도처럼 기름진 질감, 버터를 베어먹은 듯한 느끼함,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입안에 퍼져나갔다. 우욱!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갈 법한 흑산도 지역의 참홍어가 식물로 환생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는 순간이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남은 두리안을 몽땅 냉장고에 넣고 말았다.
그때는 몇 시간 뒤 냉장고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하나의 거대한 두리안으로 변해 버릴 거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얼린 후 우유에 갈아 먹으면 맛있다는 둥 어떤 방법 끝에도 결국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두리안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후로 시간이 흐르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한국인 정육점을 벗어나면 로컬시장에서 이백 링깃으로 인생 역대급 품질의 삼겹살, 목살, 항정살을 여덟 근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동안, 두리안은 우리가 돈을 내고 먹어야 하는 범주의 음식이 아니라고 결론이 나 있었다.
그런데, 재작년 이맘때 즈음인가 보다.
인심 좋은 안띠가 값싸고 맛있는 두리안을 사주시겠다며 노상 가게로 끌고 간 적이 있다. 몇 번의 손사래가 무안해 마지못해 따라갔던 것 같다. 그때 두리안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종류별로 두리안을 하나씩 펼쳐놓고는 맛을 보라고 하셨다. 단 똥, 쓴 똥, 시큼한 똥, 새콤한 똥 그래봤자 똥일 텐데….
너무나 좋아하는 홍어도 삭힌 기간과 원산지,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구수한 막걸리와 꼬릿한 암모니아 냄새를 풍기는 홍어를 있는 그대로 즐기면 기가 막히는 대신 코가 뻥 뚫리고, 수육으로 푹 삶은 돼지고기에 잘 익은 김치 이파리를 돌돌 말아 한입에 쏙 집어넣으면 꼬들한 식감이 일품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오잉?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재작년 처음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느끼하고 기름지기만 하던 맛이 달콤하고 고소한 맛으로 변해있었다. 냄새는 달짝지근하고 상큼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고? 열대지방의 꿉꿉한 습도와 타는 듯 높은 온도를 견뎌낸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보석이었던 것인가. 종이에 스며든 물기처럼 서서히 말레이시아 현지화를 겪은 후에야 진정으로 과일의 왕을 영접하는 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두리안 시즌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여기저기서 두리안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금도 당시의 무지로 쓰레기통에 버린 무상킹을 떠올리면 안타까움에 땅을 친다. 이제는 "두 유 노우 두리안? 캔 유 잇 두리안?"이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두리안 중에서 저는 특히 D101에서 느껴지는 가볍게 달콤하면서도 크리미한 맛을 좋아하는 편이죠. 무상킹의 달콤 씁쓸하고 쫀득한 질감도 좋지만 가격 대비 101의 풍미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가끔 D24의 씁쓸한 맛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어요. 우당 메라는 간혹 즐기는 편이에요. 그나저나 어떤 두리안을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건가요, 수백 가지가 넘어서 말이죠.”
아내와 두리안을 무슨 종류로 주문해 볼까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얘기를 듣던 우리 집 과일 몬스터는 벌써부터 코를 틀어막는다.
"어휴~ 엄마, 아빠 두리안 좀 그만 먹으면 안 돼? 냄새가 너무 독해서 숨을 쉴 수가 없어."
"냉장고가 또 방귀 뀐단 말이야!"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딸, 두리안은 과일의 왕 이래. "
"과일 몬스터가 과일 중에서도 제일 맛있다는 과일을 못 먹는다니까 웃긴다."
이번 주말에 두리안 사먹으러 가야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끝.
<사진 gettyimages by Calvin Chan Wai Me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