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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Dec 09. 2022

마티스와 피카소

우리가 보았던 그림을 기억해줄래?

20대 후반에 처음 유럽여행을 갔을 때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이국의 풍경도, 낯선 환경도 아닌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이었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명작들을 실제로 딱 마주쳤을 때의 전율은 그 어떤 경험보다 감동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그림들은 있다고는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마치 유에프오 같은 느낌이었다면 그림들을 직접 보는 건 그 유에프오가 실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으니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에 대단한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의 남들처럼 학교에서 배운 화가와 작품 몇 개를 알고 있는 게 전부였지만 말로만 듣던 화가와 그림들을 보는 것은 내게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시간의 영속성과 세계관의 확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아이도 느꼈으면 하는 것이 무모한 기대라는 걸 알지만, 나는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열심히 갔다. 지금은 스쳐 지나가는 작품들일지라도 언젠가 학교나 책에서 다시 보았을 때 직접 보았던 그 그림들을 기억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이 내 생각과는 매우 달랐다.


“이거 봐봐. 이 그림 그린 화가는 마티스라는 사람인데 춤추는 사람을 그린 거야.”

“왜 옷을 다 벗고 춤을 추는 거야?”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우리는 그 유명한 앙리 마티스의 작품 <춤>을 보고 있었다. 내 눈에는 저 강렬한 색채감이 보이는데 아이에겐 옷을 벗고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는 사람이 보이는가 보다.


그러게, 왜 옷을 벗고 춤을 추어서 나를 당황하게 하는 걸까.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아이랑 같이 보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나중에 혼자서는 여러 번 왔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아이와 함께 왔다. 일부러 유명한 작품들이 많은 곳만 골라서 보는데도 아이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마티스도 고흐도, 모네도 아이에겐 그냥 비슷비슷한 그림일 뿐 크게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9살 아이가 그림을 보고 감동하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관심은 가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봐도 봐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림들에 점점 질려 하는 것 같았다.


“너 나중에 이런 그림들을 직접 봤다는 걸 알게 되면 엄마한테 고맙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림에 관심 없는 아이에게 서운해서 생색의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원하지 않는 걸 하게 해놓고 이러는 내가 우습지만, 이 순간을 그냥 흘려버리는 게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나중에 혹시라도 기억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유명 작품들 앞에서 착실하게 사진을 찍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루함에 계속 몸을 꼬는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도 대충대충 그림들을 보면서 지나갔다. 그래도 지나칠 수 없는 건 꼭 확인시켜 주었다. 이건 모네의 작품이야, 이건 렘브란트야, 피카소야, 하면 아이는 응응, 건성으로 답했다.


“어, 잠깐만!”


아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이게 피카소라고?”


아이가 되물어 본 건 피카소의 작품 ‘두 자매’였다. 피카소가 초기에 그린 그 작품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큐비즘의 피카소 작품과는 조금 다른 그림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미 피카소 그림을 본 적 있는 아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피카소 작품 맞아. 저번에 봤던 그림보다 한참 먼저 그린 거야. 처음에는 이렇게 그리다가 점점 그런 식으로 그리는 방법이 달라진 거야.”

“피카소도 처음에는 그림 잘 그렸네. 나중에는 왜 그렇게 된 거지?”


아이의 엉뚱한 질문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나중에 그린 건 별로야?”

“좀 이상하던데.”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9살의 감상. 피카소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실재하는 것으로부터 탐구가 시작되는 너와 그 반대였던 나는 이토록 다르구나. 놀랍고 조금 부럽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네가 좀 지겨워하더라도 박물관이랑 미술관은 좀 더 가봐야 할 것 같다. 피카소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려면 말이야.



<너와 여행이라는 미친 짓> 중 마티스와 피카소


 



얼마전 아이가 마티스의 그림이 시험에 나왔다고 하길래 반색을 했습니다.

"너 이 그림 실제로 봤잖아!"

"내가? 언제? 어디서?"

세상에... 전혀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ㅜㅜ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증거(?)를 끄집어내봤습니다.


아이와의 여행 이야기는 제 책 <너와 여행이란 미친 짓>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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