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 도착한 지 며칠. 낯선 이국 풍경도 하루 이틀 지나니 익숙해졌다. 사람 눈이 참 간사해서 이토록 쉽게 적응하고 만다. 하지만 풍경에 익숙해졌다고 금세 이렇게 심심해질 일인가. 기껏 떠나온 여행인데 하릴없이 빈둥댈 수만은 없어 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특별히 갈 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구경 삼아 슬슬 동네 산책이나 하다가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나 한잔 마시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50도에 육박하는 여름을 지나 이제 제법 시원한 가을이라고는 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내리쬐는 햇살은 나에게 서울의 여름과 다를 바 없이 더웠다. 그나마 습도가 낮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금세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카페를 찾았다. 대단한 커피 미식가는 아니므로 적당한 곳이면 충분했다. 혹시라도 테라스가 있다면 여행자라는 핑계로 그럴듯하게 야외 테이블에 앉아보려고 했다. 그건 흔하디 흔한 여행 로망 같은 거라고나 할까.
그런데, 카페가 없었다. 식당도 있고, 생활용품을 파는 잡화점도 있고, 과일 가게며 슈퍼마켓이 즐비했지만, 카페는 없었다. 더 찾아다니기엔 이미 지쳐버려서 급한 대로 슈퍼마켓에서 캔커피를 사서 돌아왔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스타벅스도 없고, 맥도날드도 없어.”
맛없는 캔커피를 홀짝이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이보다 충격적인 말을 최근에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계 어디를 가도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타벅스와 맥도날드가 없는 곳이라니. 문득 우즈베키스탄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지의 나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지의 세계와 현실 그 어딘가 타슈켄트 시장 탐방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찾는 대신 지천으로 널린 과일에 눈을 돌렸다. 뜨거운 햇볕과 건조한 기후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의 과일은 맛있기로 유명했다. 체리, 포도, 수박, 멜론과 비슷한 듸냐, 석류 등 다양한 과일이 시장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포도 얼마예요?”
“1킬로그램에 50000 숨(약 5000원)!”
“청포도와 검은 포도 반씩 주세요.”
과일 가게 아저씨가 포도를 골라 담는데 어쩐지 시든 것만 골라주는 것 같다. 아줌마 본능을 참지 못하고 항의했다.
“싱싱한 걸로 주세요. 그건 너무 시들었어요.”
“똑같은 거예요. 이게 더 맛있어요.”
작은 실랑이 끝에 싱싱한 송이로 골라 담았다. 여기서 놀라운 건 나는 영어와 한국어로, 아저씨는 우즈벡어와 러시아어로 말했다는 사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대화가 가능했던 건 한국이나 우즈베키스탄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해서였을까.
과일을 시작으로 시장에서 사는 것들이 매일 조금씩 늘어났다. 어느 날은 견과류를 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엉성한 그림이 오히려 매력 있는 핸드메이드 그릇을 사고, 또 어느 날은 부위별로 잘라 진열된 고기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유창하게 한국말을 건네는 상인에게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시장을 돌아다니다 지치면 우즈벡 전통 식사 빵인 ‘넌’을 3000 숨(약 300원)에 하나 사서 뜯어먹었다. 화덕에서 갓 구워 나온 ‘넌’은 바게트처럼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게 담백하고도 구수했다. 손바닥 세 개쯤은 붙인 것처럼 커다란 ‘넌’을 다 먹어갈 때쯤이면 어느새 에너지가 보충되었다. 적어도 타슈켄트 시장에서 ‘넌’은 카페인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비닐봉지를 주렁주렁 손에 매달고 나오는 길, 비록 이 순간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간절할지라도 여기는 우즈베키스탄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으로 과일을 물리도록 먹을 수 있는 곳. 그것만으로도 야외 테이블 카페 감성 같은 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으니 나는 어느새 스타벅스도, 맥도날드도 없는 이 미지의 세계에 안착한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