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은 개나 주세요

모든 것이 다 그 놈 때문이다

by 서작가

결국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파트 벤치에 앉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닦으면 눈이 부을까 봐 (이 와중에도 이런 걱정을 하다니!)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두었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지다가 콧물까지 주르륵 흘렀다. 콧물은 닦아야 할 것 같아 가방을 뒤적이는데 버럭 신경질이 났다. 아 씨, 왜 눈물이 나는 거야.


아무리 가방을 뒤져도 콧물을 닦을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손수건은커녕 휴지도 없다. 코를 킁킁 거리며 훌쩍여도 콧물은 계속 나오고 눈물과 범벅이 되어 코끝에 자꾸만 맺히더니 떨어지지도 않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소매로 훔쳐내려니 이 재킷은 드라이클리닝 하고 처음 입은 옷이다. 안 된다. 그렇다고 손등으로 쓱 문지르기엔 이미 양이 너무 많다.

그때 가방 속에서 뭐가 하나 잡힌다. 아침에 신고 나간 양말이었다. 점심 나절에 발이 불편해 신발을 벗어보니 엄지에 구멍이 나 있길래 벗어버린 양말이었다. 솔직히 조금 망설였다. 이걸로 닦을까, 내 양말이긴 하지만 몇 시간은 신었던 건데 괜찮을까. 순간 코 끝에 맺힌 콧물이 후드득 떨어지려 한다. 나도 모르게 양말로 코를 막았다. 콧물 테러는 겨우 막을 수 있었는데, 음... 이건 내 발 냄새 인가? 젠장, 오늘 골고루 하는구나.


이별을 해본 게 언제였더라, 생각도 안날 옛날이다. 그때 어땠더라 또 생각해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도 이렇게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서 울었던가. 아, 어땠더라. 정말 나는 그때 어땠더라.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그와 나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만나서 이제 그만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예견하고 있던 이별이었기에 나는 꽤 담담했다. 그는 늘 그렇듯 좀 어쩔 줄 몰라했지만 돌아서는 나를 잡지는 않았다.

그와 헤어지고 광화문 역에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눈물이 나서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지지부진하던 연애를 끝내고 솔직히 홀가분하다고 느꼈다. 어른이 되어 처음 했던 연애였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미련이 없었다. 그가 싫어졌다기보다 지겨워진 이 연애의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울고 있었다. 차마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승강장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있었다.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도 울고 있다. 눈물을 (눈이 부을까 봐) 닦지도 못하고 나는 울고 있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만났지만 끝까지 꽤 성공적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나는 그 날의 어린애가 아니니까 이런 이별쯤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안녕, 잘 지내.

인사를 하는데 느낌이 왔다. 아, 안돼! 지금 눈물을 흘리면 이제까지 유지해온 쿨은 사라지는 거야. 눈물이 흐르기 전에 후다닥 돌아서고 말았다. 어쩌면 그는 내가 이 순간을 기다린 듯 돌아서는 내가 야속하다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야속이라니, 이건 일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겠지)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돌아선 주제에 혹여나 그가 나를 잡을 수도 있을까 봐 뛰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슬
쩍 돌아봤더니 그의 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나쁜 새끼, 내가 우는 거 뻔히 알면서 (분명히 그는 돌아서기 전 내 눈물을 봤다,라고 확신한다) 나를 이렇게 그냥 보내다니. 그렇게 헤어지고 싶었냐? 울지 말라고 달래주면 내가 못 가게 잡기라도 할까 봐? 냉정한 놈. 우리 집 불이 켜질 때까지 확인하던 그 정성이 하루아침에 식어서 돌아서자마자 떠나버리다니. 어디 목 빠지게 널 기다리는 새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헤어진 거냐고!


"안녕하세요? 퇴근이 늦으셨네요?"


울고 있는 내 앞에 크록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머뭇대며 서 있었다. 누구지? 나한테 말 시킬 사람이 동네에 없는데...... 하며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크록스가 먼저 놀라며 헉 소리를 냈다.


"어머, 왜 우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씨x... 욕이 절로 나왔다. 크록스는 얼마 전까지 앞집에 살던 여자였다. 애가 둘이라고 했나, 셋이라고 했나. 하여튼 같은 집에 10년을 살아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던 나에게 말을 걸고, 먹을 것도 가져다주며 좋은 이웃을 자처하던 그녀.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귀찮은 점이 더 많았던 그녀. 얼마 전에 더 큰 평수로 이사 간다며 인사하러 왔길래 아쉬운 척했지만 사실 시원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한참 자고 있는 일요일 아침에 직접 구웠다며 빵을 가져다주는 게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가 여기 왜 있냐고. 이사 간다던 큰 평수가 같은 단지 아파트였어?


나는 얼른 눈물을 재킷 소매로 닦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걱정 마세요. 그냥 오늘 좀 울적해서요. 왜 그런 날 있잖아요. 그냥 울고 싶은 날. 하하하!"


...라고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었는데


"아, 으음... 끅! 그게 아니라 끅! 그냥 흐흑 끅! 별일 아, 아니에.. 흑. 끄끅......"


크록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깨를 두 번 토닥이고는 얼른 가던 길을 재촉했다. 가벼운 크록스 신발이 마치 맨발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가 뛰듯이 걸어갔다.


젠장, 망했다.

이제 나는 곧 늦은 밤에 아파트 벤치에서 울고 있던 사연 있는 여자로 동네에 소문이 날 것이다.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아는 이들이 수군댈 것이다. 저 여자야, 그 날 꺽꺽 대며 울던 여자가. 하며.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눈이 부을까 봐 닦지 않았던 눈을 나도 모르게 마구 문질러댄 것은 물론이거니와 드라이클리닝 하고 처음 입은 재킷 소매에는 내 눈물과 콧물, 화장품까지 덕지덕지 묻고 말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쿨함은 개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가 이별을 말할 때 울며불며 헤어지기 싫다고 말이라도 해볼걸. 차라리 그의 품에 안겨 울었으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그래서 그는 나쁜 새끼다. 나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