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별에 익숙해지죠?

아직 너의 모든 것이 그리워

by 서작가

나는 내가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낄 줄 몰랐어.

생각해봐, 우리가 20대도 아니고 남자 만난다고 가슴 두근거릴 일이 뭐가 있니? 드라마에서나 어리고 잘생긴 연하남들이 있는 거지 현실에서는 연하는커녕 또래라고 해도 이제는 죄다 찌든 아저씨들이잖아.

그래서 나도 그동안 설렘이 뭐야, 먹는 거야? 그랬거든.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는데 막 가슴이 뛰는 거야.

처음에는 나도 너무 오랜만이니까, 어? 이거 뭐지? 왜 가슴이 뛰고 그래? 그러면서 적응이 안되더라고.

아니, 이 나이에, 내가, 남자랑 연애한다고 가슴이 뛰다니, 너 믿을 수 있겠어?


잠자코 내 말을 듣던 P가 남아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 빨아들이고는 뚜껑을 열어 얼음 한 개를 입에 넣고 우두둑 깨물었다. 얼음이 차가웠던지 미간을 찌푸리며 P가 말했다.


너, 그거 알아? 노인 대학이나 왜 동네마다 다 있는 실버 어쩌고 하는, 그래 옛날 말로 경로당에서 말이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경쟁이 장난이 아니래.

서로 맘에 드는 짝을 차지하려고 벌이는 암투가 사랑과 전쟁 저리 가라랜다.

그리고 그 나이쯤 되니까 뭐 걸릴 게 없잖아? 자식도, 배우자도 이제 신경 안 써도 되니까 거리낄 것 없이 연애를 하는 거지. 그게 상상을 초월한대. 진도가 얼마나 빠른지......


야, 야! 여기서 갑자기 노인대학 사랑과 전쟁 얘기가 왜 나와?


P가 내 말에 피식 웃으며 얼음을 다시 하나 깨물었다. P는 얼음이든 사탕이든 저렇게 깨물어 먹는다. 천천히 녹여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릴 때도 같은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늘 나보다 먼저 깨물어 먹고는 녹여먹는 나를 답답해했다. 지금 나를 보는 P의 얼굴에서 그때의 얼굴이 보인다. 어이구 이 답답아, 하는.


그러니까, 70 먹고 80 먹은 노인들도 사랑 앞에서는 싸우고 직진할 정도로 감정이 살아있다는 거지.

그런데 우리가 설레고 두근 거리는 게 뭐가 이상해?

나이 먹는다고 마음까지 늙는 건 아니라고.


하긴, 나도 이 나이쯤 되면 사랑이니 뭐니 시들해지고 (한동안 실제 그렇기도 했고) 연애라는 건 끝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이 나이가 되었는데 그가 내 손을 잡을 때, 입을 맞출 때 그 떨림은 스무 살 때와 별반 다름없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잊고 살았지? 왜 다시는 못 느낄 거라는 끔찍한 생각을 했지?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뻔한 말은 굳이 노인정까지 가지 않아도 내가 증명할 수 있다. 거울 속 얼굴엔 자세히 안 봐도 주름이 있지만 연애의 감정은 여전한 것이다. 사랑의 설렘엔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미세주름마저 없었다.


내 이상형은 좀 미소년과잖아. 좀 길고 하얗고... 예를 들면 지민이 같은?


지민이가 누구야? 아... BTS. 너 강다니엘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래 암튼, 누구? 지민이? 난 걔 랩몬스터 괜찮던데. 유엔 연설하는 거 보고 반했잖아.

걘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한대? 미드 보고 독학했다는 건 뻥이겠지?

우리 아들도 그렇게 공부시켜야 하는데.


미소년 얘길 하는데 아들 영어공부를 어떻게 시킬까는 왜 나오는 걸까. 모든 대화의 주제를 아이나 남편으로 몰고 가는 P의 분위기 깨는 저 대화법에 이제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리고 친구야, 랩몬스터 이름 바꾼 지 오래됐어. 이제 RM이야.라는 말은 길어질까 생략했다.


암튼,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내 이상형과는 다른 사람인 거야.

까맣고 심지어 배도 나오고 뚱뚱해. 그런데 멋있어. 이상하지 않니?


P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이런 내가 웃긴데 너는 오죽하겠니. 이해한다 친구야.

너 취향 참 한결같다.

너는 잘 모르고 있나 본데 이제까지 사귄 남자들 생각해봐. 다 덩치 크고 배 나온 남자들이야. 안 그래?

너의 진짜 이상형은 미소년이 아니라 크고 까맣고, 배 나온 것은 옵션인 그런 남자인 거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지난 남자 친구들이 떠올랐다. 대학 가서 처음 사귀었던 선배 A, 그가 군대 갔을 때 만났던 B, 취직하고 소개팅했던 C 그리고 기타 등등.

P의 말이 맞았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내 취향은 정말 한결같았다. 이상은 미소년인데 현실은 곰돌이었달까. 반박할 수 없는 팩트체크.

하필 내 연애사를 다 아는 P에게 왜 이런 얘기를 했단 말인가. 얘는 참 기억력도 좋아.


나 담배냄새 질색하는 거 알지. 그런데 그 사람한테서는 담배냄새도 좋은 거야.

담배 피우는 것도 멋있게 보인다니까. 나 미쳤나 봐.


P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씹어먹을 얼음도 없어서 입맛을 다시던 그녀가 내 컵을 슬쩍 본더니 내 남은 커피를 제 잔에 반쯤 따랐다.


한 잔 더 마실래?

아냐, 더 마시면 잠 못 자. 나 카페인에 예민하잖아.


술은 한없이 마시면서 커피는 한잔 이상 못 마신다는 P. 알코올에 강하면 카페인엔 약한 뭔가라도 있는 걸까? 여전히 너는 참 촌스럽다고 놀렸지만 이제 나도 카페인을 먹지 않아도 잠이 잘 안 온다. 마음은 늙지 않아도 몸은 이렇게 변한다.


근데 뭐라고? 담배? 야야, 그거 진짜 아니야.

내가 신랑 담배 피우는 거에 반해서 결혼했다고 하면 오버지만 지금은 그놈의 담배 때문에 이혼할 지경이야.

그놈의 담배 내가 지긋지긋하다니까. 그 사람도 지금까지 못 끊은 거면 가망 없다.


야! 너 계속 이럴 거야? 어?

내가 진짜 오랜만에 연애 얘길 하는데 이렇게 판 깰래?


P가 남은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나를 봤다. 그리고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이제 얼음도 다 녹아 없어진 싱거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색깔마저 보리차처럼 연했다. 시계를 흘낏 보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을 얘기해보자. 그래서, 왜 헤어졌는데?


불과 이틀 전 나는 느닷없이 P에게 전화를 해 실연당했다며 펑펑 울었다. 내가 연애를 하는지도 몰랐던 P는 얼떨결에 우는 나를 달래주고 만나서 얘기하자며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오늘 만나 펑펑 울었던 것은 생략하고 연애의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미 헤어진 구남친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느니 어쩌고 하면서. P는 그래도 꽤 오래 참고 내 이야기를 들어준 셈이다.

판 깨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판은 이미 깨진 뒤였다.


그 사람과 나는 이미 헤어졌지만 달뜬 감정과 설렘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사실 P에게 그 사람의 좋은 점에 대해 열을 내며 말했지만 그 좋았던 점이 나를 힘들게 하고 그를 싫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별은 잊고(잊은 척하고) 연애의 두근거림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는 여전한 애송인가. 이런 걸 보면 진짜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게 맞는가 보다.


나 한심해? 헤어진 마당에 못 잊고 구구절절 이러는 거 바보 같지.


헤어진다고 어떻게 한순간에 무 자르듯이 관계가 딱 끝나겠니. 백번을 헤어져도 백번 모두 슬프고 아프지. 너무 노력하지 마. 정 안되면 다시 만나. 속이 풀릴 때까지,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만나서 지지고 볶아야 아쉬움이 안 남지.


다시 만나?


그게 어때서? 하지만 다시 만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야. 아마 금세 그 남자의 뚱뚱한 배가 싫고, 담배 냄새 때문에 키스하기 싫어질 거야. 안타깝지만 그 어떤 남자도 구남친이 되는 순간 찌질이가 되거든. 그건 너도 알잖아?


수많은 찌질이들을 알고 있는 P와 나는 그 부분에서 크게 웃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 가장 찌질한 건 나인데 너는 내 친구라서 내 편들어주는구나.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했다. 전화로는 펑펑 울었으면서 마주 앉아 우는 건 조금 머쓱해서 눈을 얼른 깜박이며 참았다.


그냥 마음껏 이별을 슬퍼해. 차라리 그게 더 아름다운 결말이야.


P는 아이의 학원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그 학원은 P의 아들을 RM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게 만들어주는 학원일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고 나면 나도 언젠가 지민이 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이뤄질 수 없는 멍청한 생각을 하는 나야말로 찌질이가 분명하다.


그래도, 그래서, 미움과 그리움 아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이별의 순간들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냥 잠잠해질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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