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어디라도,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것
"빨리 와 봐, 여기 기억나지? 그렇지?"
호들갑스러운 나와는 달리 아이는 심드렁하거나 혹은 전혀 기억 안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가 어딘데?" 라거나, "아아, 기억 날 것 같기도 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라니. 이런 곳은 기억 속에 영원히 박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세상에! 내가 너를 어떻게 데리고 다녔는데...!"
TV에 우리가 갔었던 여행지가 나오면 나는 언제나 흥분 상태로 아이를 불러서 기억이 나는지 확인하지만 반 이상은 우리가 저기를 갔었다고? 식의 반응을 보이는 아이.
내가 뭐 공치사하려고 너를 여행 데리고 다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억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너를 데리고 다니면서 개고생(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다는 걸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말이야. 결국 증거(?) 사진까지 찾아서 보여주면 아이는 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것도 흥분상태인 엄마와의 대화를 얼른 끝내려는 의도가 다분해서 진짜 기억이 난 건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이가 기억 못 하는 여행지는 대부분 6,7살 때 갔던 곳들이고 거기가 어딘지 모르고 그저 엄마 따라다닌 게 거의 다였으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모두가 아는 랜드마크 같은 곳은 기억날 법도 하건만(분명 구구절절 내 설명이 있었을 텐데) 기억이 안 난다니 (개고생 한) 엄마로서 참으로 허망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여행 데리고 다녀봤자 아무 소용없다던 육아 선배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일까.
그런데 때때로 아이가 우리가 다녔던 여행을 엉뚱하게 기억하면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엄마, 거기 지하에 궁전 같은데 있잖아. 거지랑 같이 밥 먹었던데."
"아이스크림 진짜 맛있었는데. 또 가고 싶다."
"나 코피 나서 엄마가 그날 열쇠고리 사준 그 시장?"
이런 식이다. 어느 나라인지, 어느 도시인지는 몰라도 거지(사실은 배낭 여행자)랑 옆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던 그 식당과 그저 아이스크림이 맛있거나, 쇼핑을 했던 소소한 기억이 아이에겐 여행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그렇게 설명하면 나는 또 거기가 어딘지 금방 생각이 안 나서,
"아이스크림을 우리가 한두 번 먹은 것도 아니고 거기가 어디야?"라고 하거나
"코피가 났던 데는 폴란드 바르샤바잖아. 쇼팽 알지? 그 음악가가..."라고 하다가 금세 대화가 끊겨버리고 만다. 아이에겐 바르샤바는 쇼팽보다 시장에 가서 좋았던 곳일 뿐이다. 그거라도 기억하고 있으니 다행인 건가.
굳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 아이를 데리고 여행 가는 건 아니라고 남들에게도, 나에게도 누누이 얘기하고 다녔는데 내 속마음 깊은 곳에는 뭔가 바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스물몇 살에 처음 피카소 작품을 실물로 보고 느꼈던 감동과 해리포터 영화 속에서 보았던 런던의 거리를 걸을 때의 벅차오름 같은 건 예닐곱 살의 아이에게 없는 게 당연한데 나는 촌스럽게도 내 방식의 여행의 희열을 아이도 느끼길 기대했나 보다.
대신 아이에겐 나와는 전혀 다른 여행의 감성이 있는데, 그건 제한 없는 거리감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여행이란 거기가 어디라도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엄마, 우리 내일 파리 갈까?"라는 황당한 말을 하거나, 발레를 배우는 친구에게
"발레를 배우려면 일단 러시아에 가서 발레를 먼저 봐야지. 가서 한번 봐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거기가 어디라도, 언제든, 갈 수 있는 것.
아이에겐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몇 날 며칠 계획을 세우고, 몇 달을 돈을 모아서 거금을 쓰며 떠나는 나 같은 어른 여행자들이야 여행지의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이에게 여행의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냥 가면 되는 것이 여행이니 말이다.
때때로 아이의 여행이 부럽다. (엄마 잘 두어) 일찌감치 비행기 타고 세상이 그렇게 넓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게 부럽고, 책 보다 먼저 피카소를 보게 된 것이 부럽고, 차이콥스키의 곡을 처음 들어본 곳이 차이콥스키가 살던 집이란 것이 너무 부럽다.
거기가 어디라도 언제든 갈 수 있는 아이는 또 어디로 가게 될까.
조금씩 엄마를 벗어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되겠지.
그때쯤에는 나를 불러 이렇게 물어보려나.
"엄마, 저기 가봤어? 우리 같이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