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힘들어서 그랬어
너 먼저 집에 가.
이렇게는 엄마도 더 이상 너랑 같이 다니는 건 힘들 것 같아.
아빠한테 공항에 나와 있으라고 할 테니 혼자 비행기 타고 가.
결국 나도 터져 버렸다.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왜 굳이 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단 말인가.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기에도 아까운 이 시간에 나는 왜 겨우 9살짜리와 씨름하며 괴로워하고 있단 말인가.
너 왜 엄마를 따라온다고 한 거야?
집에서처럼 먹고 자고 할 수 없다고 얘기했잖아.
힘들어도 좀 참고, 먹기 싫어도 먹고, 하기 싫어도 하는 게 여행이야.
집에서 하는 것처럼 할 거면 집에 있지 뭐하러 여행을 왔냐고.
숙소를 나오자마자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댔다. 아기라면 유모차를 태우고 업기라도 하겠지만 그러기엔 큰 어린이였다. 음식이 맛이 없다고 투덜댔다. 새로운 걸 시도해 보지 않는 소심함에 짜증이 났다. 배고프면 뭐라도 먹어야지. 그렇다고 여행 내내 햇반과 김을 사들고 다니며 먹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군것질은 다 먹겠다고 떼를 부렸다. 물론 다 먹지도 않았다.
너는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
즐거운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여행 가면 엄청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힘들 거라고 얘기했잖아.
그래도 따라오겠다고 한건 너야.
내가 같이 가자고 한 게 아니잖아.
학교 빠지고 놀러 가면 엄청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행이 매일 매 순간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박물관은 지루하고, 미술관은 재미가 없다고 했다. 배는 멀미가 나서 싫고 버스는 냄새가 나서 싫고 택시는 무서워서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걷는 건 힘들어서 제일 싫어했다. 남들과 함께 쓰는 화장실은 불편하고, 싱글 침대에서 혼자 자는 것도 싫고 추워서 싫고 더워서 싫고… 다 싫어했다. 나는 그런 아이가 싫어지려고 했다.
여행은 새로운 걸 경험하는 거야.
맛없을 것 같아서 안 먹는 게 말이 돼? 먹어봐야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그리고 어제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너 알기나 해?
그렇게 지루하게 보다니. 너 나중에 그게 어떤 그림인지 알게 되면 아마 후회할 거야.
샤갈과 피카소, 마티스를 보여줬지만 감흥은커녕 언제 나갈 거냐고 보채기만 했다. 재미도 없는데 왜 자꾸 그림을 보러 가냐고 했다. 어린이 입장료가 무료였으니 망정이지 돈이라도 냈으면 더 화가 날 뻔했다. 억지로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그림을 본 건지, 애미는 최선을 다했음을 두고두고 얘기하려고 증거 삼아 남겼다.
30분 줄게. 먼저 집에 갈 건지 어쩔 건지 생각해 보고 다시 얘기하자.
엄마도 더 이상 얘기하기 힘들다.
나 따라오지 말고 저 쪽으로 가.
엄마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아이가 쭈볏쭈볏 옆 길로 걸어가며 나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나올 것같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이제껏 했던 엄마의 잔소리와는 다르게 오늘은 진짜 혼자 한국에 보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눈에 담겨 있다. 순간 약해진 마음을 나도 다잡고 돌아서버렸다.
저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도 안다. 아이에겐 힘들고 버거운 여행길이라는 걸. 햇반과 김 같은 건 하나도 준비하지 않고 생전 먹어보지 않은 걸 먹으라고나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걷게 하면서도 힘들다고 하면 버럭 화부터 냈으니. 그러면서 내가 널 여기까지 데리온 건 이 엄마라고, 그러니 넌 무조건 나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참으라고, 참으라고. 아니면 집으로 가라고 협박했다. 즐거울 리 없는 여행. 아는데 사실 나도 힘들어서 그랬다. 너라도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았으면 해서 그랬다.
엄마, 미안해.
이제 먹는 것도 잘 먹고 힘들어도 참을게. 박물관에 가서도 재미있게 볼게.
아이가 슬며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엄마도 미안해. 어린 너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엄마도 이제 너를 좀 더 배려할게. 이건 그냥 마음속의 말.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지? 알았어.얼마나 잘 하는지 엄마가 두고 볼거야.
그럼 나 먼저 집에 안가도 돼?
응.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혼자 보낼거야.
협박과 회유가 난무하는 여행의 나날. 너와 여행이 아름다워질 날이과연 오긴 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