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복권

결혼을 앞두고 나의 엄마를 생각하며

by 나만아는낭만

엄마가 다시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쯤 되었다.

지난 40여 년의 세월 동안 엄마의 직업 변천사는 다양했고, 요양원은 그중 아마도 마지막이 될,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엄마의 일곱 번째 일터이다.





열 네 살에 상경해서 공장에 취직했던 것이 엄마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아가씨 땐 제과협회에서 일하며 매해 성탄절마다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준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참 맛있었다던 엄마.

조금 지나 어느 시청의 말단 직원, 당시의 10급 공무원 타자수로 일자리를 얻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커피를 타고 아침마다 온 직원들의 책상을 정리하는 일이 싫어서 퇴사한 것이 아직도 종종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아빠를 만나 결혼하고, 나와 동생을 낳은 후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부속품으로 조그마한 플라스틱 고리 같은 것에 얇은 구리를 꿰기도 했고, 여자아이들의 머리핀 등을 만들기도 했다. 동네 아줌마들과 모여 일감을 늘어놓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면서도 엄마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아빠의 퇴근 후 가족들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으면 엄마는 야무진 솜씨 덕분에 이웃집 정규 엄마보다도 일감을 더 많이 얻어왔다며 자랑하곤 했다.

나와 동생이 조금 더 자라서는 동네 식당에 다녔다. 감자탕집이었는데 일이 고되었는지 그즈음 퇴근하고 나면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했었다. 그러다가 나와 동생이 졸업한 동네 초등학교의 급식 조리사로 취직이 되었을 땐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퇴근길마다 남은 밑반찬이며 국을 싸가지고 와서는 오늘 이걸 요리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재료는 얼마나 좋은 걸 썼는지, 음식 솜씨가 좋다고 칭찬받은 일들을 늘어놓았다.




그 일을 시작한 지 몇 년 후, 엄마는 아팠다.

나와 함께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듣고 오는 길에 엄마는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머리털은 물론 눈썹까지 모조리 빠지고, 그게 다시 자라나고 엄마가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의사는 엄마가 절대로 일해서는 안된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복작복작한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의 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집 앞으로는 제법 큰 개천이 흐르고, 나무가 울창하고 새 아파트와 거리 위로는 햇살이 부서지고, 집집마다 강아지와 아이들이 있어 늘 활기찬 이곳에서 엄마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금세 친구들을 사귀었다. 낮에는 운동도 하고 차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니면서, 엄마가 평생 그렇게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그래서 새로 사귄 아줌마들과 함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실습과 교육을 이수한다고 했을 때에도 나는 반대했다. 물론 엄마의 끈질긴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냥 따두려는 거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결국 자격증을 따낸 엄마가 어느 요양원에 이력서 좀 써서 넣어달라고 했을 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어떻게 한 건지 엄마는 결국 그 어렵다는 취업을 5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성공하고 말았다.

요양을 받으면 모를까 온몸이 성한 곳 하나 없는데 도대체 요양보호사가 웬 말이냐며 타박하던 내게 엄마는 웃으면서 그래도 일을 하고 싶단다.
거짓말,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어딨어- 이제 고작 사회생활 6년 차인 나도 그게 거짓말인 줄 알겠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나 몰라.

나는 분명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쉬는 날에도 쉬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 알 것도 같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빨래를 돌리고 마트 전단지를 살펴보고 싸게 나온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장을 보러 나서는 엄마를 보면, 엄마는 집에서도 쉬는 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힘드니까 반찬가게에서 반찬 사 먹자니까. 어차피 가족들 집에서 밥 잘 안 먹잖아. 아빠랑 엄마 먹을 것만 사면 되지."

"이불빨래 같은 건 세탁소에 맡겨도 되잖아. 왜 굳이 집에서 해야 해. 엄마 힘들게."

"요즘은 평범한 가정집에서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씩 일해 주시는 분 불러서 집안일이나 밑반찬 만드는 거 맡긴대. 엄마 힘드니까 우리도 할까? 내가 돈 낼게."


세상은 이토록 편해졌고 약간의 돈을 지불하면 훨씬 수고로움을 덜 수 있는데도 엄마에게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 없었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다짐이었지만, 어쩌면 덜 힘드시도록 도와드릴 수 없다는 자책으로부터 비롯된 일종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함께 집 앞 고등학교에서 투표하고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던 날,

길에 봄이 내려앉은 동네 풍경이 참 예뻐 보였다. 엄마가 기분이 좋으셨는지 자랑스럽게 "나 이런 동네에 살고 있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 시집가서도 가까이 산다니까 좋지? 그런데 엄마만 이런 동네 살지 말고, 나도 아예 엄마 옆집에 살게 집 하나만 사줄래?”

"엄마가 안 그래도 이번 주 복권을 샀는데..." 하며, 시작된 엄마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요양원에서 일하다 보면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치매와 함께 거동이 불편해서 기저귀를 착용한 채 그대로 볼일을 보신다고 한다. 야간근무를 할 때면 잠들기 전 어르신들의 기저귀를 살펴드리는데, 종종 큰 일(?)을 치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복권을 사는 거야.

똥꿈은 못 꿨어도 똥 폭탄을 맞았으니 혹시 모르잖아. 진짜로 복권 당첨이 될지도."

어이없다며 웃고 말았지만 그 날 문득 생각했다. 엄마의 일을 반대하지 않기로.
혹시 모르잖아. 엄마가 진짜로 행복할지도.








딸이자 엄마로 살아보니 알게된 마음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는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


작은 개인 요양원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두 번의 이직 끝 지금은 국가에서 운영 중 중앙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고 계신다. 종종 회사에서 나오는 복지포인트로 겨울이불, 압력밥솥 같은 든든한 살림 아이템들을 사서 나에게 주실 때 그것이 곧 엄마의 보람이자 기쁨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작년에 아빠가 퇴직하고 나서 이제 밥 정도는 당신이 알아서 해먹으라는 잔소리도 당당히 하신다. 집안의 어엿한 '바깥양반'이 된 셈이다.


한 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은,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어보고 나서야 달라졌다.


엄마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멋진 사람이다.

나도 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내 아이를 위해 우리 엄마를 닮은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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