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일본에서 파병 군인이었던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였고 남편이 퇴직을 하자 미국에 정착하였다.
그녀와 나는 같은 동네에 살고 또 아이들끼리 워낙 친하다 보니 우리는 아이를 픽업하고 드롭하며 거의 매일 이야기를 나눈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 고국에서 먼 땅 미국으로 건너온 우리는, 언어가 장벽인 이방인의 처지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 잘 이해하는 사이이다.
또한, 그녀는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다. 서울로 몇 번 여행도 왔었고 한류가 유행하던 시절에 드라마를 정말 많이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나 또한 일본이 과거 우리에게 했던 악행과는 별개로, 일본의 음식을 좋아하고 지브리 애니메이션, 그리고 몇몇 일본 문화에 대해서 호감이어서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왠지 모르게 내 맘이 불편해졌다.
한일 관계가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닌데, 그녀가 가지고 있는 한일 관계에 관한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그리고 조금은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아마, 그녀는 전혀 짐작하지 못할, 나 혼자 가지고 있는 편견일 수도 있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녀의 역사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던...
나의 학창 시절은, 일본 음악과 일본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세대이다.
그때는 법적으로 일본의 문화수입을 금지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X-japan, Smap, Amuro namie와 같은 유명 일본 가수들의
음반을 정식 음반가게에서 살 수 없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이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와 같은 영화조차도 국내 상영이 금지되었었다.
그녀에게 한국이 예전에 일본 음악과 영화의 수입을 국가에서 금지했었다고 이야기하니 그랬었냐며, 잘 몰랐다고 했다.
내가 대학생 때였나, 일본 문화에 대한 금지령이 풀리면서 지브리 영화를 제한 없이 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영화음악 감독 히사이시 조의 팬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도 지브리 영화를 대부분 DVD로 소장할 만큼 팬이었고 (일본인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지브리 영화를 보면 참 좋겠다 싶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토토로와 키키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며 나에게 ‘반딧불이의 묘’라는 영화를 보았냐 물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아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본인의 최애 영화 중 하나라고 했다. 스토리는 2차 세계 대전 때 고아가 된 두 남매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 슬퍼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며, 아마 나도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그 영화를 찾아서 보았다. 보신 분들도 아마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하실지 모르겠다.그녀의 말대로 이 영화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웰메이드 영화였다. 만화영화지만 매우 현실적인 묘사와 전반적인 무거운 분위기.러닝타임 내내 눈을 뗄 수 없었고, 첫 화면에서 제시한 비극적인 결말은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다시 한번 먹먹해졌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인의 역사 왜곡으로 봐야 할지, 그저 한국인인 우리와 다른 시각이라고 봐야 할지,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일반인들의 역사관과 우리가 배운 역사관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달까.
이 영화를 본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었을 생각일지도 모른다.그래서인지 항상 논란의 중심이 된 영화이고 2014년이 되서야 국내 개봉이 되었다지.
8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 ‘ 반딧불이의 묘’. 그녀의 말에 의하면, TV에서도 그 영화가 방영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영화를 계속 보면서 자랐다면
자신들의 나라가 일으킨 전쟁이 다른 나라에 준 상처보다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서 자신들이 전쟁으로 인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에 대해 더 세뇌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한국인인 나에게도 정말 순수하게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영화’ 그 자체로서 나에게 소개한 것이다.
내가 일본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그 친구를 좋아할지라도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악행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 영화를 추천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후로 난 그녀에게,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일, 반한 감정이 고조된 현재는 그녀에게 더 이상 ’ 유니클로‘ 옷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고 일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뉴스에서 봤던 많은 기사들 중 민감할 수 있는 사안들은 모두 제외하고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반딧불이의 묘’의 이면과 실상을 알려주고 우리 영화 ‘봉오동 전투’를 한번 봐 보라고 말해주고 싶고
일본의 방사능 폐수 방출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하지만 서로 마음이 불편할 만한 이야기를 더 이상은 화제로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교육받으며, 세뇌되며 자랐고
자신들의 나라가 과거 다른 나라에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순진한 일반 국민일 뿐인 걸까.
작금의 이 상황들이, 갈등의 고조를 보고 있자니 착잡하다.
그들은 교육을 잘못 받은 희생양들일까. 아니면, 본인들이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Common sense 적 역사 의식이란 없는 걸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어릴 때부터 형성된 ‘편견 섞인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