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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토끼 Apr 01. 2023

안개

언제부턴가 안개가 잔뜩 끼었다.

주위가 뿌옇게 가려져 도무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다.

이 안개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하루하루 조금씩 스멀스멀 헤집고 나와 조그만 틈의 구석구석을 잠식해 나간다.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안개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머릿속마저 뿌옇게 흐려져 도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속수무책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평소처럼 산책을 하고,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고 새소리를 듣고 하늘의 구름을 보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만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살짝 부는 한줄기 바람에도 마음이 설렜는데, 스스스 바람 소리와 바람에 또르르 구르는 나뭇잎을 보는 일이 행복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며칠 동안 한 줄의 글도 쓰질 못했다. 이 상태라면 이번 주 주간 에세이는 발행할 수 없다.


그러면 또 어떤가? 사람이 살다 보면 지켜지지 않는 약속도 있는 거지. 그런 게 사람 사는 거지.... 

그런데,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 빠뜨리면, 왠지 한동안 글을 발행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영영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지금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써 내려가기로 했다.


갑자기 찾아온 이 지독한 안개의 원인은 뭘까?

이 안개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필 꽃 피는 봄날이다.

노란 개나리가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앙증맞게 피어있고, 분홍빛 진달래도 화사하게 피어 있다.

매화는 어느새 꽃비가 되어 자취를 감추고, 찬란한 벚꽃들이 하루하루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메마른 나무에서 뾰족이 앙증맞은 연초록 잎이 솟아나고, 그야말로 나를 제외한 천지만물은 저마다 아름답게 샘솟는 봄이다.


하지만, 오직 나의 계절만은 아직도 겨울과 봄의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다.

온통 지독한 회색빛 안개로 덮여 한 발자국도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살다 보면 가끔씩 이렇게 안갯속을 헤맬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지금의 일상을 다 때려치우고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어딘가로 가서 한 달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게으름 부리며 그렇게 살다 오고 싶기도 하다.

그럼, 어느 순간 이 짙은 안개가 싹 걷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나를 분리한다.

여전히 일상을 지속하는 나와, 안갯속에 갇혀 꼼짝 못 하는 또 하나의 나로....

잠시 동안 나는 하나이지만, 두 개인 존재가 되어 생활한다.

바쁜 척 가게를 돌아보고, 괜히 먼지도 한번 닦고, 흐트러져 있는 노트를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블루투스 음량을 한껏 높이고, 클래식을 크게 틀어 놓는다.

가게 안에 음악이 가득 쌓이고, 그 운율에 나를 맡긴다.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에, 경쾌한 피아노 연주에  나를 싣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마음속 안개가 아주 조금씩 흩어져 간다.


산책길에 운동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느껴본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다 보면 또 안개가 조금 옅어진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안개가 걷혀 가는 동안 안개속에 갇힌 나를 그저 조용히 바라봐 준다.


해가 떠오르고 기온이 올라가면 안개가 걷히듯 나를 꽁꽁 옭아매고 있던 안개도 서서히 걷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걸 알기에 초조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면서 나를 기다려 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안개는 걷히고 맑은 날이 오겠지.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나의 봄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너무 늦지 않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 화사하고 따스하고 설레이게 눈물겨운 나의 봄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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