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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토끼 Apr 08. 2023

커피믹스 2개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요즘 전국이 건조해 산불 소식이 자주 들려오곤 한다.

한번 불이 붙으면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해서 순식간에 번져나가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산불 피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던 터라 이 비가 참 반갑다.

강수량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있는 곳은 그저 메마른 땅이 살짝 젖을 정도로만 비가 내리고 있다.


이렇게 진회색 하늘이 잔뜩 내려앉은 날은 유난히 커피가 당긴다.

결혼 전에는 커피를 하루에 다섯 잔씩 마시곤 했지만, 언제부턴가 많이 마시면 잠이 안 와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커피를 가능한 오후 3시 이전, 하루 2잔 정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마신다.


며칠 전 생일 선물을 주문했던 손님이 찾아오셨다.

포장을 미리 해 놨기에 선물을 전해 드렸더니 생일 카드를 써야겠다고 볼펜을 빌리셨다.

볼펜을 돌려주면서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커피믹스 두 개를 내미는 거였다.

어제 성당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받은 커피믹스라고 하신다.


마침 가게에 커피가 똑떨어져 집에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침에 깜빡 잊고 그냥 집을 나섰다.

비도 오고, 커피 한잔 생각이 간절했던 터여서 우연히 내민 커피믹스가 너무나 반가웠다.

어쩜 이렇게 딱 필요한 순간에 나를 찾아온 것일까?


© jessicalewiscreative, 출처 Unsplash                                


손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보시"에 관한 말씀을 해 주는 거였다.

"보시(布施)"는 불교 용어로 자비심으로써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손님은 천주교 신자인데, 요즘 기도드릴 일이 있어 성당을 가끔 들른다고 했다.

거기서 어느 신자분이 늘 커피며, 먹거리들을 다른 분들에게 나눠주고 있어 그걸 받아 왔는데, 그 커피믹스가 나한테까지 전달이 된 것이었다.

아들이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 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나도 꼭 아드님에게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  커피믹스 두 개는 그저 단순한 커피믹스가 아닌 "보시"라는 아름다운 의미가 담긴 마음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따스해졌다.

손님이 가고 난 뒤 "보시"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라는 자만심을 갖지 않고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다.

봉사활동하시는 분들은 몸으로 보시를 실천하는 분들이다. 이렇듯 꼭 재물만이 아닌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 공손하고 예쁜 말 한마디,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도 보시의 하나라고 하니 이제부터 내가 받은 보시를 손님들께 되돌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풍요의 확언을 하면서도 어찌 보시의 마음은 갖지 못했는지 두 개의 커피믹스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은 하루였다.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풍요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 julieblake, 출처 Unsplash


팔팔 뜨겁게 끓인 물을 커피믹스가 담긴 컵에 조용히 따른다.

커피향이 코끝을 스치고 가게 안으로 퍼져 나간다.

짙은 회색빛 하늘이 머리 위로 드리우고, 조용히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다.

비를 머금어 색상이 짙어진 보도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벚꽃잎 하나가 선물처럼 내려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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