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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토끼 Jun 03. 2023

남편의 정리벽

코로나로 힘들어진 경제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자 남편은 둘이 운영하던 문구점을 나에게 맡기고 따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정리벽이 있는 남편의 부지런한 손길로 언제나 반듯반듯, 반짝반짝하던 문구점 물건들은, 날이 갈수록 나를 닮아 자유분방하게 변해 갔다.


잠시만 방심해도 가게 안의 물건들은 아이들의 손에 엉망이 된다. 모든 물건을 손으로 만지면서 구경하는 아이들이 은근히 많다.

몇몇 극성맞은 아이들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려 자기 자리를 이탈하기도 하고, 포장이 뜯기기도 하건만, 나는 아이들이 이거 포장지 찢어졌어요~~ 하면서 가져오기 전까지는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노력을 안 하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생각날 때마다 가게를 한 바퀴 돌면서 흩어진 물건들을 반듯하게 하기도 하고, 먼지가 보이면 닦아내기도 하면서 나름 열심히 정리정돈을 하노라고 해도 아이들의 손을 미처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가게의 물건들이 뭔가 뒤죽박죽으로 변해갈 무렵이면 남편이 한 번씩 문구점을 다녀간다.

그런 날이면 나는 모처럼 평일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날이 된다.

대신 남편은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할 만큼 바쁜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다.


왼쪽, 오른쪽으로 자유롭게 있던 필통들이 딱딱 각을 맞춰 반듯하게 보기 좋게 쌓인다.

가로로 놓여있어 옆으로 남아돌던 상자가, 세로로 길게 바뀌고 남은 자리에는 거기에 맞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반듯반듯 각이 잡히기 시작한다.

저 구석에 쌓여있어 잘 보이지도 않던 물건들이 남편의 손길 하나에 그 자태를 비로소 드러내기도 한다. 허전해 보이던 과자 매대가 꽉 차 보이는 마법이 벌어지기도 한다.


뭔가 내 나름으로는 제법 정리해 놓았다고 생각했던 물건들이 남편의 손길이 닿으면 훨씬 더 보기가 좋다. 물건들이 살아나 보인다.

아~ 저런 식으로도 진열을 할 수가 있는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이렇게 섬세한 남편의 손길 한 번에 가게 안의 모든 물건들이 비로소 고유의 색을 찾아간다. 

남편의 정리스킬은 내가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이다. 

하지만 이 경지가 거저 생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수반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당연히 밤 12시를 넘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남편이 문구점을 다녀가면 다음날 나는 물건들의 위치를 다시 익혀야 한다.

뭔가 질서 없는 것처럼 보였던 내가 정리한 물건들은, 사실은 나만의 정리법으로 정리를 한 거였기에 누가 어떤 물건을 찾으면 바로 달려가서 찾아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다녀간 날이면 그 자리들이 조금씩 바뀌어 있어 바로 숙지하지 않으면 며칠 지나 난감한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 어떤 물건을 찾았을 때 내가 알던 자리에 그 물건이 없어, 손님과 둘이 그 물건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여기 있었는데 왜 안 보이지?" 하면서 두리번두리번 그 주위를 열심히 탐색한다.

그러다, 같이 찾던 손님한테 살짝 민망해지기 시작할 무렵 짠하고 그 물건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 여기 있었네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물건을 손님에게 건네면, 손님도 필요했던 물건이 없어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고민에서 해결되기에 서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남편이 다녀간 자리는 언제나 표시가 난다.


남편의 정리벽 덕분에 가게는 언제나 반짝거렸고, 물건들은 모두 각을 맞춰 놓여 있었으니 오시는 손님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깨끗한 문구점은 처음 본다며 감탄을 할 정도였다. 

이런 남편의 정리벽 뒤에는 가게와 물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숨어 있었다.

손님들에게 깨끗하고 좋은 물건을 팔겠다는 마음도 배어 있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포장을 갈아야 하는 수고로움과, 매일 늦은 시간까지 물건 하나하나에 정리의 혼을 불어넣는 장인의 정신이 있었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학교 앞 문구점으로 살아남아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의 손을 떠난 문구점은 왠지 빛을 잃었다. 

남편만큼의 열정을 문구점에 쏟아부을 마음도, 자신도 없다.

난, 나의 시간이 소중하기에.... 

손님 없는 시간에 물건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가게문도 일찍 닫는다. 주말에는 쉬기도 하고, 나오는 날은 늦게 문을 열고 일찍 닫는다.


요즘 내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갑자기 문구점에 대한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문구점이 하향산업이라는 이야기는 10년, 아니 그전에도 늘 들어왔던 것 같다.

실제로 그 사실을 증명하듯 학교 앞 많은 문구점들이 사라져 버렸다.

주인의 마음이 떠난 가게가 존재할 수 있을까?

가게를 보면 주인의 마음이 보인다.


흔들리는 내 마음이 가끔 등장하는 남편의 정리벽 덕분에 다시 오와 열을 맞출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가끔 든다. 

물건처럼 흐트러져 있던, 허공을 떠돌던 내 마음이 남편이 다녀간 뒤 정리된 물건들을 보면 이상하게 차분하게 가라앉고 위로가 된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 오늘도 문구점 아줌마의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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