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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요시모토 바나나|민트 캔디의 상큼함속 상처와 위로

감성토끼의 북리뷰 - 딸이 떨구고 간 책 읽기

by 감성토끼


[작가 소개] 요시모토 바나나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문학평론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자랐다. 열대 지방에서만 피는 붉은 바나나 꽃을 좋아하여 '바나나'라는 성별 불명, 국적불명의 필명을 생각해 냈다고 하는 그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수많은 열성 팬을 가지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독서 시장의 인기를 양분하고 있는 바나나는 대중적으로도 "하루키 현상"에 버금가는 "바나나 현상"이란 유행어를 낳았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초판을 찍은 <키친>은 지금까지 250만 부가 넘는 어마어마한 판매부수를 기록했으며 전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어 바나나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나는 옛날부터 오직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 소설을 썼고, 그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질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 집요한 역사의 기본형입니다.
극복과 성장은 개인의 혼의 기록이며, 희망과 가능성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후기 중 한 부분이다.

이 책은 <키친>과 <만월>, <달빛 그림자>라는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키친>과 <만월>은 한 편의 소설처럼 이야기가 이어져 있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키친>과 <만월>을 이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키친


작중 화자인 '사쿠라이 미카게'는 평소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키친이고, 요리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중학교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내 할머니와 살다가 며칠 전, 그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고아가 된 것이다.

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 명 두 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무슨 SF 같다. 우주의 어둠이다.

<키친 p.9 >


장례식을 치르고 멍하니 있던 그녀는 같은 대학에 다니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다나베 유이치'의 초대에 그의 특별한 엄마와 그 집에 살게 된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성가신 일들을 생각하며 절망하여 뒹굴뒹굴 자고 있는데,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를,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키친 p.10>


평소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와 인연이 있었던 유이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돕다, 그녀가 이사를 해야 하는 사정을 알게 되고 자신의 엄마 에리코와 의논 후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 살 곳을 제공해 준다.

미카게가 유이치의 엄마인 에리코를 처음 만날 날,


"미카게 씨, 우리 엄마 보고 쫄았어요?"
그가 물었다.
"네, 너무너무 예쁘잖아요"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유이치가 웃으면서 들어와, 내 눈 바로 앞 바닥에 앉아 말했다.
"성형 수술했는걸요, 뭐
.......
"그런데다, 눈치챘어요?"
정말 이상하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남자예요"
이번에는 평정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
그 가느다란 손가락, 몸짓, 차림새가? 나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면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만, 그는 신난다는 표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키친 p.20>


책을 읽다 나도 여기서 충격을 받았었다. 이런 면이 일본스러운 것 중 하나일 지도.....

에리카는 유이치를 키우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하고 게이바에서 일한 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자란 미카게와 평범하지 않은 가정을 이루고 있는 유이치.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랄 수 있었을까?

미카게는 이들과 살면서 점차 할머니를 잃은 상처를 조금씩 회복해 간다.


© alyson_jane, 출처 Unsplash


여기서도,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다. 잡지로 눈길을 돌리고 나는 생각한다. 휘청 현기증이 일 정도로 괴롭지만, 그건 명백한 일이다.
언젠가 서로 다른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할까.
아니면 언젠가 또 같은 부엌에 서는 일도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실력파 엄마와, 저 상냥한 눈의 남자와, 나는 같은 곳에 있다. 그게 지금의 전부다.
훨씬 더 어른이 되면, 많은 일들이 있고, 몇 번이나 좌절하고 몇 번이나 괴로워하고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힘을 빼지 않는다.

<키친>


만월 - 키친 2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나고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만월이라는 단편이자 키친 2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어차피 키친의 연장이다.

가을의 끝, 에리코가 죽었다. 아름다운 여자인 줄 알았던 그녀가 게이바에서 일하는, 원래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남자의 분노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 사실을 유이치는 장례가 다 끝난 며칠 후에야 미카게에게 전화로 알린다.

미카게는 그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요리 연구가의 어시스턴트가 되어 다나베 유이치네 집을 나와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저 행복한 여름, 그 부엌에서.
나는 불에 데어도 칼에 베여도 두렵지 않았다. 철야도 힘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일이 오면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즐거움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순서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만든 당근 케이크에는 내 혼의 단편이 들어 있었고, 슈퍼마켓에서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발견하면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그렇게 하여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고,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안 든다. 그래서, 이런 인생이 되었다.

<만월>


미카게는 홀로 있을 유이치에게 달려가고 둘이 같이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한다. 유이치는 엄마를 잃은 상실감에 매일 술로 지새우고 있었다.


회사 일로 3박 4일 떠나야 했던 미카게는 어쩔 수 없이 일정 때문에 강행하게 되고, 에리코 생전에 같이 근무했던 치마가 상심한 유이치가 여행을 떠났다며 미카게에게 유이치가 묵게 될 호텔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 ig_vlz, 출처 Unsplash


이 둘은 어떤 사이였던 것일까?

다른 듯 같은 고아라는 아픔을 가진 둘.

그래서 서로 너무나 이해할 수 있으면서 한 편으로는 달아나고 싶었던 것일지도....

나와 유이치는, 때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사다리를 타고 저 높이 올라, 함께 지옥의 불구덩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받으면서, 거품을 일으키며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의 바다를 쳐다본다.
곁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둘도 없는 친구인데,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지 않는다. 아무리 불안해도 저 혼자 힘으로 서려는 성질. 하지만 나는 맹렬한 불길에 비친 불안한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의미의 남자와 여자는 아니지만, 태곳적 의미로는 진정한 남녀였다.

<만월>

그녀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짤막하다. 그리고 마치 민트 캔디를 먹고 난 후 입안에 감도는 상큼함이 있다.

하지만, 내용은 인간의 죽음과 상처가 항상 존재한다.

그 무거움을 이토록 가벼운 문장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작법에 감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랜 옛날에~~

그 순수하고 자존심 강한 소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아직 흔적은 남아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오랜만에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 스며든 한줄기 빛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감사하다.


미카게와 유이치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될 것인지......

스포는 책 읽을 분들을 위해 지양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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