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토끼의 북리뷰 - 딸이 떨구고 간 책 읽기
[작가 소개] 요시모토 바나나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문학평론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자랐다. 열대 지방에서만 피는 붉은 바나나 꽃을 좋아하여 '바나나'라는 성별 불명, 국적불명의 필명을 생각해 냈다고 하는 그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수많은 열성 팬을 가지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독서 시장의 인기를 양분하고 있는 바나나는 대중적으로도 "하루키 현상"에 버금가는 "바나나 현상"이란 유행어를 낳았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초판을 찍은 <키친>은 지금까지 250만 부가 넘는 어마어마한 판매부수를 기록했으며 전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어 바나나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나는 옛날부터 오직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 소설을 썼고, 그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질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 집요한 역사의 기본형입니다.
극복과 성장은 개인의 혼의 기록이며, 희망과 가능성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 명 두 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무슨 SF 같다. 우주의 어둠이다.
<키친 p.9 >
끝도 없이 떠오르는 성가신 일들을 생각하며 절망하여 뒹굴뒹굴 자고 있는데,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를,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키친 p.10>
"미카게 씨, 우리 엄마 보고 쫄았어요?"
그가 물었다.
"네, 너무너무 예쁘잖아요"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유이치가 웃으면서 들어와, 내 눈 바로 앞 바닥에 앉아 말했다.
"성형 수술했는걸요, 뭐
.......
"그런데다, 눈치챘어요?"
정말 이상하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남자예요"
이번에는 평정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
그 가느다란 손가락, 몸짓, 차림새가? 나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면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만, 그는 신난다는 표정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키친 p.20>
여기서도,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다. 잡지로 눈길을 돌리고 나는 생각한다. 휘청 현기증이 일 정도로 괴롭지만, 그건 명백한 일이다.
언젠가 서로 다른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할까.
아니면 언젠가 또 같은 부엌에 서는 일도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실력파 엄마와, 저 상냥한 눈의 남자와, 나는 같은 곳에 있다. 그게 지금의 전부다.
훨씬 더 어른이 되면, 많은 일들이 있고, 몇 번이나 좌절하고 몇 번이나 괴로워하고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힘을 빼지 않는다.
<키친>
하지만 저 행복한 여름, 그 부엌에서.
나는 불에 데어도 칼에 베여도 두렵지 않았다. 철야도 힘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일이 오면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즐거움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순서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만든 당근 케이크에는 내 혼의 단편이 들어 있었고, 슈퍼마켓에서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발견하면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그렇게 하여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았고,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안 든다. 그래서, 이런 인생이 되었다.
<만월>
나와 유이치는, 때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사다리를 타고 저 높이 올라, 함께 지옥의 불구덩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받으면서, 거품을 일으키며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의 바다를 쳐다본다.
곁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둘도 없는 친구인데,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지 않는다. 아무리 불안해도 저 혼자 힘으로 서려는 성질. 하지만 나는 맹렬한 불길에 비친 불안한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의미의 남자와 여자는 아니지만, 태곳적 의미로는 진정한 남녀였다.
<만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