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나는 '환자'다#2

엄마라는 정체성, 그거면 됐지

by 블루블라썸
© StockSnap, 출처 Pixabay

남편이 신생아실에서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팔찌가 필수라 한다. 팔찌에서 내 이름, 아이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 몸무게 등이 빼곡히 적혀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발찌가 아이 발에 달려있다. 그러나 발찌를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 내 아이구나'


퉁퉁 부은 동그란 얼굴에 눈은 양옆으로 길게 그려 넣은 듯 꼭 감고 있다. 그 밑으로 앙증맞은 코와 입이 있다. 머리숱은 적어 마음먹으면 한 올 한 올 샐 수 있을 것 같다. 하얀 천에 똘똘 감겨있어 브리또-멕시코 음식- 같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남편과 나 중 누구의 어디를 닮았을지 궁금했고 실제로 본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를 처음 본 순간 누구를 닮았다를 떠나 그냥 '내 아이'라는 느낌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신생아실에 가서 여러 아이를 두고 봐도 단번에 내 아이를 알아볼 것 같았다. 이건 이성과 지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감각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가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전신이 얼얼해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 일 수 없지만 진통제와 모션 베드의 힘을 빌려 일어나기로 했다. 단 한 번의 시도로 일어나는 건 무리라고 판단 후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것도 45도 약간이지만 아이를 안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안기보다는 내 가슴에 아이를 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는 이 모든 과정은 10분에 걸쳐 이뤄졌다. 그렇게 힘겹게 처음 안은 '내 아이'는 매우 작고 가벼웠다. 어깨와 팔, 가슴에 아이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이는 잠들어 큰 움직임 없이 가끔 얼굴 근육만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가 처음으로 안은 아이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을뿐더러 조카도 없고 주변에 아이 키우는 사람도 없어 아이 안기 경험을 하기 힘들었다. 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실수할까 봐, 잘못될까 봐'하는 무서움에 거절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아이를 안았을 때, 그것도 내 아이를 처음으로 안았을 때의 느낌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표현이 어려워도 해내야만 하는 역할이지만 머릿속 아는 단어들을 종합해도 그 느낌을 정확히 묘사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건 언어보다 이미지에 가깝다. 마치 영화 속에서 흑백 세상이 짠하고 온갖 색채로 뒤덮이는 이미지와 같은 느낌이다. 방금까지의 자책과 두려움이 무색해지고 온몸 구석구석에 전해지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를 안아본 적 없고 몸도 불편해 이렇게 안는 게 맞나 싶고 아이를 안고 있는 오른쪽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런데도 아이는 불편하지 않은지 새근새근 잘 잔다. 어떠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살과 살을 맞대고 있는 이 순간만으로 충분한 대화, 온전한 시간을 이루었다.


그렇게 얼마의 행복을 맛본 후 아이를 다시 신생아 실로 올려 보냈다. 그날은 아이와 진통제의 효과 때문인지 수월하게 지나갔다. 후기에서 보던 아픔이나 통증도 거의 안 느껴졌다.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온갖 설레발을 쳤다. 그리고 이튿날을 기점으로 사흘째, 퇴원 날에 이르기까지 통증 때문에 힘겨워 아이조차 안아볼 수 없었다.

숨이 안 쉬어지는 복부 통증이 있었지만 제왕절개라 당연한 거라 여겼다. 퇴원 가능 여부를 묻는 내 질문에 의사가 담담한 표정으로 "많은 산모들이 이맘때 힘들어해요, 그래도 퇴원은 다 해요"라고 말했다. 나도 '음, 많은 사람들이 후기에서 말 한 그 통증이구나, 어쩔 수 없어, 당연한 거야, 남들도 다 겪잖아, 자연분만이면 더 아팠을걸'이라며 받아들이려 애썼다. 퇴원 당일 검진 시 주치의가 "어이쿠, 자궁 수축이 유독 빨라 많이 힘들었겠어요, 거의 다 돌아왔네요"라고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복부 통증 외에 크고 작은 질환들도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치과 마취 후 혀로 잇몸을 어루만지거나 손가락으로 눌러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약간의 저린 느낌이 들 듯 오른쪽 허벅지 전체에 감각이상이 왔다. 걱정되어 주절주절 물어본 나와 달리 1초의 망설임도 질문도 없이 주치의가 "마취 부작용이에요, 한두 달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어쨌든 나아진다고 하니 넘어갔다. 평소라면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내 몸에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다. 꼬리뼈가 너무 아파 밤에는 도넛 방석을 엉덩이에 깔고 자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물론 그것도 1~2시간밖에 못 가 깨버리지만-. 양 발은 발가락 사이로 종이 한 장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부어 있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봤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다리라 발목과 종아리의 경계가 늘 분명했는데 지금은 발목이 부어 존재감을 상실했다. 소변줄 제거 후 소변이 나오지 않아 다시 소변줄을 껴야만 했고 퇴원 전날, 소변줄을 제거했을 때는 방광염으로 약이 추가되었다. 내 몸에 있는 200개가량의 뼈들이 하나하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아우성쳐댔다. 특히 아이가 골반에 끼어 있던 터라-아이는 제왕절개임에도 두혈종을 지님- 수술 중 골반이 틀어졌는지 한쪽 골반이 이상했다. 단순 틀어짐이 아니라 아예 어긋나 있는 느낌이 지속되었다. 이후 찾아온 무릎 통증과 겹쳐 계단 이용이 불가했고 엎드려 있으면 한쪽 다리가 덜덜 떨렸으며 앉았다 일어나면 무릎이 아파 잠시간은 어기적 어기적 걸었다. 이러한 증상은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아픈 증상을 구구절절 자세하게 풀어놓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몸이 아픈 '환자'였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서다. 동시에 병원 입장에서 나는 산모가 아닌 수술 한 '환자'였다. 지속적으로 진통제, 해열제가 들어가야 했기에 내 기분, 몸 상태와는 별개로 계속 주사를 맞아야 했다. 침대가 왼쪽 벽에 붙여 놓여 있던 터라 나는 간호사가 서 있는 방향에 맞춰 오른쪽 엉덩이를 보여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맞은 후 문질러 잘 풀어 줘야 하는데 엉덩이를 살짝 드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터라 주사액이 뭉쳐 있었다. 그리고 한파 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렸음에도 간호사는 내 방으로 들어올 때마다 상처 부위가 덧나지 않게 한다는 명목으로 시원하게 있으라 당부하며 손수 창문을 열어주고 이불을 젖힌 채 나갔다. 어느 날은 옆에 놓인 수건에 직접 차가운 물을 묻혀 내 다리를 닦아주기도 했다. 아무리 상식 없는 나라고 해도 산모는 따뜻하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실천으로 보여주는 간호사의 단호함과 결단력에 온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산모이기 이전에 '환자'였다.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나는 환자가 되었다. 환자는 병들거나 다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뜻한다. 병원 측 수많은 의료진이 여러 방법들로 나를 치료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눈부신 현대 과학 발전보다 더 효과적인 건 아이였다. 매 순간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아이를 보면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불편감이 사라졌다. 아이를 보는 것과 동시에 내 뇌 속 호르몬의 작용으로 진통제 그 이상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일으킨 것 같다. 병원과 스스로는 '환자'라고 정의해도 아이와 마주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엄마'로 존재할 수 있었다. 통증이야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지만 '엄마'라는 정체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질 것이다.


'그거면 됐지, 그러면 된 거야'


이 신뢰 하나로 1시간 이상 잠들지 못하며 계속적으로 부어가는 몸을 어루만지고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잊고자 꽂은 이어폰을 빼지 못한 채 4박 5일을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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