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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꽃 Dec 14. 2015

채워지지 않는 고독과의 싸움

-영화 ≪토니 타키타니≫ 리뷰


외로운 시대다. 24시간 내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휴대전화가 사람들의 손에 늘 쥐어져 있다.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연애도 할 수 있는 인터넷 세계에 클릭 몇 번만으로 접속할 수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와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는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채팅 메시지를 입력한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든 사람을 만나고 말을 하지만, 공허한 마음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채워질 공간이라면, 그렇게 해서 해소될 감정이라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평생 동안 고독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의 ‘토니’처럼. ‘에이코’처럼. 그리고 ‘히사코’처럼. 첫눈에 반한 여자와 결혼을 하거나, 빈 방을 아름다운 옷들로 가득 채우거나,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값비싼 옷들 사이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고독.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이 느껴지는 감정. 세상과 유리되어 있는 느낌. 주인공 토니의 고독은 이름에서부터 기인한다. ‘토니 타키타니’. 일반적인 일본인의 이름은 ‘타키타니 쇼자부로’와 같이 성이 이름의 앞에 붙는다. 토니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1차적인 지표이고 상징이다.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의심 받게 되는 것처럼, 이름은 대상에게 강력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은 일본인이라는 그의 실질적인 정체성과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따라서 토니는 ‘이름’과 ‘실존’의 간극에서 존재하게 된다. 관계의 시작점인 이름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화를 내는 인간도 있었다”. 시작에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토니는 “자신 안에 갇힌 소년”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고독의 시작은, 토니에게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름을 붙여준 토니의 아버지이다. 그는 평생을 떠돌아다니면서 지냈다. 많은 이들과 어울렸고 셀 수 없는 여자들과 밤을 같이 보냈으나 감옥에서 풀려나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가 머무를 수 있었던 토니의 어머니는 토니를 낳은 후 3일 만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쇼자부로의 고독은 다시 찾아왔다. 일주일의 애도 기간을 가진 뒤, 그는 트롬본으로 고독을 연주하는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아들에게 ‘토니 타키타니’라는 고독의 이름을 붙여준 채로. 그는 토니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다시 깨달았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것처럼, 충만함과 고독의 경계 역시 종이 한 장 차이뿐이라는 것을. 쇼자부로는 토니와의 관계를 통해 또 한 번 충만함을 느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독이라는 허공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채워져도 언젠가는 비워지게 될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토니를 빈 집에 버려둔 채 연주회를 하러 다녔다. 가득 찼던 방을 비우는 것보다는 아예 채우지 않는 편이 덜 아프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부터 토니에게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나쁘지 않은” ‘토니’로 지어주는 것처럼. 그는 ‘토니’를 아들의 이름으로 결정하고는 이렇게 불러본다. “어이, 토니.”


아버지의 고독을 물려받았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토니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몇 번의 연애 경력이 있었으나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끝나 버린다. 이때까지 토니는 자신이 ‘고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는 사진보다 더한 정교함이 있지만 체온은 없다. 동료들이 논하는 예술성이며 이데올로기며 하는 것들은 모두 토니에게 있어 추하고 부정확하고 미숙한 것일 뿐이다. 그는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에 치중한다. 체온을 느껴보지 못했으므로 그는 체온을 그려내지 못한다. 잎사귀를 그리는 것처럼 누드모델의 신체를 정확히 그려낼 뿐이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그는 늘 혼자 작업한다. 출연자들이 서로 웃고 떠드는 TV를 꺼버린다. 그의 세계는 상처 하나 없이 완벽하다. 아니, 상처를 입어본 사람만이 그것이 상처인지를 아는 것처럼, 토니는 충만함을 느껴본 일이 없기에 고독이 뭔지 알지 못한다.


‘에이코’는 토니에게 충만함과 고독을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다. 구두소리를 내며 그녀가 언덕을 오른다. 토니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마치 먼 세계로 날아가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옷을 입고 있었다”. 또, 어떤 여자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아요”. 이런 대사들로 미루어 보면, 토니는 아마 자연스럽게 옷을 입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에이코가 옷을 입는 것은 치장을 좋아하는 그 나이대 여성이 보이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에이코는 ‘그녀에게 없는 어떤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옷을 입는다. 옷이라는 것은 이름과 비슷한 속성이 있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만의 특정한 옷차림새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스타일은 디자인, 색, 재질 같은 표면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떠오르듯, 어떤 스타일을 보면 그 사람을 연상할 수 있다. 그녀는 토니와 마찬가지로 ‘없는 어떤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월급의 대부분을 옷에 써버린다.


토니는 그녀를 사랑한다. 완벽했던 그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이 균열은 파괴에서 오는 균열이 아니라 충만에서 오는 균열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몰랐던 ‘고독’에 대해 생각한다. 몇 번의 만남 후,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그녀는 곧장 대답해 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애인이 있었다.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동안, 토니는 “고독이란 감옥”에 갇힌다. 쇼자부로가 석방된 후 감옥에 갇히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토니 역시 고독을 모르던, 충만을 모르던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는 에이코가 자신과 함께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고통은 쇼자부로가 감옥에서 느꼈던 고통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띄고 있다. 고독이란 감옥에서 고독에서 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토니. 언제 권총의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공포에 휩싸인 쇼자부로. 이 구조는 후반부의 장면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결국 에이코는 토니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배경으로 깔리고 있던 음악이 바뀐다.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 역시 변한다. 고독하고 우울했던 토니의 일상이 밝고 활기차게 빛난다. 에이코는 햇살처럼 토니에게서 고독을 몰아내 준다. 간단한 음식만을 차려 먹던 토니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그녀와 함께 누워 TV도 보고 화분도 키운다. “지금 외롭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외로워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지만 곧 토니는 충만한 삶에 적응한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그늘을 드리우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토니가 반했던 그녀의 ‘옷’에서 아주 미세한, 아직은 크게 드러나지 않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토니가 고독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에이코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쇼자부로의 공연을 보러 간 장면에서도 상징적으로 처리된다. 그는 쇼자부로의 초대로 그녀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간다. 아버지는 여전히 트롬본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토니는 “기억과는 무언가 다르게” 느낀다. “그 차이는 매우 작았지만 토니에게는 아주 중요하게 느껴졌다”. 쇼자부로의 음악에 묻어 있었던 것은 아마도 고독이었을 것이다. 고독을 몰랐던 이전의 토니와 지금의 토니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의 트롬본에서 느꼈던 고독을 에이코와 함께 있는 지금에서야 인지한다. 아버지의 연주에서 고독의 냄새를 맡는 토니의 표정은 밝지 못하다. 그에게 고독은 두려운 것이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는 그에게 “뭐가 달라진 거죠?” 하고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교묘하게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토니와 에이코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방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각자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토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에이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연주회가 열린 바에서 토니는 에이코에게 말한다. 쇼핑을 줄이지 않겠느냐고. 에이코는 그의 말에 놀란 듯, 슬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녀가 옷을 사는 행위는 단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없는 부분’을 옷을 삼으로써 채우고 싶었다. 이 부분을 고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인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그녀는 옷으로 어떻게든 채워보려 하는 중이었다. 유럽 여행을 가서도,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식지 않는 과도한 열기는 여전히 그녀의 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옷을 사는 행위는 그녀에게 가장 처절하고 무엇보다도 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도가 지나치다 생각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토니는 “정말 그 옷이 다 필요할까?”라고 질문한다. 그녀의 고독이 증폭되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남편조차 그녀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토니의 질문을 계기로 금이 가 있던 두 사람의 일상이 유리잔이 깨지듯 산산이 부서진다. 여기에서 다시 음악이 바뀐다.


토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옷을 사지 않는 그녀는 텅 비어버린다. 하루 종일 옷장만 들여다본다. 고독과 유일하게 싸울 수 있었던 방법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는 무기력하다. 심지어 그녀는 옷을 사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지고 있던 것을 반품하기까지 한다. “옷을 돌려주자 그녀는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에게 주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방금 돌려준 옷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을 채우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색감이며 질감, 디자인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옷을 되찾기 위해 차를 돌린다. 그리고 죽는다.


토니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녀의 옷들과 선인장뿐이다. 그녀의 유골을 가지고 집에 돌아온 토니는 그녀가 한 것처럼 선인장에 물을 주려고 한다. 그런데 물이 없다. 분무기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 난다. 토니는 몇 번이고 분무기를 눌러본다. 그러다 자신이 들고 있는 컵의 물이라도 부어주려 한다. 그것마저도 없다. 토니는 분무기를 손에 쥔 채 소파에 주저앉는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늘 물이 차 있던 분무기였다. 마치 그녀로 가득 차 있던 자신처럼. 토니는 분무기를 놓고 흐느낀다. 죽은 그녀는 사소한 곳에서부터 철저하게 부재한다.


대상을 상실한 사람이 애도의 기간을 거치듯, 토니 역시 애도의 기간을 갖는다. 이 기간을 위해 등장하는 ‘히사코’에게 주목해야 한다. 토니는 아내를 잊기 위하여, 아내의 부재를 인정하기 위하여 아내와 가장 닮은 여자를 구한다. 그녀에게 아내의 옷을 입고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없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다. 토니가 언젠가 아내의 옷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던 것처럼, 아내의 옷은 그녀가 떠난 뒤에도 그녀의 존재감을 유령처럼 품고 있다. 그 옷을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입는다면, 그것만큼 애도에 들어맞는 행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히사코가 아내와 가장 닮은 여자였다는 점으로 볼 때, 아직 토니는 에이코의 상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토니의 안내를 받아, 히사코는 방에 들어선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아름답고 값비싼 옷에 둘러싸인다. 뭐든 입어 봐도 좋다고 허락까지 맡은 상태다. 머뭇거리던 히사코는 마침내 코트와 자켓을 몸에 걸쳐본다. 옷들은 “마치 원래 그녀의 것처럼 딱 맞았다”. 구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러 옷을 입어보던 히사코가 갑자기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옷으로 가득 찬 방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운다. 토니가 들어와 우는 이유를 묻는다. 히사코는 답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한꺼번에 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녀의 눈물은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표면적으로는 정말로 이렇게 비싼 옷을 입어볼 기회가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비참함이 그녀를 울게 했을 것이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낡은 부츠를 신는 그녀가 아닌가. 그 비참함은 히사코에게 있어 ‘채울 수 없는 부분’이기에 눈물을 흘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에이코와 연결 지어 볼 수도 있다. 히사코는 수많은 옷들을 입어보면서, 에이코가 이 옷들로 채우고자 했던 ‘부분’을 어느 정도나마 느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과 똑같은 사이즈를 가진 여자가, 이토록 많은 옷을 사러 다닌 광경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평생 동안 입어도 전부 입지 못할 옷을 사놓고 죽어버린 여자가 된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옷이 히사코에게 제 것처럼 꼭 맞았던 것과 같이, 에이코의 마음 역시 히사코와 맞아 떨어졌던 것은 아닐까.


히사코가 옷을 가지고 돌아간 후, 토니는 아내의 옷들에게서 아내의 그림자를 본다. 그것도 “매 시각 시들어가는 한 때의 그림자”를. 이때 에이코에 대한 그의 애도는 끝이 난다. 아니, 옷 사이에서 울고 있는 히사코를 보는 순간이 토니의 애도가 끝나는 순간이다. 에이코는 결코 옷을 보며 우는 여자가 아니다. 아무리 닮은 여자를 구했어도, 그것은 결국에는 ‘닮은’ 여자일 뿐 에이코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에이코는 죽었다. 그는 그녀를 영원히 상실했다. 그래서 그는 히사코에게 일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모든 건 잊어주세요”. 그것은 그가 히사코에게 건네는 말이자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그녀의 그림자들을 모두 처분한다. 방은 텅 빈다. 토니의 마음처럼.


토니가 고독과 싸우기 위한 마지막 존재인 쇼자부로도 죽는다. 에이코처럼 그의 존재가 가득 담긴 트롬본과 재즈 레코드를 잔뜩 남기고. 토니는 예의 그 방에 레코드와 트롬본을 쌓아 놓는다. 그 방은 ‘애도의 방’이 된다. 그러다 토니는 그녀의 옷을 보고 있을 때처럼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낀다. 레코드도 처분하고, 아버지의 편지나 문서 같은 것들을 모조리 태우는 것으로 토니는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방에 등을 보인 채 눕는다. 이 장면에 감옥에 갇혀 있던 쇼자부로의 뒷모습이 오버랩 된다. 천애고아가 된 쇼자부로와 홀로 남겨진 토니. 고독이라는 감옥에 갇힌 두 남자의 둥근 등. 쇼자부로도, 토니도, 에이코도, 결국 텅 빈 고독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후반부에 토니가 방에 누워 떠올리는 것이 히사코의 우는 모습이라거나, 태우다 만 히사코의 연락처로 전화를 거는 모습 등은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토니의 전화는 히사코가 받기 전에 끊기고 말지만 토니는 “그녀의 조용한 오열”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고독과의 싸움은 끝없이 이어진다. 쇼자부로처럼, 에이코처럼, 토니처럼, 계속 실패하고 실패하면서 결국 고독에 갇힐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에 불꽃 속에서 꺼낸 연락처가 남아 있다면, 주인을 잃은 옷들 사이에서 우는 여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고독을 잊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불완전한 충만함이며, 그 뒤에는 반드시 지독한 고독이 따라 온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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