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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쿠쿠밥솥

말기암 환우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by 여름의푸른색



발인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니 주방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쿠쿠밥솥 아빠가 주신 마지막 선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5개월이라는 모래시계. 그 안에서 쉴 새 없이 낙하하는 모래를 어떻게든 손으로 움켜쥐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간암 4기입니다.

여명은 6개월 정도, 주변정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간암 선고를 받던 날, 진료실 안에는 담담한 척 받아들이던 내가 있다. 슬퍼하는 딸을 보면 마음 아플 아빠가 걱정스러워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아본다. 그것이 딸로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진료실의 공기와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따뜻한 가을햇살까지 완벽하게 잔인하던 지난 9월 20일.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면서 아빠의 체중과 식사량은 급격히 줄어갔다. 밥을 드셨다가 죽을 드셨다가 미음을 드시기도 했다. 달라지는 몸상태에 따라 끼니마다 끝도 없는 밥과의 전쟁을 했다. 항암치료는 입맛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고 냄새도 민감해지면서 드실 수 있는 음식도 점점 줄어갔다. 매일 1킬로씩 빠져가는 몸무게를 보고 있으니 체중계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빠의 몸무게를 지키고 싶었던 엄마는 계속해서 새로운 음식과 간식들을 가져다 드리며 한입이라도 목으로 삼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쿠쿠밥솥 하나 사줄게"

"아니야 곧 이사 갈 거라 이사 가면 새거 살 거야 그때까지 이거 쓸게"

결혼 10년 차 하나씩 고장 나던 가전제품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오던 까만색 쿠쿠밥솥이 나에게는 지난 10년의 결혼생활을 함께했던 친구 같은 밥솥이었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는지 낡은 느낌은 있었지만 뭔가 애틋하고 소중한 마음도 들었다.

"그냥 아빠가 새 거로 사줄게 골라봐"

"아니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럴까 봐? 그냥 내가 살게요"

"아빠가 하나 사주고 싶어서 그래 예쁜 걸로 골라봐"


조용히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서 수돗물을 틀었다.

입을 틀어막아도 심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가 계속 쏟아져 나왔다. 이내 목구멍에 묵직하게 걸리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울컥울컥 심장에서 피를 토해내듯 감정의 덩어리들이 얼굴 가득 경련을 일으키며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심장을 조여 오는 통증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폭풍우가 온몸을 할퀴고 지나가는 느낌.

그때 처음 알았다 눈물에도 통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빠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는 것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딸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었던 모정보다 더 뜨거운 부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빠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더 받기가 싫었다.

매일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갓 지어진 하얗고 윤기 있는 쌀밥을 주걱으로 저으면서 아빠가 떠오르겠지만 나에게는 그 감정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아빠를 잃어버린 상실감이 현실이 될까 봐 불안했고 다가올 시간들이 두려웠다.


암이라는 녀석은 잔인했다. 환자에게는 처절한 고통을 주었고, 가족들에게는 그 고통을 지켜보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무력감에 일상을 통째로 빼앗기고 말았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 나를 벗어나지 못해

한번 해보던지'

낮게 드리워진 보이지 않는 암이라는 악마의 그림자가 가족 모두를 꿀꺽 삼켜버리고는 어두운 회색 도시에 영원히 가두어 버렸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라는 느낌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이 빠르게 흘러가버렸다. 결국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기관차도 어느덧 멈췄다.

고요해진 병실. 마지막 순간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짓는 첫 밥.

마주하기 싫었던 현실을 마주한다.

맑은 물에 쌀을 깨끗이 씻고 하얗고 예쁜 쿠쿠밥솥에 넣는다. 눈금에 맞춰 물을 넣고 취사버튼을 누른다.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 순간, 사라져 가는 희미한 숨결과 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던 온도가 벌써 그립다.

이내 따뜻해져 가는 밥솥이 아빠에게 받았던 따뜻한 온기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많이 아프셨으니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말고 편히 계세요. 사랑합니다 아빠.




사진출처_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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