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 <버닝>

내가 뭘 본 거지?

by jjjwy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았다.

예전부터 꼭 보아야지, 라고 생각은 해왔었는데 묘하게 손이 가지 않아서 날짜를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보았다. 다 보고나서 생각했다. '왜 이제야 봤지?'



이 영화는 꼭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다.


A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B라는 이야기 같다가도, 아닌 것 같다.

분명히 그랬는데, 아니었던 것도 같다. 있었던 것도, 없었던 것도 같다.

분명히 봤는데,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나의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다.


영화 초반, 해미(전종서)의 대사가 바로 이 영화의 본질과도 같은 말을 한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되는 것인가?




* 영화에는 제 주관적 해석, 의견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거리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상을 유지하는 종수는 소설가가 꿈이지만, 아직 무엇을 쓰면 좋은지에 대해서 감을 잡지 못한 상태다. 폭행 혐의로 피소된 아버지를 둔 종수에게 삶은 해미의 말대로라면 '리틀 헝거'이다. 정말로 배가 고픈, 삶이 넉넉하지 못한 그런 상태. 그러나 종수는 동시에 '빅 헝거'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의 친구 '해미'를 사랑하게 된 시점부터.


오랜만에 만난 '해미'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말투는 붕 떠있고, 마임을 하고, 이제 막 재회한 종수에게 고양이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둘은 해미의 방에서 사랑을 나눈다. 해미가 돌봐달라고 한 고양이 '보일이'는 좁은 방임에도 종수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유가 줄줄 묻어나오는 멀끔한 남자 '벤'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포르쉐를 타는 벤은 무슨 일을 하냐는 종수의 질문에 '놀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 벤을 향해 조수는 연적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과 더불어 자격지심을 품는다.


며칠 후, 해미와 벤이 종수의 파주 시골집으로 찾아온다. 셋은 함께 대마초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데, 이 때 해미가 노을을 배경으로 부시맨의 춤을 추는 장면이 가히 압권이다. 그 날 벤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나는 주기적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그러면서 조만간 여기 가까이에 있는 비닐하우스가 불탈 거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고나서 돌아가는 해미에게 종수는 실언을 한다. 창녀들이나 그렇게 옷을 벗는 거야, 라고.


그러고나서 해미는 사라진다.

감쪽같이.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연기처럼.

존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종수는 사라진 해미를 찾기 위해 벤을 추적한다.

너무 대놓고 쫓아다니길래 걱정됐는데 아니나다를까 걸렸다. 집앞에 잠복하고 있던 종수의 트럭 창문을 두드리며 나타난 벤. 불쾌할 만도 한데 너무나 서슴없이 종수를 집으로까지 초대한다. 그 곳에는 지난 번에는 없었던 고양이가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있었는데 지난번에는 없었다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그리고 종수는 벤의 욕실에서 해미가 찼던 것과 동일한 시계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지난번에는 없었던 것이다.


해미는 사라졌는데,

해미의 고양이와 시계는 벤의 집에서 나타났다.


종수는 고양이를 부른다. "보일아." 고양이는 종수에게 다가와 안기고, 종수는 확신한다.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고. 그리고 영화는 종수가 벤을 불러내 칼로 찔러 살해하고 모든 증거를 불태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종수는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그렇게 버닝한다.




감상


종수의 마음 속에 깊이 깃든 확신이 정말 진실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종수의 세계에서는 벤이 해미를 살해하고 보일이를 데려와 키운다는 것이 현실이다. 벤은 주기적으로 사람을 살해해 피해자의 물건을 저장해두는 싸이코패스고,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는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여자들이다.


종수는 어린 시절 우물에 빠졌던 해미를 자신이 구해주었던 과거를 잊고 있었고, 해미가 제게 거짓말을 했다고 믿지 않기에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로부터 그 동네에 옛날에는 우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받는다. 그렇게 자기 마음에 확신을 세운 순간, 해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벤이라는 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순간에 제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왔던 가엾은 인물이 되었다. 이제 종수는 해미를 위해 정의의 칼날을 휘두르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자신과 달리 남들을 비웃으며 놀고 먹기 바쁜 벤을.


이 영화는 실재와 부재의, 보통의 경우에는 아주 명확한 경계를 온통 모호하게 지워버린다.

어떠한 메타포에 대해서도 확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시원하게 내려진 판결은 종수의 아버지는 징역 1년6월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종수가 썼던 탄원서를 되짚어본다. '순박한 농부였고 누구에게나 정다운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의 어르신은 반박한다. "솔직히 정답지는 않았지," 라고. 법정에서 형량을 낮추기 위해 어떻게든 좋은 말을 끌어붙여야 하는 탄원서에는, 가정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는 사라지고 친절한 농부가 새겨진 것이다. 적어도 탄원서에서 만큼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존재와 부재의 경계는 그렇게 쉽게 없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영화는 미스터리의 진수에 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감독의 특징이 너무나 강한 작가주의 영화인데도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정답이 없다. 영화를 해석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게 전부인 것이다.


결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꿈꾸는 대로 살면 되는 게 아닐까.

돈이나 차 같은 눈앞의 배고픔에 허덕이는 '리틀 헝거'가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의 의미를 갈구하는 '빅 헝거'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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