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과 상연>과의 유사성?
틸다 스윈튼, 줄리앤 무어.
두 거물급 배우가 출연한 <룸 넥스트 도어>를 보았다. 시놉시스를 보니 최근에 본 드라마인 <은중과 상연>이 떠올랐다. 말기암 환자가 존엄사를 행하기 위해 친구에게 동행을 요청한다. 2024년 영화이므로 <은중과 상연>보다 1년 빨랐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얼마나 유사한지도 궁금했지만, 우선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을 게 분명했기에 바로 재생. (여담이지만, 나도 친한 친구와 함께 봐서 더 좋았다.)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작가다. 그것도 꽤 유명한 작가다. 책 사인회를 하던 중, 오래된 친구로 보이는 스텔라가 나타나 '마사'가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잉그리드와 마사는 예전엔 절친한 친구였으나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병상에 누워있는 마사(틸다 스윈튼)는 암환자의 피폐한 얼굴을 하고 있다(원래도 마른 배우인데 이 역을 위해서 더 감량을 한 것 같았다. 정말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했다...)가, 병문안을 온 잉그리드를 반갑게 맞아준다. 둘의 대화를 통해, 마사가 종군기자였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둘은 오랜만의 소회를 나누고 과거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되짚는다.
둘은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와중,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존엄사를 위한 동행을 요청한다. 다크웹을 통해 자살을 할 수 있는 약을 구했고, 별도의 장소로 가서 죽을 생각이지만, 종군기자로서 늘 죽음과 함께해왔던 본인은 자기가 죽을 때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같이 있을 필요는 없으니 옆방에만 있어달라는 그 말을 잉그리드는 처음에 거절하지만, 결국 마사의 간곡한 부탁에 동행하게 된다.
둘은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우드스톡의 별장으로 간다. 마사는 2층, 잉그리드는 1층 방을 쓴다. 마사는, 자신이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잘 것이며, 만일 그 문이 닫혀있는 날은 그 날일 거라고 이야기한다. 잉그리드는 그 주변 근처의 피트니스 클럽을 끊어서 다니며, 트레이너에게 아픈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철저히 두 배우의 주도로 극을 끌어가는 이 영화에서 단 한 명 주조연급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잉그리드의 남사친 데미안이다. 마사와 잉그리드 두 사람 모두 데미언과 사귀었던 적이 있고, 마사는 데미언과 연락하지 않지만 잉그리드는 계속 친분을 유지하는 중인 듯. 잉그리드는 마사와의 약속을 데미언에게 이야기해놓았다. 혹시 모를 문제에 대비하기 위함인 듯. 잉그리드와 데미언의 우정이 꽤나 돈독함을 알 수 있었다. (마사가 알면 빡쳤을 지도 모르겠다. 잉그리드와 데미언이 여전히 연락하는 사이라는 것도 마사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니까 참작해주었을 수도?)
둘은 별장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함께 서점을 가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면서.
명장면 픽
둘이 고전 영화를 보며 밤을 보내는 장면. 슬랩스틱을 하는 흑백 무성 영화라서 찰리 채플린인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무튼 그런 고전 영화를 보며 둘은 행복하게 웃는다. 마사가 곧 죽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이. 그러고나서 <죽은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마사의 희망으로 재생하는데, 그 영화에선 이런 나레이션이 나온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더라도, 자연은 우리의 생사와는 관계 없이 그대로 흘러가고,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것. 그 진리를 상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잉그리드는 말한다. "날이 밝았어. 넌 살아있고." 아직은 그 날이 아니다. 둘은 산 자로서 함께이지만, 곧 마사가 죽더라도, 그건 존재의 방식이 변하였을 뿐이고, 눈은 모두에게 내릴 것이다.
잉그리드가 데미언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왔을 때, 마사의 방문이 닫혀있다. 쨍한 노란색 코트를 입고 새빨간 립스틱을 칠한, 아름다운 색채를 머금은 마사가 선베드 위에 햇빛을 받으며 죽어있다. '죽음'이라는 명제와 상반되게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마사는 이 땅을 떠났다. 햇빛은 잉그리드(산 자)와 마사(죽은 자)의 위로 공평하게 쏟아져내린다. 눈이 부시다.
장면이 바뀌고, 한 경찰이 잉그리드를 추궁하고 있다. 잉그리드는 시종일관 아무것도 몰랐다는 이야기(마사와 이미 수도없이 약속했던)를 하지만, 경찰은 계속해서 잉그리드를 의심한다. 이 약을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고, 이건 종교적 의미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지가 뭔데?! 진짜 짜증났다. 남의 죽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가 종교인이면 당연히 있는 건가? 종교적 규약은 자신만 잘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 결국 잉그리드는 데미안을 호출하고, 대동한 변호인을 통해 그 자리를 벗어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마사의 딸인 미셸이 등장한다. 틸다 스윈튼과 너무 똑같이 생겨서 깜짝 놀랐는데, 틸다 스윈튼이 젊은 분장을 한 거였다. 잉그리드는 마사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미셸에게 해준다. 미셸은 자신이 엄마를 오해했던 것이냐고 묻고, 잉그리드는 그랬음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그게 미셸의 잘못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준다. 마사도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다고.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복잡하다. 마사와 미셸 간에 오해가 켜켜이 쌓이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그건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오해를 마사가 죽기 전에 풀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구나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잉그리드와 미셸은 함께 선베드에 눕는다. 곧 눈이 내린다. 마치 영화 <죽은 사람들>에서 보았던 것처럼. 영화는 잉그리드의 대사와 함께 막을 내린다.
눈이 내린다. ...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잔잔하면서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색채 대비. 초록색과 빨간색이 거의 모든 장면에서 대비된다. 잉그리드는 빨간색 니트에 초록색 아우터를 걸치고, 별장의 인테리어도 빨간색과 초록색이 배치되어 있고, 잉그리드의 차는 빨간 색이고 별장은 초록색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심지어 잉그리드는 빨간 머리에 초록색 눈이다...! 혹시 감독이 이것까지 의도해서 캐스팅했을까? 그럼 진짜 대박 변태.)
이것은 영화의 주제, '삶과 죽음의 대비'라는 큰 줄기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색이 삶이고 무슨 색이 죽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은 결국 맞닿아있다'는 것이니까. 우리는 모두 그 경계에 가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맞닿은 경계를 앞당기는 것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영화는 역설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경찰이 종교적인 이유로 존엄사를 범죄 취급하는데, 그를 'ass hole'이라고 비난하는 변호사를 통해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나는 둘이 왜 연락을 안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에선 딱히 그 얘기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그 사유가 존엄사라는 대주제와 큰 연관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갖고 있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게 바로 순환이고 자연이다. 아무도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어차피 곧 닿을 죽음이라면, 원하는 순간에, 아름다운 곳에서,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가까이에 둔 채로, 원하는 형태의 죽음을 맞이할 자유는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마사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역시 훌륭했다. 암환자 그 자체. 피골이 상접한 얼굴, 얄팍한 목소리, 늘 숨에 가쁜 발화. 종군기자로서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 속에서 으스러져가는 생명들을 눈앞에서 목격하다가, 그 현실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타자화하던 죽음이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는 것이 삶을 무겁게 짓눌렀을 것이다. 전쟁에서 죽는 이들은 모두 원치 않는 상황에서 죽는다. 마사는 고통받았던 그들을 떠올리며, 그들과는 달리 자기가 선택한 죽음을 맞고 싶지 않았을까.
외로운 죽음이 아닐 수 있도록 동행을 요청한 상대인 잉그리드, 줄리앤 무어. 참 좋아하는 배우다. 온화한 얼굴만큼 따뜻한 친구 역할을 아니나다를까 찰떡으로 소화했다. 자꾸 죽음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미우면서도(마사에게 "그 얘기는 하지 말자"라고 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 선택을 존중하면서 보듬어주는 연기가 좋았다. 잉그리드 같은 친구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결국에 모든 선택은 본인에게 달려있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덕목이다. 물론 그 선택이란 것이 타인을 괴롭히는 범법행위 같은 게 아니고, 삶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인생의 갈림길 같은 것일 때.
불가피하게 <은중과 상연>이 떠올랐다. 그 드라마는 은중과 상연, 두 사람의 과거사를 절절히 비추었다는 점에서 영화와 조금 다르다. 드라마가 두 사람의 우정, 오해, 화해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영화는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존엄사가 널리 허용되면 좋겠다. 종교적 이유와 악용될 여지 때문에 통과되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 효과가 부정적 효과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데미안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한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데 사람이 계속 태어나는 것은 재앙이라는 식으로. 아마 감독은 우리의 삶이라는게 우리에게는 전부이지만, 전체(지구, 생태계 등)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존재 방식의 변화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인간 개체의 탄생과 생존이란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존엄사에 대해 종교 등의 숭고한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도 같은 거라고.
존엄사. 우리 삶과 맞닿아있어 항상 논란이 되는 주제이다. 거시적인 주제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영화였다.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큰 요동이 없어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대사 하나하나와 미장센을 음미하면서 보기 좋았다. 그리고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아름다우므로, 둘의 팬이라면 꼭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