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양귀자의 <모순>에 대한 추천 글은 N년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많이 봐왔지만,
삶이라는 것이 늘 항상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이 충돌하는 무대이므로 최근에서야 읽게 되었다.
책의 배경은 90년대. X세대라 불리우는 70년대생들이 개성을 방출하며 젊음을 누리던 그 시절이다.
책을 읽고 나면 나 역시 그 세대를 살았던 사람인 것처럼 향수에 젖는다. 나는 그 시절에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도록 세밀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스물 다섯의 안진진이라는 여성이다. 참 진(眞) 자 하나를 써서 외자 이름으로 지으려던 이름은 출생신고를 하러 간 아버지의 독단에 따라 두 번을 반복해 써서 안진진이 된다. 성이 '안'씨라 타고나면서부터 부정을 떠안게 되었다고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제목인 '모순'을 상징하고 있다.
안진진의 직계가족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진모까지 네 명이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내복을 팔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상점을 개업하려고 준비 중이다. 2N년 전 만우절에 함께 태어난 쌍둥이 여동생(진진에게는 이모)이 있다.
아버지는 속된 말로 "알코올중독+가정폭력"의 전형적인 인간이다. 오 년 전에 집을 나갔다.
동생 진모는 "조직의 보스"라는 자신의 추구미를 달성하기 위해 그 하위 패치의 삶을 사는 철부지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바로 어머니의 쌍둥이 여동생, 그러니까 이모네 가족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크게 세 물줄기가 교차되며 나타난다.
안진진 가족의 고난사. 안진진의 남편 고르기. 또 하나는 어머니와 이모의 엇갈린 삶이다.
1. 첫 번째 물줄기. 안진진 가족의 고난사.
조직의 보스의 삶을 동경하는 진모는 진진에게 돈을 빌려서 훌쩍 떠나버리고, 비둘기(진모의 여자친구)의 또 다른 남자친구를 살인미수한 혐의로 수배되었다가 곧 자수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둔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만 곧 오뚜기처럼 일어난다. 어머니는 지나친 비관으로 비극을 벗어나는 힘을 갖고 있다.
어머니에게는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익숙했으므로. 가시밭길 위에 또 하나의 가시가 나타난다고 해서 고통은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안진진의 아버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넘쳐서 오히려 잘못되어버린, 풍류에 넘치는 사람. 이모의 말에 따르면 눈빛이 참 선했던 아버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본색을 드러내고, 아내를 향한 폭력에 더불어 경제적인 능력 없는 인간말종으로 변모해간다.
(사실 안진진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아마 요즘 세대의 여성들에게는 모두 어려울 것이다. 술에 진탕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사랑이 넘쳐서' 그랬던 것이라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일까. 작가의 현학적인 문체와, 스물 다섯 여성 화자의 통통 튀는 일인칭 묘사가 혼합되어 가볍게 풀어지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넘쳐 특별해져버린' 가족에 대한 마음과,
고난이 있기에 억센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어머니의 회복탄력성이, 첫 번째 모순이다.
2. 두 번째 물줄기. 안진진의 남편 고르기.
진진에게는 언제라도 제게 청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김장우, 한 명은 나영규.
김장우와 나영규는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
김장우는 마치 안진진의 아버지처럼, 자유롭고 감성적이며, 현실적인 밥벌이 능력은 떨어지나 낭만이 있다.
나영규는 마치 안진진의 이모부처럼, 모든 것을 계획대로 행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재미가 없다.
나영규와 결혼하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행복한 삶일 것 같지만, 안진진은 나영규의 지나친 계획성에 대한 거부감과 김장우의 낭만에 대한 끌림으로 연신 고민을 이어간다.
이러한 안진진의 갈등이 바로 두 번째 모순이다.
3. 마지막 물줄기. 쌍둥이 자매의 엇갈린 삶.
진진의 어머니와 이모는 한끗 차이로 운명이 바뀌었다. 중매 이모의 맞선 제안을 "언니니까 먼저"라며 양보해준 이모 덕분에 어머니는 가정폭력남과 결혼하여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고, 이모는 "모든 것이 정시에 출발하고 도착해야 하는" 이모부와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삶을 불행하거나 행복하다고 단정할 때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한다. 행복이란 것은 입체적이어서 특정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실제로 모두가 불행하리라 생각했던 어머니의 삶은 다른 관점에서 행복이었고,
모두가 행복하리라 생각했던 이모의 삶은 다른 관점에서 불행이었으므로.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모순이다.
결말
이 세 가지 물줄기는 이모의 죽음이라는 강렬한 결말에 다다르면서 하나로 합쳐지고, 진진은 남편 될 사람을 정하고, 달라져버린 아버지와 재회한다. 아마 대다수의 독자가 생각했던 결말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고 (그랬던 독자 중 한 명으로써) 감히 예상해본다. 결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긴장과 감동을 놓치게 되는 것이므로, 예외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겠다.
책을 읽으며 감히 예상했던 결말과는 변주가 이루어지면서, 소설은 사람의 인생을 아우르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삶이란 죽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다는 것.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는 것.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는 것(작가의 말 참조).
결국 삶은 그런 것이다. 살아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소설이란 것은 언제나 현실을 기반으로 가상의 이야기를 건축함으로써, 보편성 위에서 이야기의 단면을 통해 삶에 공감하게 하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게 하는 것이다. 1인칭 시점에서 삶에 대한 묘사가 어찌나 생생했는지, 안진진이라는 인물이 어딘가에서 꼭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너무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이모에게 가기를.
삶과 죽음이, 풍요와 빈곤이, 행복과 불행이, 보편과 특수가 모순처럼 교차하는 우리의 삶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방식대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어 하니까. 그 문장의 대우가 성립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행복한 것을 납득하게 되면, 남이 행복한 것도 기꺼이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남의 행복을 진정으로 축하하는 마음은 어찌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