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제는 진짜 안녕

by 파란레몬

지난번에 이어서 쓰자면 금주는 당연하게 실패했다. 여행 가서 그 지역의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내 큰 즐거움 중 하나였으니까.

다만 이제는 진짜 그 즐거움을 보내줄 때가 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몸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던 것 같은데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있는 피로감정도로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명절에 술병을 크게 앓은 이후 계속 밤마다 열이 38도까지 올라가고 낮이면 괜찮아지고를 반복하던 중이었는데, 그때도 대수롭지 않게 감기겠지~라고 생각했고 한 달이 되어가던 시점에도 코로나인가~?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남편이 제발 병원 좀 다녀오라고 한 달이나 이러면 진짜 가봐야 된다고 설득해서 곧 나을 텐데 하고 투덜거리며 병원에 방문해서 증상을 얘기했더니 의사 선생님께 혼쭐이 났다..

열이 38도면 일반적인 게 아니라 심각한 건데, 한 달이나 방치하면 어떡하냐고.


작년에 응원하던 축구팀이 1부 리그 잔류를 확정 지은 다음날 크게 몸살이 나서 열이 40도까지 올라갔던 경험 때문에 38도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느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기가 왜 이렇게 빨리 안 떨어지지, 나이가 들었나~ 하고 타이레놀을 먹으며 버텼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짓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결핵이 아닌가 싶다며 엑스레이부터 찍어보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주사 맞기가 무서워서 한 달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병원행을 피해 다녔건만 피검사로 결국 바늘을 꽂아야 했는데, 아직도 혈관으로 꽂힌 바늘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라 몸서리가 쳐진다. 나이가 들어도 주사는 무서운 걸 어떡해~


그렇게 피를 맡겨놓고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보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잘 안 받는데, 병원일수도 있겠다 싶어서 받았더니 병원이었다.


"B형 간염 보균자이신데 알고 계세요?"


어릴 때 부모님께 대수롭지 않게 들은 기억이 흐릿하게 나긴 나는데, 주사도 다 맞았고 항체가 생겨서 괜찮다고 알고 있어서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B형 간염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지?

나의 당혹스러움이 전화기 건너로도 느껴졌는지 의사 선생님은 B형 간염 보균자용 추가 검사 비용이 발생된다는 사실과 B형 간염일 경우 약물치료를 해야 되고.. 아무튼 뭔가 열심히 설명해 주셨는데 기억이 흐릿하다.

앞으로 어떡하지 하는 막막함이 앞서서 예, 예 하고 끊은 기억만 난다.


건강하나만 믿고 살았는데 나에게 이런 심각한 중병이..? 라며 업무도 내팽개치고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니 관리만 잘하면 생각보다는 예후가 괜찮아 보였다.

완치가 없는 병이라 평생 관리를 해야 된다는 점이 무서웠지만, 현대인이라면 지병 한두 개 정도 있는 법 아니겠나 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사실 그 와중에 제일 슬픈 사실은 연말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금주령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우습지만 그랬다.. 술꾼이 술을 못 마신다니..


B형 간염 보균자라고만 했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냥 다른 바이러스성 무언가일 수도 있겠지.

가족들도 설마 아니겠지 했지만, 결과는 결국 B형 간염 활동성이 맞았다.

다행히 간수치가 나쁜 편은 아니었고, 다른 염증수치들도 다 괜찮아서 열이 날 이유를 모르겠다며 의사 선생님이 간 초음파를 권유했다.

확실한 사실은 이제는 진짜 술과 작별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가족들에게도 확진 사실을 알리자 다들 다른 것 보다 금주를 해야 된다는 점에 측은해했다.

남편은 정말 진심으로 측은해하는 듯 보였다.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다만 술장의 술들은 모두 남편에게 마셔달라고 할 때는 잠시나마 기뻐 보여 배가 좀 아팠다.

몰랐을 때 보험 미리 들어놔서 다행이라는 생각, 앞으로는 술 말고 다른 즐거움을 즐기며 살면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여행 가서도 술 한 방울 마실 수 없다는 생각과 맛있는 식사에 반주를 즐길 수 없다는 생각이 번갈아가며 들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요 근래 응원팀 때문에 속상한 마음으로 너무 자주 마신 것도 사실이니까..

앞으로 더 건강하게 살려고 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이제 여행 가면 그 지역 막걸리 마셔보기나 술잔 사 오기 대신 다른 경험을 생각해내야 한다.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는데.. 살짝 서글퍼진다. 무알콜 막걸리나 소주는 안 나오나요 흑흑...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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