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는 간 때문이야

by 파란레몬

이 cm송을 아는 분들이라면 건강검진을 받아야 될 어쩌고 저쩌고, 요즘 유행하는 밈을 따라 하기 전에 정확히 언제 나왔는지 알아보려 검색해 보니 2023년에 리메이크가 되어서 나왔었나 보다.

그렇다면.. 어쨌든 피로는 간 때문인 게 확실하다.

그동안 어디 다녀오면 운전은 남편이 혼자 하는데 앓아눕는 건 이상하게 내 몫이고, 내가 막내이건 연장자이건 어느 모임에서든 내가 제일 빨리 지치는 이유는 그저 내 체력이 안 좋아서려니~ 했는데 지금 보니 간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B형 간염 때문에 강제로 금주를 하고 있자니 몸이 좋아지는 건 모르겠고 붓기는 좀 빠진 듯하다.

술을 못 마시는 대신 군것질이 늘어서 몸무게는 1kg 정도만 줄었는데 우리 부부의 추운 계절 전통(?)인 커피 내리는 동안 껴안고 있기를 하다 보니 남편이 몸의 둘레가 전체적으로 줄어든 것 같단다.

다이어트하려면 술을 끊었어야 했구나..


그리고 금주와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나의 예민함도 돌아와 버렸다.

몇 년 전 원인 모를 위의 더부룩함으로 식사량이 줄면서 극도로 예민해져 일상이 무척 힘들었던 기간이 있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데 먹질 못 하니 스트레스를 받았고,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지다 보니 감각도 예민해지고, 그러다 보니 자는 동안 들리는 남편의 코골이 소리에 자다 깨다를 반복해서 잠도 설치다 보니 한동안 피곤하고 지치고 뾰족한 상태로 지냈었다.

살도 10kg 넘게 빠졌었을 정도니.. 물론 그 뒤에 술로 회복했다.

건강에는 안 좋았겠지만 다행히(?) 술을 마시면 더부룩함이 사라져서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어 식사량도 조금씩 늘었고, 술을 마시면 거슬리는 남편의 코골이 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삶의 평안을 유지해오다 보니 나의 술 사랑도 점점 깊어졌던 것인데 하루아침에 금주를 시작하려니 다시 뾰족해지려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술로 채우던 당이 딸린다 싶으니 몸이 알아서 군것질거리를 생각나도록 만들었고, 그 덕분에 식사량은 좀 줄었어도 군것질로 만족감이 채워지자 예전만큼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냄새나 소리에는 다시금 예민해졌는데, 그동안 요령이 생겨 마스크를 끼고 이어 플러그를 꽂은 채 잠드니 감각의 예민함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술을 좋아하기 이전의 내 취미생활이 어땠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다시 시작하려니 영 손에 잡히질 않았다.

요 근래 피로를 핑계로 누워서 숏폼 영상만 쭉쭉 넘기던 탓인지 술 마실 때도 잘만 읽히던 책은 이상하게 집중이 잘 안 됐고, 게임은 재밌지만 하다 보면 빠르게 지쳤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하게 늘어져 드라마만 보고 있자니 그것도 스트레스였다.

숏폼 같은 짧고 자극적인 영상들로 이미 집중력과 인내심이 바닥이 나버렸고, 그런 상태로 롱폼인 드라마를 보려니 될 리가 있나..

디지털 디톡스가 답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업무로 지쳐버린 몸은 빠르고 간단한 도파민을 원했다.


하지만 아주 고맙게도 알고리즘이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힐링 숏폼을 보여주었고, 왠지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전공이 그림일 때는 정말 치가 떨리게 그리기 싫었는데, 그냥 마음 가볍게 취미로 즐기려니 그만큼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침 폰의 배터리가 15%밖에 남지 않아 망설일 것도 없이 빠르게 아이패드로 슥슥 그림을 그렸다.

유튜브 보는 기계로만 쓰던 아이패드가 아주 오랜만에 아이펜슬을 만났고, 나도 아주 오랜만에 뇌가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래서 디지털 디톡스가 중요하다는 거구나.. 건강한 도파민의 중요성을 몸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계속 열이 나고 아프다는 이유로 운동을 쉬었고, B형 간염 활동성 진단을 받은 뒤로는 잠을 줄이기 싫다는 이유로 운동을 쉬었다.

운동도 쉬고, 숏폼만 보면서 늘어져 단 걸 주워 먹는 내 모습은 금주 빼고는 건강을 망치는 것만 착실하게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빨리 알아차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내일부터는 산책도 시작하려고 한다.

피로는 간 때문이지만, 내 간의 피로는 나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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