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눈사람
지금도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볼 때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아버지는 흰 피부와 빽빽한 머리숱, 자식들의 결혼식 외에는 한 번도 염색을 하지 않으셨을 만큼 유난히 흰머리가 적었다. 코와 이마가 반듯하고 인중이 길고 턱이 단단한 미남이었다.
창백한 얼굴과 움푹 파인 볼, 생기 없는 눈동자. 벌어진 입. 누가 보더라도 병색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며 임종 직전까지도 완쾌 후 삶을 간절히 꿈꾸던 분에게 좀 더 빨리 영정 사진 촬영을 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어머니 혼자 병마와 싸우는 아버지를 보살피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순간이 찾아왔다. 주말에야 찾아가는 아들만으로는 갑자기 발생하는 돌발 상황을 대처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외벌이로 삼 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우셨던 산처럼 묵직했던 어머니에게도 눈이 녹듯 급격히 사그라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일은 두려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옆을 지키는 어머니도 변질된 시간에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광주에 있는 누이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시기로 결정하고 짐을 챙겼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작별이 서울 집과의 마지막이었음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귀환하리라는 꿈은 아버지만 꾸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당신의 뜻과 무관하게 아버지의 집이 아닌 누이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매형은 심성이 선한 사람이었고 흔쾌히 아버지 투병 생활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아버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아들 둘, 딸 하나. 가정을 꾸린 아들 둘은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모신다는 제안조차 하지 못했다. 평생을 품에 안아 키워온 자식들에게 잠깐의 휴식조차 기댈 수 없는 상황에 많이 아파하셨겠지.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니 큰아들인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던 아버지가 그 더운 여름날 허술한 옷차림으로 송장처럼 낯선 침대에 누워 낯선 천장을 바라보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이의 집으로 유배 가듯 황급하게 떠나셨다.
누이와 매형, 갓 돌이 지난 손녀가 있는 집에 폐암으로 피를 토하며 혼자서는 거동할 수 없는 아버지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머니가 죽음의 초입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