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족의 탄생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었고 유난히 격식과 절차를 따지셨다. 특히 타인에 비춰지는 모습이 중요한 분이었고 괜한 고집을 부리시곤 했다. 마음이 여리고 모질지 못한 분이었고 성실하지만 좀 더 나은 삶은 꿈꾸는 분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아버지가 내 삶의 방향에 대해 간섭한 적이 없었다. 누이에게도 남동생에게도 같은 교육 철학을 가지신 분이었다. 진학과 진로에 대해 어떤 강요도 없으셨다. 개방적인 교육관을 가지셨던 건지 철저한 방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내가 원하는 방향을 내 역량에 맞게 선택했다.
누이가 아무런 연고도 없던 전라도 광주에 가서 일자리를 얻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은 누이 나이 마흔이 넘어서의 일이었다. 영특한 머리로 집안의 자랑이었던 누이가 삼십 대 후반에 도달했을 때, 누구도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집안의 우환처럼 인식되었다. 전세 계약이 끝난 세입자가 보증금도 없이 방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서른다섯까지가 정당한 계약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리 좋은 누이가 그런 불편한 시선을 못 느꼈을 리가 없었고 평생 머물렀던 서울을 떠나 전라도 광주의 원룸으로 향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누이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지만 집안의 자랑에서 부끄러움으로 위치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기대도 실망도 제3자의 몫이었다.
마흔에 도달한 누이를 출가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눈물겨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탄했고 어머니는 노력했다. 누이가 영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인들을 통해 잠근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 마냥 만남의 자리가 들어오기도 했다. 어떤 조건의 남자였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 다만 몇 번의 만남이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조건을 보며 만나는 선자리에서 인연을 찾긴 더이상 어려워 보였다. 늦을수록 좋은 조건의 사위를 주변에 자랑하고 싶어 했을 어머니의 소망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래도 눈에서 멀어지면 걱정도 줄어드는 건지, 등 떠밀려 떠난 누이에 대한 마지막 기대도 사그라드는 건지 누이의 혼사에 관한 대화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시선과 관심이 또 다른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나에게 옮겨 오는 것을 느끼면서 약속 없는 주말 오후에도 옷가지를 챙겨 문밖으로 나갔다.
기사님 10분만 있다가 출발해요.
꽃놀이철이라 지금 출발해도 2시까지 도착하기 빠듯해요.
설레는 사월이었다. 대절한 버스에는 누이의 지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간간이 부모님 친구분 내외도 탑승하셨다. 45인승 버스 대부분 좌석이 꽉 찼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한다고 인생 버스가 꼭 빈 채로 가지는 않는구나. 하객 없는 초라한 식장이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원 파악을 했던 기억이 남는다.
매형 될 사람과 만나는 두 번째 날이었다. 상견례 일주일 전에 누이가 직장 동료와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광화문 코리아나 호텔에서 상견례를 하고 약 두 달 뒤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 여자와 무안 남자가 전라도 광주에서 삶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버스는 기사님 말씀대로 조금 늦게 도착했다. 결혼식의 시작 또한 우리를 기다렸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결혼, 조금 더 늦으면 어떠랴. 다들 기꺼이 기다려 주었다.
아버지는 한사코 염색을 거부하셨고, 그 흔하다는 혼주 화장도 하지 않으셨다. 딸의 출생부터 마흔이 될 때까지 자신의 힘겨운 삶을 한탄하며 그렸을 사위의 모습과 식장의 신랑 모습이 크게 겹치지는 않는 터라 어머니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나와 남동생은 구원의 손길을 뻗어준 불행한 남자에게 크게 감사해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본 매형은 환한 웃음과 함께 목발을 짚고 뒤뚱뒤뚱 버진로드를 거침없이 행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