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십에 일곱
6시 정각, 전화벨이 울렸다.
“도착하셨죠? 제가 미리 나온다고 했는데, 지금 주차했어요. 바로 들어갈게요.”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제가 지금 나갈게요.”
황급히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전화기를 든 그녀 또한 맞은편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머리를 온통 짙은 노랑을 머금은 유채꽃밭에 덩그러니 놓인 민들레였다. 시큼한 향기에 정신을 뺏겨 갈 곳 잃은 민들레 홀씨가 정처 없이 떠다녔다. 첫눈에 눈이 먼 남자와 눈을 멀게 한 여자가 마주 앉았다. 가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연신 무어라 지껄였다. 사랑에 빠지면 귓가에 빛나는 종소리가 울린다는데 그날 난 똑똑히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싸는 전율을 느꼈다. 나의 시선은 그녀의 눈과 입과 몸짓에 향했고, 그녀는 연신 시계를 바라봤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지만 같은 풍경에 놓여 있지는 않았겠지.
첫 만남이었다. 의례적인 인사와 간단한 호구 조사로 시작하는 자리였다. 만남을 이어갈지, 예의 바르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슬기롭게 마무리할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식사와 커피 한 잔쯤으로 자리를 파해야 했다. 마음에 끌린다고 과도하게 부담을 주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정도는 알 나이였다. 내 나이 마흔하나, 무수히 많은 첫 만남의 경험치가 훈장처럼 또는 상흔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경험과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가 실전에서 빛을 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연륜으로 도달할 수 있다면 마흔하나까지 첫 만남의 자리를 기웃거리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무엇 하나 같지 않았다. 마흔하나, 서른셋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살아온 환경도 가치관도 외양도 모두 달랐다. 어느새 면접관 앞에서 입사를 간절히 꿈꾸는 지원자 마냥 서로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마음은 노랗게 물들었지만 머리는 알고 있었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마음의 크기가 다른 만남의 종착점은 명확했다. 불가능한 일에 시간과 돈과 마음을 쏟아붓는 열정을 버린 지 한참이었다. 전가의 보도처럼 내려오는 나의 매뉴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상대의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최소한 나이에 걸맞게 치근덕대지는 않아야 했다. 그게 상대와 소개해 주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사십 대의 사회적 염치와 체면이었다.
그런데 나의 소개팅 역사에 변수가 생겼다. 강서에 살아온 남자와 강북에 살아온 여자는 같은 서울이라고 해도 일평생 우연이라도 마주쳤을 리가 만무했다. 겹겹이 쌓인 경험에도 난생처음 만남 사람에게 일순간 온통 마음이 뺏기는 일은 생경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이 눈앞에 한 자 한 자 아로새겨졌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