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았던 조깅

by 밀잠자리


수많은 사람들을 밤잠 설치게 만들었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고집불통이지만 심지가 굳은 청년 박새로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던진 질문은 꽤나 철학적이었다. 술맛이 어떠냐. 이에 주인공은 담담하게 대답한다. 달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명대사를 남긴다. 오늘 하루가 인상적이었다는 거야. 벌써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드라마의 줄거리는 희미해졌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포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그 짧은 대화만큼은 내 머릿속 한구석에 각인되어 있다. 논리적인 이성으로 따져보자면 알코올 희석액인 소주가 달게 느껴진다는 것은 미각 세포의 착각이거나 뇌의 화학적 작용일 뿐이겠지만, 문학적 관점에서 그것은 고단한 하루를 버텨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미학일 것이다.


1월이라는 달력이 무색하게 캘리포니아의 날씨는 이상하다. 겨울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차가운 기온과 앙상한 한기는 온데간데없고 점심 무렵의 기온은 섭씨 16도까지 치솟아 있었다. 이것은 당장 달리기를 준비하는 러너에게는 축복이자 동시에 곤혹스러운 변수였다. 반팔을 입어야 할지 윈드브레이커를 걸쳐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애매한 온도. 하지만 화창한 햇살은 광합성을 갈구하는 식물처럼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애초의 계획은 소박했다. 날씨가 조금 더우니 무리하지 말고 동네 한 바퀴나 가볍게 뛰겠다는 다짐을 품고 집을 나섰다. 가볍게 뛰기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내 몸의 땀샘들이 봄 향기를 품은 기온에 화들짝 놀라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이내 중력의 법칙을 따라 뒷머리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얼굴 앞면이었다. 코에서도 맑은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인지 아니면 비강에서 생성된 순수 콧물인지 혹은 그 두 가지가 적절한 비율로 혼합된 하이브리드 액체인지는 분석할 길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 얼굴이 지금 워터파크 개장 직전의 상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혼자 달리는 도중에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닦아내면 그만이고 바람에 말리면 그만이다. 나는 그저 흐르는 것은 흐르게 두라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가볍게 뛰겠다는 나의 다짐은 화창하고 따뜻한 봄 같은 겨울의 주로 앞에서 어디 가고 없었다. 지난 12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졌던 폭우 덕분에 캘리포니아의 민둥산들은 그 유명한 윈도우 배경화면처럼 비현실적인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1월의 햇살 아래 빛나는 잡초들의 푸르름과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의 대비는 4K 해상도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아직 새싹이 돋지 않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은 완벽한 그늘을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가지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적절히 분산시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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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오는 동네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횡단보도에서 멈춰준 운전자에게 손을 들어 감사를 표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낯선 러너에게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는 같은 종족임을 확인했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관대하고 평화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15킬로미터를 달렸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엔진을 과하게 돌렸으니 연료를 보충하라는 위장의 아우성이 들렸다. 부엌에서는 아내가 딸 녀석 하교 시간에 맞추어 분주하게 간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채 부엌으로 직진해 물을 들이켜고 물었다. 여보 지금 먹을 수 있는 것 좀 없어 나 무척 배가 고프네.


아내는 칼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 나를 빤히 쳐다봤다. 고생했다거나 대단하다는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묘했다. 마치 길가에 버려진 젖은 양말을 보는 듯한 눈빛.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코 양쪽에 그 코딱지 좀 떼고 이야기해 더러워 죽겠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코 주변을 더듬었다. 아뿔싸. 달리면서 흘러내렸던 그 정체불명의 액체들이 건조한 바람과 만나 수분만 증발하고 고형물만 남긴 채 화석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양쪽 콧구멍 안에. 주로에서 만난 이웃과 운전자들, 그리고 다른 러너도 봤을까. '털썩' 나의 러너로서의 위엄과 체면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나에게는 위기 상황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본능적인 회로가 있다. 나는 잽싸게 이태원 클라쓰의 아버지로 빙의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깔고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와 그 말은 오늘 러너의 달리기가 인상적이었다는 거야.


아내는 콧방귀를 뀌었다. 푸흐. 그것은 비웃음이었을까 아니면 어이없음에서 나오는 실소였을까. 어쨌든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으니 나의 방어 기제는 성공한 셈이다.


씻고 나오니 식탁 위에는 갓 튀겨낸 꽈리고추 튀김이 놓여 있었다. 젓가락으로 튀김 하나를 집어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바삭한 튀김옷과 꽈리고추 특유의 알싸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그 맛. 달았다. 설탕을 뿌린 것도 아닌데 꽈리고추가 이렇게 달 수가 있나. 땀을 쏙 빼고 난 뒤에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꿀맛이라지만 오늘의 이 꽈리고추는 유독 달게 느껴졌다.


박새로이의 아버지가 말했던 술맛처럼 오늘의 달리기도 그랬다. 비록 얼굴은 엉망이 되었고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달콤하게 느껴질 만큼 오늘 하루는 꽉 차 있었다. 별것 없는 일상이지만 땀 흘리고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인상적인 하루가 아닐까. 나는 오물오물 꽈리고추를 씹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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