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주의)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통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바통 트월링이라는 것이 단순히 막대기를 돌리는 체조가 아니라 온몸의 근육을 사용하며 리듬감과 유연성 그리고 무엇보다 수만 번 떨어뜨려도 다시 줍는 끈기를 요하는 운동이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가느다란 쇠막대기와 씨름하며 울고 웃더니 이제는 제법 선수 티가 난다. 본인 스스로도 그 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인연들과 운동이 주는 순수한 희열 그리고 어제보다 나은 나를 발견하는 성취감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부모로서 대견함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기도 한다. 그런 녀석의 열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서포트하는 일은 피곤하기는커녕 녀석이 뿜어내는 긍정의 에너지를 나눠 받는 즐거운 과정이자 아빠로서 응당 해야 할 의무이자 특권이라 생각한다.
바로 몇일전 1월 16일의 일이다. 딸아이가 원정 연습을 가야 한다기에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연습 장소는 우리가 사는 산호세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진 로다이라는 소도시였다. 캘리포니아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로다이는 그저 지도상의 작은 점일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고 중요한 곳이다. 인구라고 해봐야 고작 6만 명 남짓한 조용한 시골 마을이지만 이곳이 감당하고 있는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캘리포니아 전체 와인 포도 생산량의 20퍼센트를 담당하고 있으며 자타 공인 세계 와인 포도의 수도라 불리는 곳이 바로 로다이이기 때문이다.
지리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태자면 로다이가 자리 잡은 캘리포니아의 센트럴 밸리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 할 수 있다. 동쪽으로는 웅장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다. 겨울이 되면 태평양에서 잔뜩 수분을 머금고 몰려온 구름들이 거대한 산맥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엄청난 양의 비와 눈을 뿌려댄다. 이 물은 산맥을 따라 건설된 댐들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가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여름 태양이 작렬할 때 생명수처럼 대지에 공급된다. 이 천혜의 수자원 시스템 덕분에 캘리포니아의 포도와 오렌지 피스타치오 토마토 아몬드 등 각종 견과류와 과일 그리고 채소들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류 문명이 다시 시작된다면 4대 문명 발상지 다음으로 이곳이 선택되어야 마땅할 만큼 농업에 있어서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하겠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아침 8시부터 시작되는 딸아이의 연습 시간에 맞추려면 집에서 늦어도 새벽 6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왕복 운전을 생각하면 꽤나 고단한 하루가 될 것이 뻔했기에 전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마침 간만에 오후 늦게 조깅을 했더니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고 운동 후 찾아온 급격한 허기를 핑계로 저녁을 평소보다 조금 과하게 먹은 탓에 식곤증까지 겹쳐 그야말로 꿀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어느새 야속한 새벽 5시 알람이 울렸다. 비몽사몽간에 헐레벌떡 일어나 대충 옷을 차려입고 딸 녀석의 준비 상태를 체크했다. 녀석은 아직도 눈을 반쯤 감은 채 머리를 묶고 있었다. 나는 먼저 차에 가서 차 실내를 예열해두겠노라 말하고 차고로 향했다. 차고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1월 잠시 우리 집에서 맡아 돌봐주었던 지인의 반려견 보띠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녀석은 짖지도 않고 그저 반가움에 몸을 비비 꼬며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도대체 주인이 있는 이 녀석이 어떻게 이 새벽에 우리 집 차고에 와 있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지만 잠이 덜 깬 뇌는 복잡한 사고를 거부했다. 지금 당장 친구 집에 데려다주고 오면 연습 시간에 늦을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이 녀석을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본 보띠가 너무 반가웠기에 반나절 동안 같이 드라이브하며 녀석의 귀여운 얼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중에 차 안에서 친구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딸이차에 타자마자 보띠를 뒷좌석에 태우고 출발했다.
딸아이는 잠시 본인이 오늘 연습해야 할 곡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고개를 까딱까딱 리듬을 타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뒷좌석의 보띠 역시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엎드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차 안에는 규칙적인 숨소리만 가득했고 나 역시 쏟아지는 졸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저 멀리 산등성이 위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오렌지빛 라인이 짙은 어둠을 밀어내더니 곧이어 웅장한 황금빛 아치를 그리며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서서히 검은색 실루엣만 보이던 풍경들이 캘리포니아 겨울 특유의 푸르른 녹음으로 옷을 갈아입는 장관이 펼쳐졌다.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면서 새벽 운전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한 상쾌함이 찾아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멀리 보이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 바로 앞쪽인 것 같은데 평범하지 않은 거대한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산불인가 싶었으나 그 구름 사이로 햇볕과는 각도가 전혀 다른 기이한 밝은 빛줄기가 여러 가닥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일단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핸드폰을 꺼내 광학 줌과 디지털 줌을 끝까지 당겨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속의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용암이 아니라 거대한 파편들이었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그 파편들이 빠른 회전을 하며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얼른 차에 올라타 핸들을 꺾어 고속도로 반대편으로 차를 돌렸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미 다른 운전자들도 이상 징후를 눈치챈 것인지 도로 위는 급하게 차선을 바꾸고 역주행을 시도하는 차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경적 소리와 타이어가 끌리는 소음이 들려왔고 금세 도로는 사고 차량들로 뒤엉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더 이상 차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와 딸 그리고 보띠는 겁에 질린 채 서로 걱정하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차에서 내려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 위의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무조건 달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도로 옆 언덕 폭발이 일어난 반대 경사면에 위치한 큰 바위 뒤로 몸을 겨우 숨겼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몇 초가 지나자 하늘에서 화산 덩어리 같은 것들이 우리 주변으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여전히 도로 위에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해 뛰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쪽 바위 뒤가 그나마 안전하니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며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덩이의 검은 물체가 도망치던 사람을 덮쳤다. 그리고 눈앞에서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마치 영화 베놈에 나오는 심비오트처럼 그 검은 물체는 사람의 몸을 휘감더니 순식간에 인간을 흉측한 외계인의 형체로 변모시켰다. 크허윽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변이된 인간은 입에서 이상한 물질을 주변으로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 물질이 닿은 또 다른 인간 역시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계인의 형체로 변해갔다.
이것은 단순한 화산 폭발이 아니었다. 외계 생명체의 침공이자 감염이었다. 단순히 바위 뒤에 숨어 있는 것만으로는 나와 딸 그리고 보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판단을 내려야 했다. 다시 우리는 전력 질주를 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 튼튼해 보이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곳이라면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달렸다. 건물 입구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굳게 닫힌 철문은 열릴 기색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외계인으로 변한 괴물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주먹이 부서져라 문을 두드렸다.
쿵쿵 쿵쿵쿵쿵.
"아빠 일어나 이제 곧 6시야 출발해야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거실을 가로질러 급하게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딸 녀석이 나를 깨우러 와서 문을 두드리고는 채비를 하러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번쩍 눈을 떴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방 안의 공기는 평온했다.
어쩐지 친구네 강아지 보띠가 혼자 우리 집 차고 앞에 와 있을 리가 없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태우고 간다 했다. 꿈속에서의 논리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