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쳐놓은 바리케이드
1월 19일 월요일,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Dr. Martin Luther King Jr.)를 기리는 날답게 숭고하리만큼 맑았다. 인권과 평등, 그리고 비폭력 저항의 가치를 되새기는 이 공휴일은 누군가에게는 역사를 기리는 쉼표이지만, 우리 러너들에게는 주말에 못다 한 롱런의 숙제를 마칠 수 있는 축복 같은 기회다.
나는 클럽 채팅방에 번개런 공지를 올렸다. 장소는 우리가 평소 정기런을 갖는 호수 공원. 하지만 오늘의 코스는 단순한 호수 산책로가 아니었다. 길게 뻗은 언덕을 끼고 있어 고도가 200미터에 달하며, 이 언덕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출발지로 돌아오면 정확히 하프 마라톤 거리가 완성되는, 그야말로 우리 지역 최고의 고강도 훈련 코스다. 서울의 달리기 맛집에 빗대면, 반포 달빛광장에서 시작해서 잠수교를 건너고, 녹사평과 경리단길의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 하얏트 호텔을 지나는 길. 거기에서 다시남측순환로를 통해 남산 꼭대기까지 완전히 정복한 후, 명동과 장충동을 지나 한남대교를 건너 다시 달빛광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상상하면 될 듯하다.
아침 7시,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나 포함 다섯 명의 러너가 모였다. 이미 풀마라톤을 완주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풍뎅이님, 생애 첫 업힐 도전을 선언한 근육질의 초보 러너 디핑닷님, 그리고 꾸준함을 보여주시는 초보 사슴벌레님과 로다님. 우리는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가벼운 조깅으로 마틴 루터 킹 데이의 문을 열었다.
러닝 시작 5km 지점, 개인 사정으로 두 분이 먼저 발길을 돌리셨고, 이제 남은 것은 나와 풍뎅이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디핑닷님 셋뿐이었다. 본격적인 싸움은 7km 지점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언덕이었다. 나는 두 분께 "먼저 올라가서 기다릴 테니,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무리하지 말고 올라오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앞서 나갔다.
약 3km에 달하는 가파른 업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그 오르막의 끝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풍뎅이님은 역시 경험자다웠다. 고통스러운 구간임에도 페이스를 밀어붙이며 꾸준히 올라오는 모습이 대견했다. 그가 풀마라톤을 완주하기까지 함께 흘렸던 수많은 땀방울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디핑닷님. 그의 폼에는 절대 걷지 않겠다는 날 선 의지가 서려 있었다. 백여 미터까지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는 그가 지금 신체적 한계의 임계점에 서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스포츠 심리학에는 중앙 통제 모델(Central Governor Model)이라는 이론이 있다. 티모시 노크스 박사가 제안한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피로는 근육이 실제로 파괴되어서가 아니라 뇌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미리 치는 바리케이드다. 디핑닷님의 뇌는 지금 사력을 다해 그에게 멈추라는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더 가면 심장이 터질지도 몰라, 지금 멈추면 편안해질 수 있어라고 유혹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디핑닷님은 그 뇌의 유혹을 뿌리치고 결국 언덕 정상에 올라섰다. 우리 셋은 정상에서 서로를 향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침 경치는 우리가 정복한 성취감 이상으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땀에 젖은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고통 뒤에 오는 보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운힐뿐이라며, 오늘의 목표인 21km는 이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 역시 녹록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내려오는 약 2.5km의 내리막길. 올라올 때보다 심폐 기능의 부하는 덜하지만, 발바닥부터 발목, 무릎, 전신으로 가해지는 충격은 무시무시했다. 중력에 이끌려 가속이 붙으려는 몸에 브레이크를 걸 때마다 관절은 비명을 지른다. 나는 디핑닷님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며 "자연스럽게 브레이크를 걸 수 있도록 몸에 힘을 빼보세요"라고 조언했다.
무사히 다운힐을 마치고 나니 나머지 8.5km의 평지가 남았다. 평소라면 동네 조깅 수준의 거리였지만, 디핑닷님의 상황은 달랐다. 그는 이미 거대한 업힐에서 신체에 저장된 모든 에너지를 털어냈고, 강한 정신력에도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리막에서 가해진 충격과 피부 쓸림으로 인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나 역시 이 코스를 처음 돌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말도 안 되는 언덕과 끝을 알 수 없는 거리에 멘탈이 산산조각 났던 날들. 몇 번이고 걷고 싶었고, 길가에 주저앉아 쉬고 싶었던 그 고통의 기억이 있기에 나는 그의 페이스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중간중간 쉼을 갖고, 에너지 젤과 물을 보충하며 그의 뇌가 느끼는 위협 수치를 낮춰주려 노력했다. 혼자였다면 뇌가 선포한 비상사태에 굴복해 멈췄을 그가, 동반주 덕분에 지각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며 한 발짝씩 전진했다.
마침내 하프 마라톤의 거리를 다 채웠을 때, 우리의 총 달린 시간은 2시간 20분. 그는 대단했다. 첫 도전에 이 난코스 훈련을 완주해낸 것이다.
운동 생리학적으로 볼 때 오늘 디핑닷님이 해낸 일은 단순히 21km를 이동한 것이 아니다. 사무엘 마코라 교수의 심리생물학적 모델에 따르면, 운동 능력의 한계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자각된 노력(Perceived Exertion)이다. 그는 오늘 자신의 뇌가 설정해 두었던 안전 가이드라인을 무너뜨렸다. 나는 언덕을 넘을 수 없다, 나는 20km 이상 뛸 수 없다고 속삭였을 뇌의 바리케이드를 정면으로 돌파한 것이다. 이제 그의 뇌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을 갖게 될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오늘의 기억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심리적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그 장벽을 기어이 넘어선 뒤에 오는 인내의 보람. 그 여운이 그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기를 기대한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마틴 루터 킹의 날에, 한 러너는 자신을 가둔 한계라는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 우리가 흘린 땀은 그 어떤 이론보다 명확한 진리를 말해줬다. 인간의 진짜 한계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결정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