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다른 표현

실내화 신던 시절의 회상

by 밀잠자리


작년에 출시된 런닝화로 아직 후속 모델이 나오지 않은 시점에 아울렛에 그야말로 대박 세일이 떴다. 출시되자마자 워낙 큰 인기를 끌었던 녀석이라 여태껏 좀처럼 세일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유명한 블랙프라이데이에도 이만큼의 할인율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무려 기본 30퍼센트 세일에 추가 할인 코드까지 넣으면 50퍼센트가 더해져 결과적으로 정가 대비 60퍼센트 이상의 할인을 받은 셈이다. 비록 단 한 가지 색상에 여성용 사이즈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재빠르게 이 정보를 캐치한 우리 달리기 팀의 베테랑 멤버가 단톡방에 고급 정보를 투척해주셨다. 남자분들도 사이즈 업을 해서 주문하면 남녀 공용으로 디자인된 모델이라 착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꿀팁. 다들 이건 사야 해를 외치며 구매 행렬에 동참했고 어림잡아 열 분 이상이 이 대박 세일의 수혜자가 된 듯하다.


마침 오늘 주문한 신발이 도착했다. 박스를 열자마자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새 신발을 신고 성능 테스트를 위해 밖으로 나섰다. 역시 수많은 러너가 추천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발을 넣는 순간 가볍게 착 감기는 쿠션감이 일품이었고 지면을 찰 때 느껴지는 적당한 반발력은 기분 좋은 탄성을 만들어냈다. 도로에 척척 반응하는 접지력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발등과 엄지 그리고 새끼발가락 주변의 편안함이 인상적이었다. 고속 주행에서의 안정감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완벽했다. 원래는 가벼운 조깅만 하려고 나섰으나 신발의 반응이 워낙 좋아 결국 레이스 페이스를 넘어 인터벌 페이스까지 최고조로 올리며 훈련을 마무리했다. 가격의 대박에 이어 신발 성능 자체에도 대박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좋게 운동을 마치고 팀원들이 모인 단톡방에 오늘 달린 기록과 신발 이미지를 합성한 오런완 인증 사진을 올렸다. 그러자 한 멤버가 강하게 동의하며 우리 팀의 단체 러닝화가 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뒤이어 다른 분이 신발에 각자 이름을 써야 할 것 같다는 농담을 던졌다. 그 한마디에 나는 갑자기 타임머신을 탄 듯 어린 시절의 한 장면으로 소환되었다.


친구들과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등교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하얀 실내화 가운데 발등을 잡아주던 고무줄 부분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쓰거나 발바닥 혹은 옆면에 매직으로 이름을 적어두곤 했었다. 개성을 뽐내고 싶은 친구들은 그 위에 유명 브랜드 로고를 직접 그려 넣기도 했다. 신발장에 수십 켤레의 똑같은 실내화가 놓여 있어도 내 신발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던 그 투박한 이름표들이 떠올랐다.


일본어 중에 나츠카시이(懐かしい)라는 말이 있다. 주로 과거의 경험이나 장소, 물건, 이름, 혹은 그때 먹었던 음식 등을 회상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련한 감정이 올라오며 행복했던 일들을 회상할 때 쓰이는 아주 풍부한 뉘앙스를 지닌 표현이다. 이 단어를 내뱉는 순간 그때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하며 자연스럽게 추억의 이야기 보따리가 열리곤 한다. 우리말의 그립다라는 표현과 비슷해 보이지만 뉘앙스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보통 그때가 좋았지라거나 그때 그 사람 혹은 그 장소를 다시 보고 싶다는 의미로 쓰지만 나츠카시이는 그 시절 자체의 분위기와 향수가 좀더 나를 감싸는 듯한 아련한 느낌에 더 가깝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단순히 세일하는 신발을 싸게 사서 기분이 좋은 것을 넘어 똑같은 신발을 신게 된 동료들과 어린 시절의 실내화 이야기를 나누며 나츠카시이라는 감정에 푹 젖어 들었다. 먼 타향땅에서 같은 취미를 공유하며 같은 신발을 신고 달리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마치 그 옛날 실내화 가방을 들고 뛰놀던 골목길의 우정처럼 정겹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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