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나? 그리고 어떤 금요일의 행복
금요일이다. 여러 이유로 마음의 하중이 한결 가벼워지는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달력에는 아직 겨울의 꼬리표가 붙어 있음에도 낮 기온이 예사롭지 않을 때면 괜스레 마음이 먼저 앞서 나가 설레기 마련이다. 그런 내 들뜬 기분을 자연도 눈치챘는지, 이번 주 중반부터 부쩍 따뜻해진 날씨 덕에 앞마당의 왕벚나무가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벚꽃이나 개나리, 매화 같은 녀석들은 참 성격도 급하다. 나뭇잎이 돋아나 주변을 단장하기도 전에 일단 꽃망울부터 터뜨리고 세상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내 마음이 딱 그랬다. 절기상으로는 아직 겨울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데, 가슴 안쪽에서는 이미 분홍빛 봄 기운이 소란스럽게 피어올랐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니, 나잇값 못 하고 벌써 봄바람이 든 철없는 양반인가" 싶어 얼핏 뜨악한 표정으로 대하곤 하지만, 나를 좀 아는 지인들은 벌써 눈을 가늘게 뜨고 한마디씩 던진다. "이제 바깥 온도 걱정하지 않고 반바지 차림으로 뛰러 나갈 수 있어서 신났구만?"
그래, 나를 정확히 읽어줘서 참 고맙다. 맞다. 쌀쌀한 기온을 견디며 근육을 잔뜩 움츠려야 하는 걱정이 사라지면, 내 눈에는 자연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곱절로 반갑다. 여유롭게 인사를 나누고 풍경을 감상하며 달릴 수 있다는 것, 거기서 오는 도파민은 내 삶의 가장 깨끗한 연료가 된다. 여하튼, 지금 나는 매우 행복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런 마음이었다. 달력은 겨울인데 기온은 봄, 아니 한낮에는 여름에 가까운 열기가 느껴지던 날. 그런 들뜬 마음으로 오후 시간에 조깅을 마쳤으니 이미 내 영혼의 배터리는 풀로 충만한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에 겹경사로 희소식이 하나 더 날아들었다. 지금 당장 상세한 내역을 공개하기엔 조금 조심스럽지만, 힌트를 살짝 누설하자면 이제 막 고3이 된 딸아이에 관한 소식이다. 인생 최고의 대박 소식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부모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커다란 걱정 덩어리 하나를 기분 좋게 덜어낼 수 있는 그런 소식 말이다. 아마 비슷한 연령대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나 그 과정을 지켜본 지인들이라면 내 광대가 왜 이렇게 승천해 있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앞마당의 꽃망울이 터지는 날에 작은 축하까지 겹쳤으니, 내 행복은 더 이상 내 몸 안에만 머무를 수 없는 포화 상태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이 기운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알릴 성격의 내용은 아니라서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기쁨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마침 학교를 마친 딸아이가 픽업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2025년 들어 내가 가장 즐겨 듣던 밝은 노래 추천 리스트를 고르고 차창을 활짝 열었다. 왼손을 창밖으로 내밀어 기분 좋게 저항하는 바람을 가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의 정확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어차피 기분이 좋으니 내 멋대로 해석하며 부르는 노래가 더 신나게 느껴졌다.
학교에 도착하니 딸아이가 옆에 듬직한 남자친구를 달고 나타났다. 그리곤 "아빠, 얘도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시간 보내고 싶대"라며 은근슬쩍 끼워 넣기를 시도한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그 녀석이 듬직하고 내 마음에 쏙 드는 녀석이라 해도, 아빠 특유의 근엄한 태도로 한마디 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앞서 말한 온갖 행복한 기운에 절여져 있는 상태 아니던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쿨한 아빠의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입성을 허락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녀석을 위해 단골 보바티 카페에 들렀다. 오리지널 맛과 이 따뜻한 날씨에 찰떡궁합일 것 같은 타이 보바를 각각 손에 쥐여주었다. "자, 오늘은 너희 둘 다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으니(딸에게 온 소식은 곧 남자친구에게도 같은 기쁨이었다), 이건 아빠가 쏜다!"라고 외치니 차 안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녀석들을 집에 내려놓고 나는 잽싸게 슈퍼마켓으로 달려갔다. 바베큐 재료를 카트에 담고, 파티의 격에 맞게 화이트 와인도 한 병 골랐다. 사실 샴페인을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그럴만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소식축배의 펑 소리는 잠시 아껴두기로 했다. 대신 조용하지만 달콤하게 승리의 예감을 즐길 수 있는 리즐링 와인으로 골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리를 시작했다. 전채 요리로는 아스파라거스와 양송이버섯을 마늘 기름에 향긋하게 볶아낸 뒤 굴소스로 간을 맞춰 내놓았다. 메인 요리는 오늘 파티의 하이라이트, 1.5cm 두께로 두툼하게 썬 갈비다. 고기에 가볍게 칼집을 넣고 그 위에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내 지인들이 레시피를 알려달라며 간절히 매달리는 '마포갈비 특제 소스'를 부었다. 소주, 마늘, 생강, 후추, 설탕, 올리고당, 참기름... 이 재료들의 배합 비율이 참 중요한데 이건 우리 집안의 1급 비밀이다. 1시간 정도 정성껏 재워둔 고기를 그릴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내니 냄새부터가 이미 예술이었다. 부족한 탄수화물은 점심에 미리 준비해둔 짜장 소스에 뜨끈한 밥을 비벼 해결했고, 디저트 겸 내 안주로는 각종 견과류와 부드러운 브리 치즈를 준비했다. 이 정도면 집에서 급하게 준비한 파티 치고는 괜찮은 구성이라 자부했다.
다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쳐갈 무렵, 즐거운 대화는 자연스럽게 운동 이야기로 흘러갔다. 체조를 하고 있는 딸아이가 요즘 슬럼프인지 "아, 나 아직 코어 힘이 너무 약한 것 같아"라며 투덜댔다. 그러자 "그럼 네 코어가 얼마나 강한지, 아니면 물살인지 확인해 보자"는 말이 나왔고, 어느덧 거실 요가 매트 위에서 딸과 남자친구의 플랭크 대결이 펼쳐졌다. 결과는 참담했다. 딸은 1분도 못 버티고 주저앉았고, 남자친구 녀석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어, 저는 아직 괜찮은데요?"라고 도발을 시전했다.
그 모습이 분했는지 딸아이가 갑자기 타깃을 나에게로 돌렸다. "아빠! 아빠가 한번 해봐! 아빠 마라토너잖아!" 결국 불똥은 나에게 튀었고, 거실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삼자대결이 성사되었다. 나는 마라톤 출발선에 설 때 러너들이 흔히 쓰는 전술인 '밑밥 깔기'를 시전했다. "야, 아빠 오늘 벌써 달리기 한참 하고 와서 배터리 방전 상태야. 게다가 요리하느라 피곤하고, 지금 리즐링도 벌써 두 잔째 마셔서 몸이 흐느적거리는데... 잘 못 할 것 같은데..."
시작. 1분도 채 안 되어 딸아이는 무릎을 바닥에 찧으며 탈락했다. 그리곤 곧바로 일어나 심판 모드로 돌변하더니, 아빠를 응원하기는커녕 "아빠! 엉덩이가 너무 올라갔어! 배가 너무 내려갔잖아!"라며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심지어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아래로 축 처진 내 티셔츠를 살짝 들추며 배가 바닥에 닿았는지 실시간으로 검역을 실시했다. 참 야속한 녀석이다. 네 남자친구나 잘 챙길 것이지. 딸의 방해 공작에 내 승부욕은 풀가동되었고, 시간은 흘러 3분을 넘어섰다. 드디어 듬직하던 녀석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아, 이제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라며 무릎을 꿇었다.
이겼다! 마라토너 아빠의 자존심을 지켜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찰나였다. '내가 정말 이긴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혹시 이 눈치 빠른 녀석이 여자친구의 아빠의 체면을 위해 적당히 끊어준 것은 아닐까.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숨길 길이 없는데, 녀석은 무릎을 떼자마자 생글생글 웃으며 그 힘든 3분의 증거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 내가 졌구나.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정신승리의 대가답게 '그래도 이렇게 대등하게 붙어줄 수 있는 세월도 이제 몇 년 안 남았겠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따뜻한 날씨, 터져 나오는 꽃망울, 들려온 좋은 소식들, 그리고 따뜻한 저녁 식사 끝에 양보받은 것이 분명한승리까지.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마지막으로 리즐링 한 잔을 더 채웠다. 취기인지 행복인지 모를 몽롱함 속에서 이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정리하며 잠자리에 들려 한다. 고맙다, 오늘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우연과 필연들. 덕분에 참 좋은 금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