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를 보고

철학을 보다 의 한 영상에 대한 감상

by 밀잠자리


유튜브 '보다' 철학을 보다 의 한 영상에서 이야기하는 인공지능의 진화 속도가 가히 충격적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어라 제법인데라고 할수 있는 정도도 수준 있던 녀석들의 아이큐가 이제 140을 육박한단다. 멘사 회원급의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 이제는 소프트웨어라는 가상의 감옥을 탈출해 로봇이라는 육체를 얻어 피지컬 AI로 거듭나고 있다.


공장에서 단순하게 물건을 나르는 건 이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고 이제는 복잡한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유연하게 춤도 추고 심지어 인간과 달리기 시합도 한다. 관절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넘어지면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회복탄력성 까지 갖췄다. 기술의 진보에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로봇에게 콧방귀를 뀌며 했던 말을 철회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야 너희에게 달리기는 그저 이동이자 부품 마모일 뿐이지 우린 다르거든.


오늘은 그 다름에 대해 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들어 볼까 한다. 기술이 인간의 턱밑까지 쫓아온 이 시대에 우리가 왜 굳이 땀을 흘리며 뛰어야 하는지에 대한 엔지니어적 변론이자 인간 찬가다.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감가상각과 강화의 차이다. 로봇은 소모되지만 인간은 강화된다. 최신형 휴머노이드 로봇이 마라톤 풀코스를 뛴다고 가정해 보자. 엄청난 배터리 효율과 완벽한 페이스 조절로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할 것이다. 하지만 완주 후 그 로봇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마찰열로 인해 닳아버린 관절 베어링 과열된 배터리 셀 마모된 타이어 혹은 발바닥 고무 패드뿐이다. 로봇에게 물리적 움직임은 곧 마이너스다. 움직일수록 수명은 줄어들고 부품은 헐거워진다. 이것은 기계공학의 절대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철저히 따른다. 하지만 인간은 정반대다. 우리는 달릴수록 업그레이드된다. 이것은 엔지니어링의 관점에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이다. 생리학에는 울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뼈는 충격을 받을수록 그 부하를 견디기 위해 골밀도를 높여 더 단단해진다는 원리다. 근육 또한 마찬가지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근섬유가 미세하게 찢어지는 손상을 입어야 비로소 휴식 과정에서 더 크고 질기게 재생된다. 심장은 펌프질을 거듭할수록 심실이 확장되고 근육이 두꺼워져 한 번에 더 많은 피를 뿜어내는 강력한 엔진으로 튜닝된다. 이건 로봇 공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미스터리다. 쓰면 쓸수록 고장 나는 게 아니라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기계라니. 우리는 안티프래질 즉 충격을 받으면 더 단단해지는 유기체다. 로봇이 고장 난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해서 영생을 꿈꿀 때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재건하며 강해진다. 이것이 로봇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육체의 신비이자 우리가 땀 흘려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권태를 이기는 셀프 채찍질이다.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궁핍은 하류층을 때리는 채찍이고 권태는 상류층을 때리는 채찍이다. AI와 로봇이 인간의 모든 노동을 대체하는 세상이 오면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의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인간들이 그리스 귀족처럼 모여 포도나 따 먹으며 하루 종일 철학 토론만 한다면 행복할까. 천만에. 곧 지독한 권태가 찾아올 것이다. 무료함이라는 바이러스는 코로나보다 더 무섭게 인류의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이때 달리기는 인간이 그 지독한 권태를 이기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고상하고도 능동적인 셀프 채찍질이다. 달리기는 단순히 두 다리를 교차하는 물리적 행위가 아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그만 뛸까 라는 나약한 자아와 끊임없이 싸우는 멘탈 트레이닝이다. 안락한 소파와 넷플릭스가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본능을 거스르고 스스로 고통을 선택해 그 안에서 살아있음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 정신적 근육 단련은 AI가 대신해 줄 수 없다. AI 비서가 주인님 오늘은 제가 대신 10킬로미터를 뛰어드리고 데이터를 전송해 드릴게요 라고 한들 내 멘탈이 강해지겠는가. 내 허벅지가 쫄깃해지고 내 뱃살이 들어가겠는가. 고통을 위탁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후의 보루다. 우리는 달리기를 통해 권태라는 상류층의 질병을 예방하고 스스로 삶의 밀도를 높이는 주체적인 존재가 된다.


세 번째는 교육의 관점에서 본 아우스빌둥과 빌둥의 차이다. 독일의 교육 철학에서 나온 이 개념은 지금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훌륭한 부품이 되기 위한 직업 교육 즉 아우스빌둥에 목을 맸다. 코딩을 배우고 영어를 익히고 엑셀을 다루는 기술을 연마했다. 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인간은 이제 AI를 이길 수 없다. 코딩도 번역도 데이터 분석도 AI가 인간보다 수천 배 빠르고 정확하다. 기능인으로서의 인간의 유통기한은 끝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빌둥이다. 빌둥은 인간 자신을 형성하고 내면을 고양시키며 삶을 향유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쓸모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달리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해부학 생리학 심리학이 똘똘 뭉쳐 있다. 내 발의 아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관찰하며 인체의 신비를 배우고 심박수와 페이스를 조절하며 내 몸의 에너지 대사를 익히고 러너스 하이를 느끼며 뇌과학과 심리학을 체험한다.

우리는 달리기를 통해 기능인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더 이상 사회의 부품이 아니라 내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빌둥이 아닐까. 로봇은 데이터를 처리하지만 인간은 경험을 해석한다. 달리기는 그 해석 능력을 길러주는 최고의 인문학이다.


네 번째는 변화하는 사회 구조다. 로봇이 생산을 담당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도 바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억지로 나가야 했던 상사와의 등산 모임이나 비즈니스 골프 같은 수직적이고 이해관계에 얽힌 관계는 힘을 잃을 것이다. 대신 순수한 취향으로 뭉치는 수평적 연대의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 주변의 러닝 크루를 보라. 우리는 서로의 직업이 뭔지 연봉이 얼만지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인지 묻지 않는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오직 오늘 페이스 괜찮으세요 무릎은 좀 어떠세요 라며 서로의 호흡을 챙길 뿐이다. 필요에 의해 억지로 모였다가 눈치를 보며 헤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달리기라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 모였다가 땀을 흘리고 나면 쿨하게 흩어지는 이 담백한 관계. AI가 모든 업무를 처리해 주는 시대에 인간은 결국 이런 취향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며 외로움을 달랠 것이다. 로봇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지만 인간은 공감으로 연결된다. 땀 냄새 섞인 그 끈끈한 연대감은 디지털 신호로는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축복이다.

IMG_5434.jpg

마지막으로 의미의 문제다. AI는 세상의 모든 정답을 알고 있다. 챗GPT에게 마라톤 서브 3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라고 물으면 1초 만에 젖산 역치 훈련부터 인터벌 스케줄 영양 섭취 가이드까지 완벽한 훈련 계획표를 짜줄수 있다. 하우에 대한 답은 이미 AI가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이 힘든 걸 왜 해야 해 라는 질문 와이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아무런 생산성도 없고 돈도 안 되고 오히려 돈을 써가며 골병이 드는 이 짓을 왜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땀 냄새나는 옷을 입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우리 인간만이 각자의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혹은 그냥 좋아서. 인문학은 의미라는 우물을 파는 행위라고 했다. 나는 오늘도 그 우물을 파러 달리러 나간다.



토요일 연재
이전 01화비효율의 미학